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어촌 구조 개선 자금, 57조원 운영 실태
  • 張榮熙 기자 ()
  • 승인 1998.1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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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어촌 구조 개선 자금’ 운영 실태 분석/예산 배정·집행·배분 방식 비효율이 문제
농어촌 구조 개선 자금 57조원은 피폐한 농어촌을 치유할 구세주인가. 원초적 부실덩어리인가.

김영삼 정부가 본격화한 농어촌 구조 개선 사업이 김대중 정부에서 집중 포화를 맞고 있다. 최근 몇달 사이 이 사업에는 검찰·감사원·국세청 같은 국가의 사정·조사 기관이 총동원되어 철퇴를 내렸거나 내릴 참이다. 검찰은 지난 7∼9월 특별 단속을 벌인 결과 북원농산·봉계농산 대표 등 농민 2백95명이 국가 보조금 3백38억6천만원(2백8건)을 불법 유용한 사실을 밝혀냈다. 검찰은 이러한 불법 사실을 묵인해 주거나 불법 행위에 가담해 뇌물을 받은 공무원 20명에게도 단죄를 내렸다.

비리와 부실 온상으로 낙인 찍혀

감사원은 두달 여에 걸친 특감을 11월6일 끝내고 그 결과를 12월 말께 발표할 예정이다. 감사원 역시 보조금을 유용한 농민과 이들과 유착해 비위를 저지른 공무원을 상당수 잡아낸 것으로 알려졌다. 국세청도 10월 중순부터 민간 사업자를 겨냥한 대대적인 세무 조사에 돌입했다. 정부 지원금으로 영농 시설을 짓는 농민들로부터 공사를 수주한 업체들이 공사 계약서 등을 거짓으로 작성해 순진한 농민들이 정부 지원금을 많이 받아내도록 꾀어 결국 나라 돈을 축내고 탈세를 일삼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국가 예산 사업에 수사·조사 기관이 조직적으로 나서 사법적 심판을 내린 것은 초유의 일이다.

농업 경쟁력을 높이고 ‘떠나는’ 농촌을 ‘돌아오는’ 농촌으로 만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던 농어촌 구조 개선 사업이 어쩌다 부실과 비리의 온상으로 낙인 찍히게 되었는가. 특히 검찰 수사 발표 이후 농어촌 구조 개선 사업은 존폐 기로에 몰리고 있다. 과연 농어촌 구조 개선 사업은 투자 효과가 없는, ‘악덕 농민’들의 배만 불리고 국민의 혈세인 나라 돈을 낭비한 사업인가.

농어촌 구조 개선 사업은 두 갈래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른바 42조원 투·융자 사업과 15조원 농어촌특별세(농특세) 사업이 그것이다. 이 둘을 합쳐 57조원 사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오해하듯이 92~98년 농촌에 뿌려진 52조6천억원 전액이 나라 돈은 아니다. 지방자치단체와 농어민 자체 부담분이 포함되어 있다. 또 국고 지원분에도 돌려받을 돈인 융자금이 있다(오른쪽 도표 참조).
농림부는 92~97년 중앙 정부가 쓴 31조7천억원 가운데 15조1천억원(48%)을 농촌 생산 기반 투자와 연구 개발에 투입했다고 밝혔다. 경지를 정리하고 저수지를 개발하며 도매 시장을 건설하는 데 쓴 것으로, 정부가 직접 시행한 것이다. 농협과 축협 등 생산자 단체가 운영하는 물류 센터와 미곡 종합 처리장 같은 유통·가공 시설에 지원된 돈도 3조2천억원(10%)에 이른다. 나머지 13조4천억원(42%)이 검찰로부터 철퇴를 맞은 농민에게 직접 주어진 사업비이다. 농기계를 사고 축사나 유리 온실 등을 짓는 데 지원한 돈이다. 이 가운데에서도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정부가 공짜로 준 보조금 2조5천억원(융자금 10조9천억원)이다.

