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구 찾아나서는 '중년의 노라'들
  • 金恩男 기자 ()
  • 승인 1995.11.3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회에서 소외되고 가정에서 갈등 겪는 40, 50대 여성/문화·종교·사회 활동으로 눈 돌려
“죽일 놈이지. 대통령 해 봤음 됐지 돈까지 해먹을 일인가. 그래도 다 늙은 나이에 감방 들어가는 것 보니까 인간적으로 참 불쌍하데.”(서울 홍익대 앞에서 장사하는 50대 아주머니)

“불쌍하긴 뭐가. 속은 우리만 불쌍하지. 이 기회에 본때를 보여야 해. 그놈이나 저놈이나 정치인들 다 똑같아. 다시는 딴 생각 못하게 뿌리를 뽑아야 해.”(서울 강남의 40대 전업 주부)

비자금 사건으로 가장 크게 분노한 계층이라면 중년 주부층을 빼놓을 수 없다. 누가 뭐래도 이들은 가정 경제를 꾸려나가면서 돈의 가치를 몸으로 실감하는 계층이며, 신세대 주부와는 또 다르게 지난날 가난했던 경험으로 인해 돈 모으기의 어려움과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계층이다. 흔히 ‘우리는 콩나물값 깎느라 바둥대는데…’로 표현되는 이들의 ‘장바구니 여론’은, 그러나 현실적인 공론으로 승화되지는 못한다. 왜? 이들은 조직화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의 여론을 체계화해 ‘정치적 압력’으로 연결하는 것은 여전히 권력을 가진 남자들 몫이다.

목소리는 있으되 힘은 없는 계층, 가장 강력한 소비 집단이면서 그에 걸맞는 사회적 대접은 받지 못하는 계층, 윗세대(노부모)와 아랫세대(성인 자녀) 사이에 끼여 이중 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계층, 광복과 6·25로 얼룩진 유년기에서 1인당 국민소득 만달러 시대를 눈앞에 둔 오늘까지 배고픔과 풍요의 양 극단을 체험한 계층. 중년기 여성을 묘사하는 데는 이같은 극단의 비교가 어김없이 동원된다. 다가올 노년과 남아 있는 젊음 사이에서 방황해야 하는 이들의 신체적·심리적 조건 또한 이러한 비교의 바탕을 이룬다.

60년대 구미에서 시작된 중년기 이론이 한국으로 건너온 80년대 중반 이후 중년, 그 중에서도 특히 중년기 여성에 대한 연구는 많이 진전했다. 특히 90년대 들어서는 ‘위기’를 강조한 중년기 여성론이 대중적으로 각광을 받는 현상도 나타났다. <위기의 여자> <자기만의 방> 같은 연극의 상업적 성공에 힘입어 ‘중년 여성의 위기’는 텔레비전·영화·연극·여성지 등에서 가장 잘 팔리는 상품 가운데 하나로 등장했다. 그러나 이제 중년 여성들은 되묻고 있다. ‘우리는 언제까지 위기여야만 하는가’라고.

사회적 지표로 따졌을 때 중년 여성이 위기여야만 하는 이유는 아직도 충분하다. 나이와 가족 주기를 함께 고려해 40~59세를 중년기로 잡았을 때 이 나이 여성의 취업률은 같은 연령대 남성 취업률의 60~63%이며, 임금은 41~43%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표 참조). 93년 통계를 보면 전체 여성 경제활동인구 가운데 의사·변호사·교사·교수 등 전문·기술직에 종사하는 여성은 9%, 행정관리직에 종사하는 여성은 0.2%로 이른바 ‘안정된 직업’에 종사하는 여성이 매우 드물다. 그나마 기업체 같은 곳은 정년도 짧다. 88년 한국여성개발원 조사에 따르면, 남성의 정년이 대부분 55세(52.6%), 60세 이상(42.4%)인 데 반해 여성의 정년은 40세 5.3%, 50세 31.5%, 55세 15.8%이며, 40세 미만부터 정년을 언급하는 기업도 10.6%에 이르고 있다.
사모님·부인·아줌마·여편네…

피부에 와닿는 위기는 더욱 심각하다. 중년 여성은 소비 활동의 최선두에 서 있다. 대기업·백화점·언론사 할 것 없이 중년 여성을 무시하고는 장사를 할 수 없다. 대우경제연구소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40대와 50대는 각각 가구 경상소득이 1백61만4천원과 1백62만2천원으로 다른 어떤 연령대보다 높으며, 소비 지출 또한 1백18만6천원(60.8%)과 98만2천원(73.1%)으로 소득에서 소비가 차지하는 비율 또한 가장 높다. 그러나 백화점에서 ‘사모님’ 소리를 듣던 이들은 거리에 나서는 순간 “여편네들이 왜 차는 끌고 나와”라는 남성 운전자들의 악의에 찬 욕설을 들어야 한다. 성형외과 전문의 정 아무개씨는 신분을 밝히지 않고 은행에서 골드 카드를 신청했다가 남자행원에게 “골드 카드를 아무한테나 주는 줄 알아요?”라고 핀잔을 들었던 경험을 들려준다. 아이들을 키운 후 늦깎이로 등단한 수필가 이희자씨(42)는 “문단 풍토가 주부 출신 작가를 쳐주지 않는다. 작품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폄하해 버리기 일쑤이다”라고 고충을 털어놓는다.

