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 시민운동 심는 따이한
  • 成耆英 기자 ()
  • 승인 1995.1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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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실련, 영농 자금 대출 등 지원 사업…직업훈련센터 건립도 추진
베트남은 적어도 한국인에게 두 가지 의미로 기억되고 있다. 참전 경험을 가진 40, 50대에게 베트남은 포성과 비명이 메아리치는 지옥의 밀림으로 남아 있다. 반면 70년대 말과 80년대 초 정치적 암흑기에 사회 변혁을 꾀하던 지식인들에게 베트남은 연구 대상이었다.

우리에게 상반된 기억으로 남아 있는 만큼 수교 이후의 베트남에 대한 지원 사업도 다른 모습을 띨 수밖에 없다. 정부 차원의 ‘경제 협력’ 사업이 베트남의 조속한 시장 경제화를 유도하는 것이라면, 민간 차원의 협력은 그들에게 우리의 국가 이미지를 높이는 동시에 베트남의 부흥과 자활을 도우려는 것이다.

싼 이자로 양돈·양계 자금 대출

그중에서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우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베트남에 시민운동의 씨를 뿌리고 있다. 경실련은 지난 12월12일 서울 YMCA에서 ‘경실련 베트남 사업 후원의 밤’ 행사를 가졌다. 이 자리에는 경실련의 베트남사업후원회장을 맡은 김진현 서울시립대 총장을 비롯해, 김숙희 전 교육부장관, 정주년 한국국제협력단 총재, 안병균 나산실업 회장, 이용태 삼보컴퓨터 회장 등 각계 인사 30여 명이 참석해 사업 후원 방향을 논의했다.

경실련이 베트남에 시민운동을 ‘수출’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5월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경실련 국제위원장을 맡고 있던 서경석씨(현 민주당 8인소위 위원)를 중심으로 개도국 지원 사업을 논의하면서 베트남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95년 책정 예산은 1억4천만원. 본격적인 사업을 준비하려면 베트남 프로젝트를 현지에서 준비하기 위한 인물을 뽑아야 했다. 경실련에서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박승룡 부장이 먼저 나섰다. 한 사람을 더 찾고 있는데 40대 중반인 한 남자가 이 사업에 자원 봉사를 하겠다고 서경석씨를 찾아왔다. 처음에는 그 의도를 의심하여 만나주지 않았는데도 경실련측을 설득한 끝에 자원 봉사의 자격을 ‘따낸’ 이 사람은, 가구 회사의 이사직을 팽개친 것은 물론 사업을 모두 정리하고 나서 지금 베트남 현지에서 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는 박양수씨(44)다.

인원이 확정되자 먼저 착수한 일은 신용금고 사업과 직업훈련센터 건립 사업 두 가지다. 베트남의 1인당 국민소득은 2백달러 정도이다. 경실련은 현지 농민에 대한 자금 대출 사업부터 시작했다. 하타이 성(省)측은 애초 30만달러 정도를 무상으로 지원해 달라고 요청해 왔으나 돈을 꾸어 줄 당사자인 경실련은 그런 방식을 거부했다. 오히려 경실련은 “빌려 준 돈은 반드시 회수돼야 하고, 그 관리를 우리가 직접 맡겠다”고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결정된 지원 방식은 2개월 단위로 현지 농민을 지원하되 대출 조건은 월 이자율 0.5%였다. 현지 농업은행의 월 3% 이자율에 비하면 농민들에게는 좋은 조건이었다. 경실련이 지원 사업을 벌이고 있는 하타이 성 푹라 마을은 베트남 북부 극빈 지역의 하나이다. 금융이나 신용 사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지역이기 때문에 자금 회수가 어렵지 않겠느냐는 애초의 우려와 달리 경실련의 사업 목적을 주민들에게 설득한 결과 자금 회수율은 백%를 기록했다. 빌려준 자금은 대부분 현지 농민들이 닭이나 돼지를 기르는 데 지원됐다. 경실련은 이를 바탕으로 현지 농민에게 양계와 양돈 기술을 가르친다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신용금고 사업이 주민에 대한 단기적인 ‘자활 사업’의 성격을 지닌 것이라면 또 다른 방향에서 추진하고 있는 직업훈련센터 건립 계획은 더 먼 장래를 내다보는 사업의 하나이다. 하타이 성이 제공한 4천평 정도의 부지에 최신 목공 기술을 가르칠 직업훈련센터를 건립하는 계획은 현재 건물 설계가 마무리된 단계이다. 내년 5월쯤이면 이곳에 건물이 완공된다.

건축비만 26만달러 정도가 책정되어 있는 이 사업에는 기업들의 협찬도 끌어들일 수 있었다. (주)현대종합목재와 (주)한샘가구가 목공 기계류에 대해 지원할 의사를 밝힌 것이다. 이 목공 기계들은 현재 선적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 기업말고도 12일 열린 후원의 밤 행사에는 대한항공·금호그룹 등 몇몇 기업 인사들이 참석해 관심을 나타냄으로써 사업 전망을 밝게 하고 있다.

“베풀기보다 나누기가 더 중요”

이런 사업들을 통해 경실련이 의도하는 것은 어찌 보면 대단히 추상적인 것들이다. 이를테면 경실련이 표방하는 ‘나눔’ 정신을 현지에 알리고, 아울러 우리 사회에도 도덕과 윤리의 정신을 높인다는 것 따위이다. 당장 병원을 지어 주거나 뭉칫돈을 안겨 주지 못하지만 경실련이 이런 사업들을 통해 노리는 것은 이런 추상적인 목표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다. 언젠가 남북한이 하나로 합쳤을 때 최소 비용으로 북한 지역의 자립을 도울 경험을 민간 차원에서 쌓고자 하는 것이 베트남 지원 사업의 또 다른 목표이다. 경실련 베트남사업위원회 위원장 강명득 변호사는 “경실련의 베트남 지원 사업은 그곳에도 경제 정의의 씨앗을 뿌리는 작업이다. 우리의 베트남 지원은 결코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라 베트남과 한국이 인간적인 유대를 맺어가는 과정이다”라고 지원 사업의 의의를 평가했다.

경실련의 해외 지원 사업은 사실 베트남만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다. 시민운동의 국제화 작업은 이제 걸음마 단계이다. 그야말로 조심스레 한 장씩 벽돌을 쌓아 올리는 정도인 것이다. 그러나 구상만큼은 베트남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있다. 얼마전 우리나라와 수교한 라오스·몽골·캄보디아가 그 다음 목표다. 여기에는 베트남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한국인 봉사단이 들어가는 방법도 있지만 그보다는 시민운동과 함께 성장한 베트남 현지 주민을 보내는 방법도 모색하고 있다. ‘시혜’와 ‘수혜’의 관계가 아닌 ‘스스로를 돕는’ 방식으로 전환하려는 것이다. 경실련 김혜경 국제부장의 말처럼 단순히 기업이나 국가의 이미지 전략으로서가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사는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라면 베푸는 것보다는 나누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수많은 한과 아픔을 간직한 채 남아 있는 한·베트남 관계에 경실련의 실험이 어떤 바람을 불어넣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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