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징용자 송환선 우키시마호 만행 사건
  • 朴晟濬 기자 ()
  • 승인 1995.1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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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시마호 만행의 진상/일본, 패전 뒤 한인 징용자 3천~7천명 수장
일본 열도 가운데 가장 큰 섬인 혼슈 북단. 일본이 패전을 선언한 지 꼭 1주일 뒤인 45년 8월22일 밤 10시께 4천7백30t짜리 화객선 1척이 아오모리 현 최북단인 시모키타 반도의 오미나토 항을 출발해 쓰가루 해협으로 향했다. 이 날 항구를 빠져나간 화객선은 37년에 건조된 뒤 규슈와 오키나와를 오가며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나르다가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일본 해군에 징발됐던, 당시로서는 대포와 각종 무기까지 장착해 군사 작전용으로도 손색이 없던 우키시마마루(浮島丸)였다.

출항하던 날 승선했던 사람은 승무원인 일본 해군 병사들을 빼고는 모두 한국인이었다. 일본측 공식 집계에 따르면, 당시 배에 탄 한국인 수는 3천7백50명(7천명이 넘는다는 주장도 있다). 배가 닻을 내리도록 예정된 곳은 부산(또는 원산)이었다. 말하자면, 우키시마호는 그 때까지 일본 북부 지역에서 강제 노역으로 혹사당한 한국인들을 돌려보내기 위해 일본측이 특별히 마련한 ‘강제 징용자 송환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귀국할 꿈에 부풀어 배에 오른 한국인 대부분은 살아서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당초 부산을 향해 출항했던 배가 항로를 바꿔 45년 8월24일 교토 근해로 들어가더니 그 곳 마이즈루 만 시모사바가 앞바다에서 원인 모를 폭발 사고를 당해 침몰한 것이다. 승선자는 거의가 배와 함께 바다에 수장됐다. 배 밑창 선실에 있다가 갑자기 변을 당하는 바람에 미처 빠져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배에 탔던 사람 가운데 5백50여 명만이 구조대의 손길에 목숨을 건졌다. 당시 사고 원인에 대한 조사 결과는‘미군이 매설한 기뢰에 부딪쳐 일어난 단순 해난 사고’로 나왔다.
50년 만에 진상규명위원회 발족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해난 사고인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이 다시 거론되는 까닭은 올해가 광복 50주년이기 때문만은 결코 아니다. 당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생존자 중 일부가 고국에 돌아와 50년 가까이 뿔뿔이 흩어져 살다가 최근 한자리에 모여 매우 충격적인 증언을 하는 등 진실을 규명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존자들은 12월2일 충남 천안시 시민회관에 모였다. 이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던 것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창립 대회를 가진 ‘우키시마호 폭침 진상규명위원회’(회장 전재진)의 주선과 노력에 의해서였다.

