정리 해고에 대한 빗나간 보복, 산업 스파이
  • 丁喜相 기자 ()
  • 승인 1998.0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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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기업들 ‘기술 사냥’ 기승…퇴직자 관리 등 보안 비상
삼성전자와 LG반도체가 보유한 첨단 반도체 기술을 산업 스파이들이 대만으로 유출한 사실이 적발됨으로써, 한국의 산업 경쟁력이 내우외환에 처해 있음을 드러냈다. IMF 체제로 기업의 생존 여건이 극도로 악화한 가운데 그나마 딛고 일어설 지렛대로 기대했던 알짜 기술마저 외국 경쟁업체들이 손쉽게 훔쳐갈 표적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IMF 한파로 가뜩이나 충격에 휩싸인 국민이 이번 사건을 접하고 ‘믿었던 곳간마저 도둑맞은’ 심정에 빠진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수원지검 특수부(부장 곽무근 검사)는 이런 여론을 의식해 관련자 18명을 구속 또는 수배한 뒤 내부 공모자 추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번 사건이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데 있다. 이 사건을 초기에 인지하고 탐문 조사를 벌여 검찰에 넘긴 안기부의 한 관계자는 “백만명이 넘는 국내 체류 외국인 중 누가 산업 스파이인지를 가려내기는 하늘의 별 따기와 같다. 워낙 수법이 교묘해 안 잡히고 넘어간 경우도 많다”라고 말한다.

외국 산업 스파이, 서울에만 5백여 명

더욱 놀라운 점은, 이번에 반도체 기술을 도둑맞은 삼성과 LG가 국내 기업 최대의 보안 시설을 갖추고도 앉아서 당했다는 사실이다. 두 회사는 국내 보안산업의 선두 주자로서 다른 기업들에 보안 장비와 시스템을 생산해 공급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한 보안 관계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런 사건이 발생할 것에 대비해 철저히 보안 관리를 해 왔지만 외국 경쟁 업체가 일부 전·현직 연구원의 머리 속에 든 기술을 빼내는 것까지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애사심이나 애국심에 호소하는 방법 외에 완벽한 보안이란 어렵다는 것을 절감했다”라고 말한다. 이번에 구속된 전·현직 연구원 14명은 대부분 석사 출신으로, 국내 업계에서 낮은 대우와 승진 불만에, 최근 IMF 한파로 해고 위기까지 겹치면서 대만 경쟁 업체의 거액 매수에 손쉽게 넘어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국의 산업 기술이 국제 산업 스파이 조직의 표적이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난 90년대 초부터 자동차·전자·반도체·디지털 휴대통신(CDMA관련 기술) 등 세계적 수준을 가진 대기업의 기술 영역은 주요 경쟁국들의 정보전 대상이었다. 안기부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서울에서 암약하는 외국 산업 스파이는 약 5백명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상사원, 공관원, 산업기술연수생, 합작 투자 및 공동 연구요원 등 합법적 신분으로 위장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안기부는 산업 보안 전담팀을 구성해 외국인 산업 스파이에 대한 동향 파악 및 외사 방첩 활동을 벌이고, 수시로 표적이 되는 국내 기업에 보안 교육을 해왔다.
그러나 철저히 합법적 신분으로 위장해 국내에서 암약하는 외국 산업 스파이를 적발해 단속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국내 기업과의 협력·합작 등을 위한 합법적 정보 수집 명목으로 활동하면서 첨단 기법을 써서 기술·경영·영업 정보 빼내기를 시도한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생산 라인을 촬영할 수 있는 특수 카메라, 일단 설치만 하면 세계 어디서나 수신이 가능한 원격 도청 장치, 적발될 가능성이 없는 레이저 도청기 등 첨단 스파이 장비들이 주로 동원된다.

