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노태우, 8천억 손해 배상하라"
  • 김 당 기자 ()
  • 승인 1999.0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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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피해자, 미국 법원에 손해 배상 소송… 2년째 재판 진행중, 제2 마르코스 될 수도
한국에서 광주 5·18 민주화운동 관련 소송은 이미 과거지사(過去之事)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이른바 광주 학살의 주범인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모두 한국에서는 사면·복권까지 받은 ‘자유인’이지만 미국 법정에서는 ‘피고’이다. 5·18 당시 전남 도경국장에서 해임된 고 안병하씨 유족과 한 재미 동포 변호사(오른쪽 인터뷰 참조)의 집념 때문이다.

미국 워싱턴 주 타코마에 사는 윤영일 변호사(54·미국 이름 에디 윤)가 처음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진 때는 95년. 한국에 왔다가 전·노 씨가 구속되고 국회에서 소급 입법인 5·18특별법이 제정되는 장면을 우연히 보고서였다. 그러나 법률가 눈에 비친 이 장면은 ‘이게 아닌데’였다. 그는 미국에 돌아가 곧장 5·18 피해자 가운데 한 사람인 고 안병하 국장의 장남(안영재·로스앤젤레스 거주)에게 편지를 띄웠다. “선친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들었다. 미국 법으로도 가해자들을 단죄할 길이 있다. 당신이 허락한다면 내가 선친의 명예를 회복시켜 줄 수 있다.”

안국장은 5·18 사건 당시 신군부의 강경 진압 지시를 무시하고 평화적 해결을 위해 애쓰다 진압군의 도청 진압 작전 하루 전인 5월26일 전남 도경국장에서 직위 해제되어 당시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서 10여 일 동안 고문을 받은 끝에 경찰복을 벗은 인물. 육사 8기 출신으로 중령 때 경찰에 투신한 안국장은 후배들에게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병마에 시달리다 88년 사망했다. 이에 가족이 행정 소송을 제기하자 대법원은 97년 5월 그의 사망이 고문 후유증 때문임을 인정해 유가족에게 5·18 피해 보상금 9천여 만원을 지급하도록 확정 판결했다. 물론 한국에서 이런 판결이 나온 때는 고 안병하씨의 장남이 미국에서 윤변호사의 편지를 받고서 그를 대리인으로 해 소송을 제기한 뒤였다.

미국에서의 5·18 소송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윤변호사는 일단 96년 1월 전·노 씨 등 당시 신군부 실세 11명을 상대로 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타코마 연방 지방법원에 제기했다.

우리의 법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무리한 소송처럼 보이지만 윤변호사가 유족에게 장담한 ‘미국 법으로도 가해자들을 단죄할 수 있는 길’이란 바로 미국 연방법 제28조 1350항. 이른바 ‘외국인 고문·학살 방지 조항(ATCA)’인데, 국제법 또는 미국과의 조약을 위반해 저질러진 불법 행위에 한해 외국인이 민사 소송을 제기할 경우 연방 지방법원이 재판 관할권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 조항이 적용된 대표적 경우는 마르코스 재판. 필리핀 마르코스 대통령이 미국 하와이에 망명한 직후인 86년 한 고문 피해자가 제기한 민사 소송을 계기로 이 조항이 부각되었다. 95년 하와이 연방 지법은 마르코스 치하의 고문 피해자 9천여 명이 제기한 집단 소송에서 무려 7억6천6백만 달러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96년 8월에 내려진 5·18 사건에 대한 1심 결과는 원고 패소. 판결 요지는 재판 관할권이 없으므로 기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윤변호사는 △사건 발생 당시 한국군의 작전 통제권이 미군 통제 아래 있었고 △피고인들이 미국에 재산을 은닉했을 가능성이 크며 △피고인 가운데 한 사람인 박희도 전 육참총장이 현재 미국에 도피 중이고 △전·노 씨가 더 이상 국가 원수가 아님을 들어 미국 법원이 이들에 대한 재판 관할권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며 항소했다. 이에 대해 98년 1월에 내려진 샌프란시스코 제9항소법원의 판결은 1심 판결을 인정하면서도 ‘본 판결은 보완할 수 있다’는 단서 조항을 붙였다. 원고측은 이 단서 조항을 근거로 연방 대법원에 상고했는데, 이 사건은 현재 연방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그런데 최근 원고측에 한가지 낭보가 날아들었다. 이 사건이 계류 중인 상황에서 윤변호사가 98년 8월에 제기한 또 다른 관련 소송(사건 번호 C98-5461FDB)에서 법원이 원고측 손을 들어준 것이다. 윤변호사는 피고인 가운데 한 사람인 박희도씨가 2년 넘게 미국(로스앤젤레스)에 도피 중인 사실에 착안해 미국 법대로 신문에 박씨에 대한 고소장 광고를 내고 전·노 씨와 박씨 3인을 상대로 한 고소를 추가로 제기했는데 이 전략이 주효한 것이다. 소송 성공의 ‘원인 제공자’인 박씨는 도피한 지 3년 만인 지난해 12월 9일 자진 귀국했다.

‘뭔가 켕기는’ 피고측, 미국인 변호사 선임

윤변호사는 12월16일 피고측이 불참해 원고가 이겼다는 법원의 결정을 근거로 12월28일 곧장 타코마 연방 지법에 손해 배상 청구서를 제출했다. 청구액은 무려 6억5천1백만 달러. 윤변호사는 또 1월 초에 곧바로 관련 피고인들의 미국내 재산 유무에 대한 조사 명령을 법원에 신청할 예정이다. 조사 명령이 받아들여지면 윤변호사는 스타 검사가 클린턴 대통령에게 선서를 받고 질문을 한 것과 똑같이 한국으로 와서 두 전직 대통령을 상대로 선서를 받고 질문을 하게 된다.

물론 재판 결과는 아직 단정할 수 없다. 또 손해 배상액은 판사가 정하기 때문에 그 액수가 얼마가 될지 또한 알 수 없다. 그러나 피고측이 불리한 처지인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첫 번째 소송 때와 달리 두 번째 소송에서는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았던 피고측이 최근 미국인 변호사들을 선임한 것을 보면, 윤변호사 말대로 뭔가 켕기는 구석이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한국에서는 2년여 만에 끝난 5·18 재판이 미국에서는 소송을 제기한 지 2년여 만에 본 궤도에 올랐다. 미국에서의 5·18 재판이 국제적으로 눈길을 끈 마르코스 재판의 재판(再版)이 될지 두고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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