이러한 사회적 자존감의 위기와 더불어 중년 여성들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가정에서의 갈등이다. 우선은 남편과의 성역할 분담 문제이다. 한 40대 여성은 지금의 중년 여성을 “눈으로는 어머니 세대가 사는 모습을 보면서, 머리로는 할리우드 영화 속의 서구적인 가정상을 동경하며 자란 세대”로 비유한다. 더욱이 80년대 이후에는 페미니즘의 거센 바람까지 불고 지나갔다. 전문직 여성에서 평범한 주부에 이르기까지 그 바람의 세례를 받지 않은 여성은 드물다. 그러나 전통적 가부장제의 뿌리는 완강하고, 이에 따른 갈등을 극복하지 못한 중년기 부부 간에 이혼이 늘고 있는 추세이다(55쪽 딸린 기사 참조).

세대 간의 갈등 또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중년 여성들은 자기 세대를 ‘효도를 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효도를 받지 못하는 첫번째 세대’라고 자조한다. 가정법률상담소 곽배희 부소장은 “시댁과의 문제로 갈등을 겪는 정도는 중년 여성이 훨씬 심하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신세대 여성은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적기 때문에 시댁과의 관계에서 더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자녀와의 관계는 더욱 미묘하다. 거의 모든 설문조사에서 자녀 교육 문제는 중년 여성들의 스트레스 요인 가운데 으뜸 순위를 차지한다. 자녀에 대한 애정에서만이 아니다. 자녀 교육에 실패하는 순간 여성은 이웃과 일가 친척 사이에서 ‘자격 없는 어미’로 매도당하고 만다. 과도한 부담은 과도한 애정의 형태로 나타난다. 애정을 쏟은 만큼, 자녀가 ‘부모는 부모, 나는 나’라는 식의 신세대적 특성을 보일 때 배신감마저 느낀다는 것이 중년 여성들의 공통된 고백이다. 자녀 출가 후에 흔히 나타나는 중년기 여성의 위기감은 자녀의 독립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 역할을 대신할 새로운 역할을 개발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라는 김명자 교수(숙명여대·가정관리학)의 지적은 그런 의미에서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위기’를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전업 주부 10년 만에 대학원 여성학과에 진학해 중년 여성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온 박혜란씨(<여성신문> 편집위원)는 “성(性), 자의식을 강조하는 구미 이론을 빌려 중년의 위기만 되뇌는 학자들 얘기에 이제 신물이 난다”고 비판한다. 그보다는 10년 주기로 급속한 사회 변동을 경험해야 했던 한국 사회의 특수성을 감안해 중년 여성들이 탄력 있게 세대 교체에 대비하도록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반론이다. 최근 들어 중년 여성들의 문화센터 수강 붐이나 종교 생활을 새롭게 조망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새로 취업하려 해도 단순·저임금 직종밖에 열려있지 않은 중년 여성의 나이 특성상 취업이 최고의 대안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국여성개발원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취업을 위한 재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여성회관·YMCA·YWCA 등에 20, 30대 여성이 주로 몰리는 데 반해 40, 50대는 백화점이나 신문·방송사의 문화센터에서 더 많은 여가 활동을 보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전국에는 30개 이상의 문화센터가 있으며, 15만명 이상이 이곳을 이용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문제는 3~6개월 단위로 이 강좌 저 강좌를 넘나드는 ‘철새 수강생’이 많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특별한 목적 없이 유행처럼 이루어지는 이러한 여가 활동이 소비만 부추길 뿐 여성의 자기 개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해 왔다. 그러나 최근 문화센터에 따라 전문성이 심화된 강좌가 자리잡고, 수강생 또한 이를 진지한 자기 연마의 장으로 삼으려는 노력이 눈에 띄면서 문화센터의 가능성이 새롭게 주목되고 있다.
지방자치제로 정치 의식도 확대

종교 활동 또한 마찬가지이다. 개신교·천주교·불교 등 거의 모든 종교에서 고르게 나타나는 여성 신도의 압도적 우위 현상은 긍정·부정 양면의 평가를 동시에 얻어 왔다. 특히 중년 여성들은 집사·권사 또는 보살이라는 이름으로 종교 집단의 허리 구실을 하며 적극적인 활동을 펴고 있다. 종교가 억압된 여성의 삶과 맞물릴 때 현실을 적극적으로 극복하기보다 자기 처지를 합리화하고 체념하는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이 여성의 종교 활동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든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나 이 또한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볼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나온다. 전국여교역자협의회 고예신 총무는 “사회가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면서 한국 종교의 가장 고질적인 병폐로 지적되던 기복신앙적 측면도 많이 수그러들고 있다. 특히 사회 경험을 쌓을 기회가 없었던 중년 여성에게 종교 활동을 통해 의식을 키우고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이 넓어지리라 생각한다”고 말한다.