한국의 첨단 기술을 노리는 산업 첩보 활동은 이처럼 은밀하게 이루어지며, 간혹 적발되더라도 미묘한 외교 분쟁으로 이어질 것을 염려해 양국 정부 차원에서 무마되는 예도 있다. 안기부 관계자는 “한번은 사회주의권의 한 국가 요원이 국내 대기업의 기술 정보를 빼내는 것을 우리 부서 요원이 적발했는데, 상대국 정부가 자기 나라의 국제 위신이 실추할 것을 염려해 비공개를 요구했다. 만약 공표할 경우 그 나라에 있는 우리측 상사원과 외교관 중 일부를 보복 추방하겠다고 해서 빼돌리려 한 정보를 돌려받는 선에서 수습한 적도 있다”라고 말했다.

국내 산업 정보 전략 전문가들에 따르면, 한국의 산업 기술 정보를 노리는 외국 정부와 기업들의 목표와 활동 주체는 다양하다고 한다. 미국은 자국의 지적 재산권 보호 및 효과적인 기업 합병·매수를 위해 한국 기업의 실태를 끊임없이 체크한다. 미국측이 최근 IMF 체제를 맞아 특히 신경 쓰는 분야는 은행·증권·보험 등 금융계와 자동차 부품 생산 업체들의 동향이다. 미국 기업들은 이를 위해 한국 회사들의 고급 정보와 기술을 가진 인력을 거액에 스카우트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이런 추세를 반영하듯 요즘 서울에는 고급 두뇌만을 전문으로 스카우트하는 ‘헤드 헌터’가 늘어나고 있다. 이들 중 일부 업체들은 한국 진출을 노리는 외국 업계의 제의를 받고 인력 스카우트를 도와주는데, 큰 건에는 한 번에 수천만원의 커미션이 오가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에 삼성전자와 LG반도체의 64메가D램 제조 기술을 대만으로 유출하는 일을 중개한 핵심 회사인 (주)KSTC 도 국내 고급 인력을 스카우트해 외국에 연결시킨 헤드 헌터 업체로 밝혀졌다.
“IMF 시대에는 휴먼웨어 보안에 더 신경써야”

첨단 기술 분야에서 한국과 경쟁하거나 앞서가는 일본 기업들은 경쟁 우위를 지속하려는 ‘견제’ 차원에서 치밀한 정보 수집 활동을 벌인다. 일본은 일본무역진흥회(JETRO)와 한국 진출 기업 연구소 및 종합상사들을 활용하고 있다.

이 밖에 국제 시장에서 한국과 경쟁하는 대만·중국(홍콩 포함)과 후발 개도국인 태국·인도네시아·필리핀 같은 나라의 기업들은 한국의 견실한 중소기업을 상대로 알짜 기술 정보를 빼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들 기업은 알짜 기술 정보를 가진 한국 기업 퇴직자와 공동 연구 및 합작 회사를 차리는 방식과 산업기술연수생을 활용하는 방법 등으로 기술 정보를 빼내고 있다.

지난해 8월에는 (주)로케트정밀에서 기계 설계를 하다 집단 퇴직한 기술자 7명이 건전지 제조 기계 및 설비 도면 63장을 가지고 나가 홍콩의 우력기업공사와 합작 회사를 설립했다. 이들은 그뒤 훔친 기술로 만든 제품을 중국의 국제 입찰에 부쳐 (주)로케트건전지에 40억원의 피해를 입혔다가 뒤늦게 붙잡혔다. 또 93년에는 (주)다단조에서 핵심 특허 기술인 고압가스밸브접착술을 필리핀 출신 산업연수생이 훔친 일도 있었다. 필리핀의 한 금속공장 사장 아들이 산업연수생으로 위장해 들어와 이 회사 첨단 기술이 담긴 접속부품 샘플과 기술 내용을 빼내간 것이다.

이처럼 한국을 상대로 한 외국의 산업 스파이전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지만 피해를 본 회사들은 이를 숨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주식 시장 및 영업에 미칠 부정적인 파장과 회사 이미지 실추를 우려해서다.

산업 스파이로부터 입은 해를 숨기려 하는 것은 세계 각국 기업의 공통된 현상이다. 미국산업보안협의회 정보보호위원인 브라이언 홀스타인 씨는 이를 두고 “산업 스파이 범죄의 피해를 보는 것은 성병에 걸리는 것과 흡사하다. 걸린 사람은 많지만 아무도 얘기하려 들지 않는다”라고 표현했다.

