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훈 중위의 의문사 진상을 밝혀라
  • 丁喜相 기자 ()
  • 승인 1998.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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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벙커서 의문사… 타살 흔적·동기 ‘수두룩’… 미군, 수사하기 전에 자살 처리해 ‘의혹’
지난해 11월 3군 부사령관을 끝으로 36년간 몸 담은 군문을 떠난 김 척 예비역 육군 중장은 요즘 통곡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육사를 졸업한 후 아버지를 따라 직업 군인의 길을 걷던 아들이 2월24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내 한 벙커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은 전장에서 단련된 장군이라 해서 다를 바 없겠지만 그의 비통함에는 남다른 사연이 있다. 예편 뒤 3개월 만에 날아든 비보, 그리고 그로부터 달포 가량 진실을 추적하며 느꼈던 좌절과 분노가 그것이다.

그의 아들 김 훈 중위(26)는 육사 52기 출신으로 장래가 촉망되는 장교였다. 김중위는 1년쯤 전 아버지가 군단장을 맡았던, 수도권 방위의 가장 중요한 축선인 1군단 소속 소대장으로 당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파견되어 내외곽 경비를 맡고 있었다. 그런데 2월24일 낮 12시20분께 그가 벙커내에서 머리에 권총 실탄이 관통된 채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사고 지역이 한미연합사령부 관할이어서 연합사측은 즉각 사고 소식을 발표했다. 사고 2시간이 지나 나온 연합사 한국측 상황 보고는 ‘JSA 경비 중대 소속 소대장 자살’ 이라는 제목으로 사고자 김 훈 중위가 권총으로 머리를 쏘아 현장에서 사망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소식은 곧바로 국내 신문 · 방송 · 통신에 접수되어 각 언론은 일제히 김중위가 자살했다고 보도했다.

미군, 사망 2일 뒤 영결식장서 ‘초동 수사’

사고 후 이 소식을 접한 김장군은 ‘내 아들이 결코 자살할 리가 없다’ 고 고개를 흔들었지만, 자식도 사람인 이상 자살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미군측이 철저히 초동 수사를 하지 않았겠느냐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건 현장을 방문한 김장군에게 미군 수사에 대한 믿음은 산산히 부서졌다. 그는 “현장을 찾아 모든 사실을 확인해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2시20분에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수사관도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건 보고가 올라가고 곧 바로 자살로 발표되었다. 사고 4시간 후 미군 수사관이 도착했는데 2시간 만에 자살로 단정해 처리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초동 수사도 없이 자살로 처리한 후 사건을 신속히 덮으려 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는 주장이다.

무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고 직감한 김장군은 이후 철저한 진상 규명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 그 결과 초동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자살로 처리되었다가 사고 이틀 후인 26일 영결식장에서야 지문 채취 등 기초 조사가 실시되는 촌극이 연출되었다.

김장군은 한국 장교가 죽었는데 처음부터 한국측 수사관을 배제한 채 사건을 처리한 미군측 수사에도 강한 의구심을 떨치지 못한다. 사고 소식을 듣고 현장에 도착한 1사단 수사관은 출입이 거부되었으며, 몇 시간 뒤에야 현장 사진만 찍게 하고 되돌려 보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장군이 유족으로서 사고 현장을 방문했을 때는 사고 당일 밤에 벙커를 페인트로 깨끗이 칠한 뒤였다.

일단 서둘러 자살로 발표했던 한미연합사측은 김장군이 군의 수사 원칙을 들어 모든 사태 전개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자 뒤늦게 재수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짧은 시간에 초동 수사와 종합적 사고 분석도 없이 자살로 보고하고 언론에 흘린 뒤였기 때문에 수사가 순탄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해 김장군은 “비록 아들이 죽었지만 국가 방위에 가장 중요한 지점에서 일어난 사고이기 때문에 이지역 군단장까지 역임한 장군으로서 국가를 위해 냉철하게 접근했다. 그러나 군에서는 나와 사고 부대 장병들과의 접촉을 철저히 차단했다. 한국측 수사관이나 각급 부대 지휘관은 미군측에 수사 주도권이 있다며 방관 내지 소극적 자세로 일관했다”라고 설명한다.
객관적이고 철저한 사고 조사에 기대를 걸었던 김장군은 결국 그것이 무망하다고 보고 스스로 달포 동안 진상 규명을 벌였다. 사고 부대 장병들과 최초 시신 발견자들을 면담하고, 3월23일 한미연합사령관 틸릴리 장군을 만나 미군 사고 때처럼 유가족을 참관시켜 철저하고 원칙적인 재수사 및 한 · 미 공조 수사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틸릴리 장군은 처음에는 이를 수용하며 4월2일로 날짜까지 잡았으나 태도가 곧 변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김장군은 “약속된 날 이틀 전에 미8군 참모장에게 현장 재조사 문제로 전화했더니 받지 않았다. 그 직후 연합사 차기문 중장으로부터 전화가 와서 ‘미군측이 유가족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다’ 라고 전했다. 내가 차장군에게 ‘한국 땅에서 한국 장교가 사망한 사건인데 왜 공조가 안되는가’ 라고 묻자 미국법에 따라 수사 절차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미군측 입장이라고 말했다”라고 전한다.

