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익도 포함한 독립 유공자 포상
  • 朴晟濬 기자 ()
  • 승인 1995.08.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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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처, 대대적인 유공자 심사·포상…지역·정파 망라해 1442명 추가
국가보훈처가 최근 펴낸 〈독립유공자 공적서〉(전5권) 제1권에는, 한국 근·현대 독립운동사에서 그 자체로 역사의 한쪽을 장식할 매우 비중 있는 인물임에도 건국 이후 지금까지 정부로부터 공식 포상을 받은 적이 한번도 없는 상해 임시정부 요인 한 사람에 대한 항목이 실렸다. 함경남도 단천에서 태어나 상해·만주·노령을 활동 무대로 하여 항일운동에 일생을 바친 李東煇 선생의 공적 사항이 바로 그것이다.

‘1907년: 군대 해산 무렵에 동지 연기우·김동수 등과 강화도에서 의병 항쟁 / 1911년:윤치호·양기탁 등과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 황해도 무의도에 3년간 유배 / 1912년:가을 외국 선교사와 주위의 도움으로 유배지를 탈출, 북간도로 망명 / 1919년: 8월 말 오영선을 대동하고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취임….’

의병으로 몸을 일으켜 상해 임정의 국무총리까지 지낸 이동휘 선생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병사한 지 꼭 60년 만인 오늘에 와서야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서 공식 서훈을 받게 된 데에는 나름의 곡절이 있다. 그에게는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던 17년 공산주의자가 되어, 이듬해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 사회당을 결성하고, 상해에서 활동하던 19년에는 당시 국제 공산주의운동의 최고 지도자이던 레닌을 모스크바로 직접 찾아가 만난 경력이 있었던 것이다. 평생을 조국 광복을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그에게는 독립투사라는 칭호보다 늘 `‘공산주의자’라는 딱지가 따라 다녔다.
사회주의 계열 유공자도 인정

광복 5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는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독립유공자 공적 심사 및 포상 작업을 벌였다. 2년 동안 4만여 명을 대상으로 공적을 심사한 결과 국가보훈처가 포상키로 최종 확정한 독립유공자 수는 의병 4백35명과 만주·노령 방면에서 활동한 독립유공자 등을 합쳐 모두 1천4백42명이다. 대상자 중 생존한 사람은 28명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국내·외에서 사망한 사람들이다. 국가보훈처는 심사 작업에 최대한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해당 독립유공자의 출신지에 신원을 조회하고 이북 5도청에 조사를 의뢰했으며, 경찰청에 요청해 지문대장 따위를 조사했다. 그밖에 정부기록보존소와 북한연구소에 있는 관련 문서를 뒤지기도 했다.

정부가 이처럼 전례 없는 규모로 독립유공자를 심사·포상한 데에는 몇 가지 까닭이 있다. 건국 직후에 이미 끝냈어야 할 독립유공자 포상 작업을 올해에도 넘겨 버릴 수는 없다는 각오가 그 첫째다. 둘째, 지금까지 광복을 연합군측 승리의 부산물로만 여겨오는 경향이 짙었는데, 이를 시정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부는 이같은 작업을 통해 애국지사와 순국 선열의 고귀한 정신 세계를 계승할 계기를 마련한다는 의도를 갖고 있다.

이번 독립유공자 포상 작업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정부의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역사의 질곡에 파묻혀 원혼으로만 떠돌았던 수많은 애국지사와 순국 선열이 이번에 대거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국가보훈처는 이번 독립 유공 포상자 명단을 운동 계열로 나누어 발표했다. 의병, 의열투사, 만주·노령방면, 임정·중국방면, 광복군, 미주방면, 3·1운동, 학생운동, 국내항일, 일본방면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가운데에서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이동휘 선생처럼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좌익 진영에 몸을 맡겼거나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대거 독립유공자의 반열에 올랐다는 점이다. 이동휘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선생의 실부 이의순·장녀 이인순 등 항일운동에 공적이 있는 가족에게도 함께 훈장이 추서되었다. “45년 광복 이전에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순국·전사·사망한 사람에 대해서는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는 원칙을 적용한 것이다.

경술국치 이전 신민회에 가입하여 구국 운동을 전개하고, 〈독립신문〉에‘사방자’라는 필명으로 언론 활동을 벌이다가 북간도로 망명한 桂奉瑀 선생도 비슷한 경우다. 비록 임정 요인 이동휘를 따라 고려공산당에 참가하고 코민테른 대표로 선임되어 활동한 경력이 있지만, 〈조선문법〉 〈조선말의 되어진 법〉 같은 국어 연구서를 집필하는 등 민족 교육에 혼신의 힘을 쏟았던 점이 높이 평가된 것이다.
“완전한 평가는 통일 뒤에나 가능”

직접 독립운동 일선에 뛰어들어 활약하지는 않았지만 계몽·교육·학술 운동과 사업을 통해 독립 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을 원조한 사람들도 독립 유공 포상자에 포함됐다. 〈상록수〉의 실제 주인공 崔容信, 국학 연구 단체인 진단학회를 설립해 민족혼을 고취한 호암 文一平, 유한양행 설립자로서 미국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한 柳一韓이 그들이다.

이번 독립유공자 포상 작업에서 또 하나 값진 수확은 변절자로 잘못 알려졌거나, 근거 자료가 부족해 독립에 공이 있는데도 역사의 뒤안길에 묻힐 뻔했던 독립유공자들을 정부가 적극 조사·발굴해 공훈을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미국 헤이스팅스에 한인소년병학교를 열고 대조선 국민군단을 결성해 군사 교육을 실시한 朴容萬은 전자의 본보기이고, 한일합방 때 자결 순국한 安 潚은 후자의 대표 사례이다. 특히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박용만의 경우는, 임정 외무총장과 교통총장까지 지냈음에도 변절자라는 세간의 오해 때문에 훈장을 추서하지 못했던 인물이다. 신용하 교수(서울대·사회학)는 “박용만 장군은 변절했다는 이유로 다물단이라는 단체에 암살됐다. 오랫동안 확인한 끝에 변절한 사실이 없음이 밝혀져 포상자 명단에 올랐다”고 설명한다.

정부의 독립유공자 포상 작업은 포상 대상자의 지역·운동 계열·정파를 초월해 폭넓게 이루어졌지만 이번 작업에도 한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일제 치하를 벗어난 지 반 세기가 흐른 오늘에도 독립유공자의 공적을 평가하는 작업은 분단된 현실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국가보훈처 이선우 자료관리과장은 “누구라고 정확히 밝힐 수 없지만, 포상자 조사 작업에서 아쉬움이 남는 유공자가 꽤 많이 발굴됐다. 그 분들이 공적을 제대로 평가 받기 위해서는 통일되는 그 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광복 50주년을 맞아 정부가 실시한 독립유공자 포상 작업은, 애국지사와 순국 선열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지 새삼 일깨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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