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의 삶] 휠체어 타고 '유럽 2002km 대장정'성공한 박대운군
  • 蘇成玟 기자 ()
  • 승인 1998.10.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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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하루였다. 5천리가 넘는 길을 달려야 하는데 백리도 못 가서 손목에 심한 통증이 왔다. 박대운군(27·연세대 신방과 2년)이 휠체어를 몰고 독일 뒤셀도르프 시를 떠나 2천2㎞ 대장정에 오르던 지난 7월25일 일이었다.

독일 경찰이 박대운군과 자전거를 타고 먼길을 동행한 친구 이동건군(26·연세대 인문학부 3년)의 초행길을 인도해 준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뒤셀도르프 지역 관할 경찰들이 ‘바통 터치’를 해 가며 자동차나 오토바이로 앞서가는 동안, 이들을 뒤쫓아야 했던 박군은 손목 인대가 늘어나 곤욕을 치렀다. 제때 쉬지 못한 탓이었다. 한국을 떠나기 1주일 전에야 기증받은 ‘마라톤 휠체어’도 아직 손에 익지 않았다.

하루 일정을 간신히 마친 뒤 살펴보니 손목과 팔뚝이 잘 분간되지 않았다. 암담했다. 예정한 날짜에 목적지에 도달하려면 하루 평균 50㎞씩 잡아도 쉬지 않고 40일을 계속 강행해야 하는 여정이었다. 박군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첫날부터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손목을 붕대로 동여매고 쉴 때마다 얼음찜질을 해가며 버텼다. 통증은 1주일 동안 계속되었다. 병원에 가려고 생각한 날이 가까워지자 희한하게 손목의 부기가 서서히 빠지면서 통증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하지 않는다”

난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낮에는 34℃를 웃도는 뙤약볕 아래에서 비지땀을 흘렸고, 밤에는 체감 온도가 0℃까지 떨어지는 급격한 일교차에 떨며 텐트에서 새우잠을 청했다. 일반 도로를 달리다 어느덧 고속 도로를 질주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할 때도 많았다. 고속 도로를 벗어나려다 자갈길이나 모래밭에 접어들어 애를 먹기도 했다.

어느 곳을 가든 사람들은 친절했다. 박군 일행 때문에 길이 막혀도 경적을 울려대는 차량을 보기 힘들었다. 독일과 네덜란드는 휠체어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자전거 전용 도로가 잘 발달되어 인상적이었다. 특히 네덜란드의 차도 옆에는, 박군의 표현을 빌리자면 ‘반드시, 기필코’ 자전거 도로가 있어서 차도로 다닌 예가 거의 없었다.

독일·네덜란드·벨기에·프랑스를 차례로 통과한 박군은 닷새를 사투한 끝에 피레네 산맥을 넘었다. 총연장 3백여㎞, 해발 1천4백62m에 달하는 마의 고갯길이었다. 8월30일 박군은 스페인 사라고사 시에서 열린 98·99 시즌 프로 축구 개막 경기에 참석했다. 장내 아나운서의 소개를 들은 수만 관중이 기립해 박수를 보냈다. 박군은 9월2일 최종 목적지인 스페인 마드리드 시에 도착해 환영 행사에 참석함으로써 2천2백64㎞의 대장정을 마감했다.

박군은 강인한 인상에 충분히 어울릴 만한 정신력을 가졌다. 박군의 평소 좌우명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도전에 성공한 박군의 기쁨은 단순히 장애인이 하기 힘든 일을 해냈다는 데 있지 않다. ‘비장애인들’은 ‘성공한 장애인’을 치켜세울 때, 더 큰 소외감에 시달려야 하는 ‘평범한 장애인’들의 아픔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박군이 기뻐하는 진짜 이유는 단지 사람들의 고정 관념을 깼다는 데 있을 따름이다.

박군이 늦깎이 대학생이 된 것도 ‘주어진 울타리’에 안주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원래 93년 대구대 미술대학에 들어갔으나 그림을 그리는 장애인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 2년 뒤 학업을 중단했다. 미술이 싫었던 것은 아니지만, 남들이 장애인은 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는 분야에서 정상인과 똑같이 경쟁하고 싶었다. 그는 다시 대학 입시를 거쳐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해 광고회사 AE가 되려는 꿈을 키우고 있다.

박대운군의 언행은 거침이 없다. 성격이 직선적이어서 어릴 적부터 싸움도 많이 했지만, 자신이 수긍하지 못하는 일은 어느 누가 강요해도 하지 않는다. 세상에 단 한 사람의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박군의 어머니이다. 그는 어머니의 눈물을 잊을 수가 없다.

박군이 다리를 잃은 것은 그의 나이 다섯 살 때였다. 형 친구와 장난하다가 그가 휘두르는 주먹을 피하려고 좁은 골목길을 달려나가다가 달려오던 삼륜차에 들이받혔다. 그런데 박군을 친 삼륜차는 잠깐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이내 차를 후진시켜 다시 그를 뭉개고 달아나 버렸다.

사고로 망가진 박군의 오른쪽 다리는 병원에서 즉시 절단되었다. 왼쪽 다리는 근육만 여기저기 떨어져나가 철심을 박아 가며 버텨 보려 했으나 남은 살마저 차츰 썩어들어갔다. 그는 여덟 살이 될 때까지 줄곧 병상 신세를 지며 여섯 차례나 수술을 받다가 결국 두 다리를 모두 잃었다.

인복 많은 박군 “다리 팔아 사람 샀다”

그러나 박군은 자신에게 모진 시련을 안겨준 삼륜차 운전 기사를 원망하며 살지 않는다. 그보다는 사고 현장에 버려진 자기의 신발을 부여잡고 통곡한 어머니를 늘 떠올린다. 박군은 중학교 2학년 때 자기가 사랑하던 개가 차에 치여 죽은 곳에서 핏자국을 보았다. 가슴이 미어지면서 문득 어머니의 슬픔에 생각이 미쳤다. 개가 죽어도 마음이 그와 같은데, 사고 현장에서 자식의 버려진 신발을 본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했을지 짐작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입학 원서를 받아 주지 않는 초등학교와 석 달 동안이나 싸워 결국 허가를 받아냈다. 박군은 자기가 정신적 갈등 없이 밝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의 덕분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그가 과잉 보호를 받았던 것도 아니다. 고집 세고 장난기 많았던 그는 어머니한테 ‘빗자루가 부서지도록’ 맞은 적도 있다.

박군은 “나는 다리를 팔아서 사람을 샀다”라고 말할 정도로 늘 인복이 많음을 강조한다. 그래서 서울에 갈 때에도 걱정하는 가족·친지 들을 오히려 그가 달랬다.

박군에게 왜 휠체어를 타고 먼길을 떠났느냐고 묻자 그는 “예전부터 장거리 여행을 하고 싶었다. 사고가 나지 않았으면 걸어서라도 갔을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자기가 당한 끔찍한 사고를 자연스럽게 끄집어내는 그의 화법에는 ‘평범한 비장애인’들의 선입관을 무색하게 하는 힘이 담겨 있다. 박군은 내년에 대한해협을 헤엄쳐서 횡단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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