농림부는 보조금 유용 사례가 사실보다 훨씬 부풀려졌다고 항변하지만, 실제로 농촌을 다녀 보면 유용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경북도 의원인 이정백씨(상주시 축협 조합장)는 “한마디로 사업자 선정이 잘못되었다”라며 시·군 농정 공무원들을 질타했다. 보조금이 영농 의지를 가진 진짜 농민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넥타이 맨 급조된 사이비 농민이나 관련 공무원과 잘 아는 사람 들에게 많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다방(정치) 농사꾼’이 양산되어 농촌 사회를 분열시키는 것도 보조금 정책이 부추긴 해악이다. 검찰은 지난 9월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보조금 가운데 30%가 잘못 쓰인 것 같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절반은 공짜라는 점을 악용해 처음부터 정부 돈을 가로채려는 가짜 농사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치밀한 구상 없이 무분별하게 시설을 늘린 농민들에게서 정부가 나머지 융자금을 회수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농림부가 허남훈 의원(자민련)에게 제출한 국정 감사 자료에 따르면, 올 들어 6월 말까지 농어민 파산 등으로 돈을 돌려받지 못해 발생한 부실 채권 규모가 2천1백44억원으로 지난해 1년 동안 발생한 규모(7백1억원)에 견주어 3배 이상 늘었다. 농어민 파산이 크게 늘어난 원인은 갑자기 들이닥친 IMF 사태가 촉발한 것이지만 무리하게 시설을 확장한 것이 화근이 된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융자금 10조9천억원의 대량 부실을 예고하는 셈이다.

농업 부가 가치·토지 생산성 높아져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농어촌 구조 개선 사업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이루어졌느냐이다. 농림부 김종진 투자심사담당관은 “7년 동안 많은 돈이 투입되다 보니 문제가 적지 않았지만, 이 기간에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농업 투자가 집중된 92∼97년 농업 부문의 부가 가치가 높아지고 노동 및 토지 생산성도 높아졌다. 경지 정리, 영농 규모화 및 유통 시설 현대화 같은 생산 기반에 많은 돈을 투입한 결과 농업 구조가 개선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성과들이 투입된 자금 규모와 비례하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예산 배정· 집행 과정·배분 방식 등에서의 비효율이 투자 효과 극대화를 가로막고 있다는 주장이다. 우선 예산 배정 과정을 보자. 농업 예산은 해마다 예산을 편성할 때 다른 예산과는 달리 세세한 사업이 정해지기 전에 예산 규모가 정해져 있다. 예산청 서덕모 농림해양예산과장은 바로 이 점이 원초적으로 비효율을 낳는 근본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다른 부처는 매년 예산 편성기인 6∼9월에 예산을 따내기 위해, 이 사업을 왜 하는지, 내년에 꼭 지원을 해야 하는 이유를 예산 당국에 설명하느라 비지땀을 흘리지만, 농림부는 돈을 쓸 사업을 찾기 위해 땀을 흘리는 ‘행복한 고민’을 해야 한다. 도리어 칼자루를 쥔 예산 당국이 농림부에 제발 제대로 된 사업으로 채워넣어 달라고 통사정하는 기이한 풍경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배정받은 돈을 농림부는 지역 별로 골고루 시장이나 군수에게 떨어뜨린다. 지역에 따라 작물과 경작지 규모 같은 생산 여건이 다른데 중앙 정부가 획일적으로 어디에 쓰라며 떨어뜨리기 때문에 자치단체장은 그 지역에 맞는 농정을 펴기가 어렵다. 한국개발연구원 설광언 선임연구위원은 “지역 특성을 무시한 이런 정책 집행은 당연히 투자 효율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라고 지적한다.
또 무리하게 사업 목표량을 독려하기 때문에 공사가 부실해지기 쉽고 공사 완공에 힘을 쏟기보다 새로운 공사를 찾아 나서야 한다. 질보다 양적 확대에 몰두하는 탓이다. 웬만한 동네에는 하나씩 있는 간이 집하장이나 포장 센터, 저온 냉장 시설, 농산물 가공 공장 같은 유통·가공 시설물이 좋은 예다. 이 시설물들은 태반이 방치되거나 창고 정도로 쓰이고 있다. 시설을 늘리는 데만 급급했지 이 시설들을 어떻게 경영해야 하는지에 대한 컨설팅 기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추진 과정의 파행은 이뿐만이 아니다. 해마다 엄청난 돈이 시·군에 살포되다 보니 사업자 선정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정영일 교수(서울대·농업경제학)는 “사업 성공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업 능력이 있는 사업자를 골라내는 것인데 현재의 제도로는 이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라고 잘라 말한다. 농정 관련 공무원들이 사업을 심의할 전문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효율적 사용은 꿈도 못 꾼다. 가령 94년 이후 영농 조합 법인과 농업 회사 법인 같은 농업 법인이 우후 죽순처럼 생겼는데 이 회사 가운데 절반 이상이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심지어 유령 회사도 있고 개점 휴업 상태인 회사도 없지 않다. 농업 법인들에 대한 정부 지원이 많다 보니 염불보다 잿밥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이들을 걸러내지 못한 것이다. 전업농이나 농어민 후계자 선정 과정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