지방자치 시대가 열린 것 또한 중년 여성들에게 고무적이다. 자기 지역의 환경 문제나 교육 문제에 대한 관심이 정치 의식의 확장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유권자연맹 이영자 공동 회장(가톨릭대 교수·사회학)은 “중년 여성들의 정치 의식은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문제는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회의 고정 관념이다”라고 지적한다.

위기는 기회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 위기에 지친 중년 여성들은 어떤 기회를 창출할 수 있을까. 그 선택은 물론 ‘위기의 여자’들 몫이다.
요즈음 중년 여성들 사이에 ‘프란체스카 신드롬’이 한창이다. 프란체스카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라는 소설에 나오는 여주인공 이름이다. 최근 영화로도 개봉된 이 소설은 기혼 사진작가와 가정 주부가 우연히 만나 사흘간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고 평생 그리움을 간직하며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중년 여성들이 이 소설에 매혹 당하는 이유는 그 낭만성과 안전성 때문이다. 가정을 깨지 않는 한도에서 생애 마지막 ‘봄바람’을 맞고 싶은 중년 여성들의 욕망을 이 소설은 산뜻하게 대리 충족시켜 주고 있다. ‘홧김에 서방질’이란 이미 케케묵은 옛말이다. 남편의 외도와 상관없이 여성들은 은밀하게 일탈을 꿈꾼다. 가정법률상담소 곽배희 부소장은 “남편 외도의 상대자로 유부녀가 늘고 있다. 아직 매스컴에서 보도하는 것만큼 심각한 수준은 아니지만 머지 않아 사회 문제로 떠오를 것임에 틀림없다”고 말한다.

중년 여성들은 무엇 때문에 일탈을 꿈꾸는 것일까. 한 40대 여성은 “돈 있는 과부는 수절 못한다는 옛말도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 생활이 풍족해진 데 따른 권태가 자극에 눈을 돌리게 한다는 것이다.

중년 여성의 주된 이혼 사유는 남편의 억압

그러나 전문가들은 우선 가정 내부, 곧 부부 간에 문제가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라고 충고한다. 성에 대한 관심과 반응이 최고조에 이르는 시기가 남성은 18~19세, 여성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이라는 것이 킨제이 보고서의 결론이고, 그밖에 육체적인 피로와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겹쳐 중년기 남성의 성적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성행위의 양보다는 질이 중요하고, 그 질을 좌우하는 것이 상호 신뢰의 정도인 만큼 이러한 신체적 변화가 여성의 외도 심리를 설명해 줄 수는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40, 50대 중년 부부의 이혼율은 날로 증가 추세이다. 최근의 한 조사에 따르면, 남성이 이혼의 핵심적인 사유로 성적인 문제를 꼽는 반면 여성은 남성의 억압적 태도를 꼽고 있다.
곽배희 부소장은 ‘40, 50대 중년 부부의 경우 이혼의 가장 주된 사유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일방적인 억압 내지는 구속’이라고 지적한다. ㄱ씨(48·서울 강남구 수서동)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ㄱ씨는 결혼 생활 20년이 넘게 남편으로부터 월급 봉투를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했다. 대기업체 간부인 ㄱ씨의 남편은 배추 살 돈을 달라면 자신이 직접 퇴근길에 시장에 들러 사오는, 남들 눈에는 더없이 자상한 남편이었다. 용돈을 탈 일이 있을 때마다 ㄱ씨는 잠자리에서부터 아양을 떨어야 했다. 그런 ㄱ씨가 최근 이혼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더 이상 이 나이에 참고 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3인 막내딸이 마음에 걸렸지만 부모가 싸울 때마다 방문을 닫고 들어가 컴퓨터 노래방을 켜는 딸을 보며 결심을 굳혔다. ‘엄마·아빠 문제는 두 분이 알아서 해결하고 책임지라’는 딸의 힐난에 섭섭함을 넘어서 배신감마저 들더라는 것이다.

중년층은 그들 부모 세대의 가부장적 부부 모델과 자녀 세대의 서구적 부부 모델을 동시에 체험한 세대이다. 머리로는 평등한 부부상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알되 몸은 따라가지 못하는 데 이들의 비극이 있다. 외도를 꿈꾸는 중년 여성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를 존중하고 아껴주는 남자를 만나고 싶다.” 결국 문제는 부부 사이에 채우지 못한 정서적 충족감에 있는 것이다. 송정아 교수(고신대·가정관리학)는 ‘친구 같은 부부’를 중년기 부부의 바람직한 모델로 제시한다. 인간의 심리발달상 나이가 들수록 남성은 여성성(anima)이 발달하고 여성은 남성성(amimus)이 발달한다는 것이 송교수의 설명이다. 따라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의 양성성을 이해하고 개발해 나갈 때 중년기 부부 관계 또한 발전적으로 유지될 수 있으리라고 송교수는 충고한다.

金恩男 기자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