최근 대한상공회의소가 국내 5백대 기업을 조사해 발표한 내용을 보면, 산업 스파이 때문에 속앓이하는 기업이 적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조사 자료에 따르면, 기술상 기밀을 보유하고 있다고 응답한 기업이 80.7%, 영업 기밀에 대한 법적 분쟁을 경험했다고 답한 기업이 9%로 나타났다.

정부는 산업 스파이 사례가 날로 늘어나자 93년부터 부정경쟁방지법에 영업비밀보호 조항을 삽입해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공개 재판 과정에서 기밀 내용이 공공연히 알려지고, 이미지마저 실추할 것을 우려한 대부분의 기업이 소송을 꺼려 이 법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것으로 지적된다.
정부 차원 산업 보안 대책 절실

게다가 외국 산업 스파이의 표적이 된 경우 한번 피해를 보면 아무리 하소연해도 회복될 길이 막막하다. 이번 반도체 기술 도난 사건의 경우 삼성과 LG측이 관련 기술 개발에 들인 비용은 6천억원에 이른다. 또 훔친 기술을 대만 기업이 실용화해 국제 시장에 내다 팔 경우 한국측은 무려 6조원에 이르는 수출 손실을 입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결국 첨예한 국제 경제 전쟁 시대에 패자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정부와 기업이 산업 스파이와 전쟁을 벌이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서울을 무대로 한 세계 각국의 산업 첩보 활동이 제철을 만났는데도 국내 기업의 보안 수준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전국의 기업체들을 대상으로 산업보안교육을 하고 있는 (주)IBS정보전략연구소 윤은기 소장은 “아직도 한국 기업인들 가운데는, 보유한 기술은 첨단이면서도 보안에 대한 사고 방식은 후진국형인 경우가 많다. 대개 디스켓이나 설계도 등 눈에 보이는 것만 훔치지 않을까 생각해 여기에만 막대한 비용을 들일 뿐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정보를 빼내가는 일은 상상도 못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는 보안 관리의 세 가지 필수 대상으로 하드웨어·소프트웨어·휴먼웨어를 든다. 하드웨어란 출입자 통제장치 등 물리적 보안 대책을, 소프트웨어란 사내 보안에 관한 제도·규정·프로그램을, 그리고 휴먼웨어란 기밀을 다루는 종업원에 대한 교육 및 관리를 뜻한다. 윤소장은 “IMF 시대가 되면서 휴먼웨어 부문의 보안 관리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아무리 철옹성 같은 통제 장치를 만들어둔 기업도 임직원들의 머리 속에 들어 있는 기술 정보나 노하우까지 통제할 수는 없다”라고 말한다. IMF 체제에서 살아 남기 위해 각 기업이 구조 조정을 대대적으로 벌이는 과정에서 휴먼웨어를 소홀히 하자, 외국 산업 스파이가 그 틈새를 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조 조정 과정에서 기업이 불가피하게 정리 해고를 하더라도 회사의 핵심 기술과 노하우를 알고 있는 임직원이 경쟁 업체에 취업하는지 철저히 체크하고, 동우회 운영등을 통해 관리하며, 자문역으로 위촉하는 등 퇴직자 관리 프로그램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 윤소장의 주장이다.

이와 더불어 정부 차원에서도 IMF 시대 산업 보안 대책 마련을 서둘러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세계 각국의 정보 기관은 냉전 종식 이후 체질 변화를 서두르면서 국제 산업 첩보 수집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한국의 안기부도 얼마 전부터 이 분야에 대한 업무를 개시했지만 아직은 미흡한 수준이라는 것이 내부의 진단이다. 김대중 차기 대통령도 당선 직후 안기부장을 만난 뒤 ‘앞으로 안기부는 국내 정보 활동 대신 해외 산업 정보 수집 활동에 주력하도록 하겠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번 반도체 기술 도난 사건은 외국 정보를 수집하는 일 못지 않게 국내 산업기술을 지키는 것이 국익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IMF 체제로 외국 기업들이 다투어 ‘먹이 사냥’에 나서는 한국의 현실에서, 국부를 앉아서 도둑맞지 않도록 산업 스파이를 방지하는 안기부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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