게다가 개인 사업에 대해서도 보조금을 주는 부문이 많고 사업 간의 지원 조건이 천차 만별이어서 특혜 시비와 부작용이 일어날 소지가 많다. 우선 농기계 반값 지원 시책에서 잘 드러나듯이 과다 보조금 지원은 과잉 공급을 초래하며 농민들로 하여금 생산비 개념을 희박하게 만든다. 유리 온실이나 축사 시설의 집단 부실도 따지고 보면 보조금을 받기 위해 생각 없이 뛰어든 농민이 많기 때문이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자기 부담도 이행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농업 전문가들은 ‘사업자 선정 따로 사후 관리 따로’인 점도 비효율을 키우는 치명적인 구조라고 지적한다. 사업자는 시·군 공무원들이 선정하고 돈은 농협·축협 같은 융자 기관들이 주는 것이다. 과연 영농 의지가 있는지, 사업이 타당한지, 갚을 능력이 있는지 하는 점을 융자금을 회수할 기관이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문제점은 농림부가 농촌경제연구원 같은 연구기관에 용역을 주어 세 차례 이루어진 평가 작업에서나 예산 당국과 국무조정실의 평가 작업에서도 수 차례 지적된 것이다. 물론 농림부가 이런 문제점을 상당히 개선했거나 개선 방안을 궁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선 보조금을 단계적으로 줄여 융자 지원 체제로 전환하고 있다든가, 92년 2백75개로 시작한 사업 수를 98년 99개(2001년에는 70개)로 줄였으며, 농가 수준에 맞추어 지원하기 위해 ‘농업 경영 종합 자금제’를 내년부터 도입하기로 한 것은 한 걸음 나아간 조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 지역 특색에 맞는 사업을 추진하고, 투자 우선 순위를 끊임없이 재조정하며 사후 관리를 강화하는 여러 장치들을 강구하고 있는 것도 지금까지의 비효율을 상당히 덜어낼 것으로 보인다.

57조 사업은 지방비와 자체 부담분이 늘어나 이미 61조5천억원짜리 사업으로 변모했다. 이 가운데 국고 지원금만 50조4천억원에 달한다. 42조 사업이 끝나는 올 연말께 농어촌 구조 개선 사업은 감사원 특감 발표로 또 한 차례 격랑에 휘말릴 공산이 크다. 80년대 후반처럼 ‘농업은 경쟁력이 없다’는 이른바 비교우위론자들의 목소리가 커질 가능성도 있다. 이들이 힘을 얻으면 2단계 투·융자 계획을 만들려는 농림부 구상은 물거품이 될 수 있다.

김영삼 정부에서 농업 정책을 주도한 최양부 전 농수산수석은 “선진국 가운데 농업을 포기한 나라는 없다. 농업은 생명 산업이며 환경 산업이라는 공익적 기능이 있으며, 식량 주권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듯이 비교역적 속성이 있다”라며 투·융자 사업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고쳐가야지 지원 중단을 주장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원초적 부실덩어리라는 오명부터 벗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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