결국 초동 수사도 없이 황급히 자살로 처리했다가 김장군이 강하게 항의하자 재수사를 벌였지만 재수사마저 석연찮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태 전개에 절망한 김장군은 36년 군 생활의 명예를 걸고 천용택 국방부장관 앞으로 진정서를 냈다. ‘현재 사고에 대한 수사가 1개월 이상 진행되고 있지만 수사가 축소 · 왜곡되고 있고, 유가족의 권리가 법에 의해 보호받지 못해 너무나 억울합니다’ 로 시작되는 이 진정서는 군단장까지 지낸 장군으로서 군에 부담을 주기를 원치 않지만 종합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에 따라 철저히 진상을 규명해 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이다. 아울러 세부적으로는 달포 가량 추적한, 사건과 관련된 의심 나는 사항과 증거(증언) 들을 모두 담았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김 훈 중위는 자살에 관련된 증거로서 유서나 메모가 없고, 자살할 만한 동기도 전혀 없었다. 현장 사진과 방문 조사에 따르면 김중위는 서서 권총을 발사했다고 하는데 사고 후 발견된 자세는 뒷벽에 기대고 앉은 자세여서 누군가 고의로 만든 자세라고 판단된다. 키가 175cm인 김중위가 오른쪽 관자놀이에 대고 총을 발사해 왼쪽 관자놀이를 1cm 더 높게 관통했는데, 총알이 박힌 위치는 키보다 10cm 낮은 곳이다. 또 통상 총탄이 들어간 곳보다 나온 곳의 뇌부분 손상이 더 큰데, 김중위는 오른쪽 뇌 부분이 더 크게 손상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쏜 것이 아닌지 검증되어야 한다. 자살에 사용했다는 권총도 손에서 1m20c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고, 총기에는 전혀 혈흔이 없지만 총 10cm 내부에 피가 묻어 있는 점도 조사해야 한다. 또 미군 수사 당국이 사고 당시의 권총과 옷 등 증거물을 미국에 보내 정밀 조사를 의뢰한 결과 권총에 지문이 없고, 왼손에 화약이 묻어 있을 뿐 오른손에는 화약이 없다고 나왔다. 김중위는 오른손잡이 이고, 사고 당시 장갑을 착용하지 않았다. 특히 김중위가 외박 나올 때마다 부대 내에 보급품 분실이 많아 청계천에 가서 군수품을 2백만원어치 사서 물어내야 한다고 말했고, 군기가 엉망이어서 부대내 구타가 심해 9명이나 영창에 간 사건이 있다고 말한 적도 있다. 무기 · 보급품의 부실 관리 및 안전 사고들이 어떻게 조처되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생각지 못한 특이 성격자들에 의한 불상사는 없었는지 다각적이고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본다.’

“재수사도 자살로 몰아가고 있다”

한편 사고 부대의 군기 문제와 관련해 <시사저널>이 별도로 입수한 군의 공식 자료에 따르면, 소대원들 간의 가혹 행위 , 음주 문제, 부대 보급품 외부 유출 등 각종 군기 문란 행위가 빈발했음이 드러났다. 김중위가 2소대장으로 취임하기 직전에 2소대 소대원들 간의 구타 사고로 9명이 한꺼번에 영창에 간 일이 있으며, 개인 장비 일제 점검에서 고어텍스 · 겨울 장화 · 나침반 등 주요 장비들이 없어지기도 했다.
군의 자료에는 이 부품들을 일부 병사가 밖에 내다 팔았기 때문에 없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망한 김중위가 소속된 부대에서 일어난 이런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그의 사망 원인과 직접 관련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수사기관은 이에 대한 종합적인 조사와 김중위 사망과의 관련 여부를 철저히 조사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중위는 외박 나올 때마다 가족과 친구 등 주변 인물들에게 그같은 부대내 부조리를 좌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같은 갖가지 의혹들에 대해 군 당국의 한 관계자는 “유족이 진정을 낸 것을 포함해 현재 철저히 수사 중이다. 미군측 수사 자료도 있으니 검증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모든 것이 군 내부와 관련된 문제인 데다 사고 지역이 국가적으로 예민한 지역이라서 이런 사건이 안보를 위해 좋은 것은 아니다. 수사기관의 공신력을 믿고 기다리면 의혹 부분을 철저히 밝혀낼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 척 장군은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군의 수사에 대해 별로 믿지 않는 눈치이다. 지난 1개월여 사건을 추적하면서 모든 수사 태도와 방향을 자살로만 맞추어 가려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기가 추적한 바에 따르면, 시신의 모양새만 자살에 가까울 뿐 현장과 주변 상황에 타살된 동기와 흔적이 너무도 많은데 이에 대한 수사를 소홀히 해 왔다는 불만이다.

김장군은 “내가 기자를 찾아 왔을 때는 35년 군대 생활의 명예를 거는 것이고, 앞으로의 내 인생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 것이다. 단순히 자식 잃은 아비로서의 감정이 아니라 군에 생을 바친 고급 장성으로서 우리 군이 정도를 걷기를 고하는 심정으로 이 문제를 언론이 다루어야 한다고 판단했다”라고 말했다.

군 내부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김장군의 이런 절규에 정부의 국방 수뇌부가 어떻게 답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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