충남 천안·충북 영동·전남 장흥·전북 진안·경기 안양 등 전국 곳곳에서 모여든 생존자 23명의 주장은 한결같았다. ‘침몰 사고는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본 해군이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한, 한국인 강제 징용자에 대한 의도적인 학살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증언은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에 대해 일본측이 여지껏 공식으로 주장해온 촉뢰설, 즉 기뢰에 부딪혀 배가 침몰했다는 말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42년 4월 홋카이도로 끌려가 그곳 비행장에서 강제 노역에 종사하다가 우키시마호를 탔던 김종호씨(전북 진안군)는 “사고가 일어나기 직전 일본 해군이 보트를 타고 배에서 빠져나가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역시 홋카이도 스미모토 탄광에서 일하다가 배를 탔던 주윤창씨(전남 여천시)는 “함께 구조됐던 헌병으로부터‘배 밑부분까지 전기선이 늘어져 있어 절단하려고 했으나 기구가 없어 절단하지 못했는데 잠시 후 폭발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생존자들은 모두 일본 해군이 일부러 사고를 계획했거나 사전에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키시마호 사건을 단순한 해난 사고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이번에 처음 나온 것은 아니다. 일본에서는 이미 60년대 말부터 사이토 사쿠치(齊藤作治·시모키타지역문제연구소장), 아키모토 료지(秋元良治·전 아오모리 대학 조교수), 와시오카 코쇼(鷲岳公彰), 나루미 겐타로(鳴海建太郞) 등 일본의 몇몇 양심적인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이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작업을 진행해 왔다. 이들은 모두 45년 당시 시모키타 또는 교토에서 우키시마호 사건을 직접 목격했거나 풍문으로 들은 사람들로서, 처음부터 촉뢰설에 의심을 품고 사건에 접근했다. 이들은 곧 연구 모임을 만들어,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증언을 채록하는 등 의혹을 푸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우키시마호 사건은 한꺼풀씩 진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본은 전후 평화 시기임에도 무력을 사용해 징용자들을 강제로 배에 태운 사실이 확인됐다. 기뢰에 의한 폭발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물기둥’이 우키시마호 사건에서는 목격되지 않은 사실도 밝혀졌다. 우키시마호가 가라앉은 지 4개월이 지난 45년 12월 한국인 생존자 몇몇이 우키시마호 사건을‘일본군에 의한 계획적인 폭거’라고 주장하며 일본 정부를 진주군(미군) 사령관에게 고발한 문서까지 발견됐다. 더욱 의심스런 사실은 9년간 방치했던 문제의 배를 54년 갑자기 인양한 뒤, 세밀한 조사 없이 해체하여 하루아침에 고철로 처분해 버렸다는 점이다. 진상 규명에 나섰던 사람들은 사고 원인에 대해 ‘촉뢰’가 아닌 ‘자폭’일 가능성이 높다며, 이 사건이 철저히 은폐되어 왔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일본인에 의한 진상 규명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온 반면, 국내에서는 그동안 언론 보도를 통해 사건의 존재만 어렴풋하게 알려져 왔을 뿐 체계적으로 진실을 밝혀내려는 노력은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물론 이같은 상황에서도 일부 유가족들이 일본 법원에 손해 배상 소송을 제기하는 등 부분적인 움직임은 있었다. 92년 일본에 거주하는 사고 유가족들이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공식으로 사죄하고 배상할 것을 촉구하는 재판을 추진하는 회’(대표 송두회)를 구성해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에 거주하는 사고 생존자가 일본에 직접 건너가 생생한 증언을 했지만, 재판부는 명백한 결론을 내리지 않은 채 지금까지 재판을 끌어 왔다.

이같은 상황에 일대 변화가 오게 된 것은 현재 우키시마호 진상규명위원회 회장을 맡고 있는 전재진씨가 93년 일본을 방문했다가 일본 내에서 이 사건에 대해 가장 많은 자료를 갖고 있던 사이토 사쿠치씨를 우연히 만나면서부터였다. 전씨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국내에 남아 있는 우키시마호 사건 생존자를 찾아내 증언을 듣고 자료를 수집하면서, 이 문제를 더 조직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운동 단체를 꾸리는 작업을 시작했다(오른쪽 인터뷰 기사 참조).

12월2일 있은 진상규명위원회 결성 행사는 거의 전씨 한 사람의 노력으로 이뤄진 첫 성과이다. 대학 교수, 지역 언론인, 우키시마호 희생자 유족회 대표 등 50여 명으로 구성된 진상규명위원회는 앞으로 일본 정부에 대해‘사죄와 배상’을 받아내기 위해 운동을 벌여 나갈 계획이다. 전재진 회장은 “우키시마호 사건은 이미 일본에서조차 한국 징용자에 대한 대량 학살 사건의 하나임이 입증됐다. 남은 일은 일본 정부가 공식 시인하고, 더 정확한 조사를 위해 관련 자료를 공개하는 등 협조를 아끼지 않는 것뿐이다”라고 주장한다.

잊혔던 수난사의 한 토막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이 오랜 세월의 더께를 털고 한·일 양국간 ‘과거 청산’ 작업의 주요 의제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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