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향토 기업 고려시멘트
  • 광주·김경호 주재기자 ()
  • 승인 1995.03.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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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웅 일가 소유의 벽 넘지 못한 결과…호남 여론 “살려야 한다”
꽃샘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3월18일. 전남 장성군 장성읍에 자리한 고려시멘트제조(주) 장성공장에는 아침 일찍부터 긴장이 감돌았다. 임직원들의 발걸음은 분주했고, 깨끗하게 청소한 본부 앞 광장에는 보도진이 삼삼오오 모여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날은, 지난 2월 말부터 시작돼 지금까지도 파장이 가라앉지 않고 있는 ‘덕산 부도’의 희생양이 될 처지에 놓인 고려시멘트가 법원과 주거래 은행으로부터 ‘죽느냐, 사느냐’를 심판 받는 날이었다.

62년 창업한 이래, 광주·전남을 대표하는 향토 기업으로 성장 가도를 달려온 고려시멘트가 새로운 도약기를 눈앞에 두고 이처럼 ‘비운의 기업’이 될 수밖에 없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그리고 83년 기업을 공개한 뒤 주식 시장에서 3만원대의 주가를 유지하며, 최근 5년간 연평균 매출액 7백10억원을 기록한 고려시멘트를 벼랑 끝으로 몰고간 ‘운명의 장난’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고려시멘트의 오늘은 바로 박철웅 전 조선대 총장 일가의 오늘이나 다름없다. 창업기·시련기·성장기를 다 거치고 또다시 시련기를 맞고 있는 고려시멘트의 역사는, ‘사학 왕국’을 거느리고 광주를 호령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왕위를 잃고는 또다시 ‘왕국 복원’을 꿈꾸다 쓰러진 박씨 일가의 자화상인 셈이다.

덕산의 ‘막후 거래’에 휘말려 고통 자초

33년의 기업 연륜을 쌓은 고려시멘트는 조선대가 낳은 기업이다. 이 회사는 조선대 건립 초창기에 잉태되었다. 조선대 출범의 산파역을 맡은 사람들 중에서 비교적 비중이 컸던 박철웅씨는, 대학 건물을 짓는 데 필요한 시멘트를 구입하는 과정에서 ‘돌가루’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당시 원산 등지에서 배를 이용해 시멘트를 나르면서 인명 손실까지 겪은 박씨는 62년 12월 ‘드디어’ 전남 장성군 장성읍 현 위치에 서울시멘트제조(주)라는 회사를 설립함으로써 오랫동안 가슴에 묻어둔 ‘한’을 풀었다.

69년 차관 도입 승인을 받으면서 시멘트 생산 시설 확충에 들어간 박씨는, 70년에 상호를 고려시멘트제조(주)로 바꾸고, 73년에는 당시로서는 국내 최대 규모의 소성로(klin:시멘트 제조 과정에서 용광로 구실을 하는 설비)를 완성함으로써 확고한 사업 기반을 닦았다.

그러나 77년부터 서울에 지점을 개설하고 전국 판매를 시도하다 어려움을 겪은 고려시멘트는, 그해 8월부터 79년 11월까지 주거래 은행인 산업은행으로부터 경영 관리를 받는 등 시련기를 맞았다. 이같은 위기를 설비 교체에 의한 원감 절감으로 극복한 고려시멘트는 83년 6월 시멘트 KS 표시 허가를 받으면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여, 그 해부터 흑자 경영 시대를 열었다.

고려시멘트는 87년 1월에 주식을 상장함으로써 대기업 불모지였던 호남 지방의 대표적인 기업으로 떠올랐다. 그 후 이 회사는 90년 4월~91년 4월 1년 동안 무려 1백10억원에 이르는 경상이익을 올리는 등 자본금 50억원 규모의 기업으로서는 경이적인 매출 신장을 기록하기도 했다.

장성공장의 연간 생산량 66만t의 2배가 넘는 생산 능력을 갖춘 광양공장은 91년부터 광양제철에서 나오는 산업폐기물을 이용한 ‘슬래그 시멘트’를 국내 최초로 생산해, 기존 시멘트보다 우수한 제품을 대량 공급함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특히 광양공장은 현재 추가로 연산 2백만t 규모의 ‘슬래그 시멘트’ 생산설비 증설을 진행하고 있어 95년 말에는 고려시멘트 전체 생산량이 4백만t 규모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이처럼 안정기를 누리던 고려시멘트는 회사 실세인 정애리시씨(전 조선대 이사장)와 덕산 박성섭 회장 간의 ‘막후 거래’에 휘말림으로써 오늘의 고통스런 상황을 맞고 말았다.
재판부 “피해 최소화하겠다”

“현장 근로자들 모두 호남 지방에 하나뿐인 시멘트 제조 회사에 근무한다는 자부심으로 성실하게 일했다. 그런데 보증 잘못 서서 회사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허탈하기도 하고 박씨 일가에 대해 배신감이 들기도 한다.”

최성호 노조위원장은 이와 함께 “노조원들은 이곳을 평생 직장으로 삼고 있다. 덕산 사건 이후에도 우리는 회사를 위해 흐트러짐 없이 일하고 있다. 노조원들 사이에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라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고려시멘트는 3월2일자로 광주지법에 ‘회사정리개시신청서’를 제출함으로써 법에 의한 ‘마지막 구원’절차를 기다리고 있다. 3월18일 실시된 담당 재판부의 장성공장 실사(實査)도 그 과정에 포함된다.

김도영 광주지법 부장판사는 이 날 대표이사를 신문하는 과정에서 “덕산과 관련한 풍문이 오래 전부터 시중에 파다했는데, 고려시멘트가 그런 회사에 무리하게 지급 보증을 한 것은 결국 회사가 개인 소유의 벽을 넘지 못한 결과다”라고 지적했다. 김부장판사는 “회사 정리 절차는 소유주를 살리기 위한 제도가 아니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고 채권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등 공익을 우선하는 제도다. 채무 동결 효과만 노리는 정리 절차는 기대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고려시멘트 유중옥 대표이사는 “생산량 증대를 꾀하고 불필요한 부동산을 처분하는 등 자구 노력을 강화함으로써 5~7년 내에 채무를 완전 변제할 계획이다. 현재 임직원 모두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근무하고 있으며 공장 가동률이 1백%에 이르고 있다”라고 답변했다.

광주지법 담당 재판부는 현장 실사와 함께 광주·전남은 물론 전국 각계의 의견을 수렴한 뒤 3월 하순께 최종 결정을 내릴 예정이다. 이 지역 여론은 대체로 ‘덕산과 고려시멘트는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라는 쪽으로 모아지고 있다.

안홍순 광주상공회의소 사무국장은 “덕산에 대한 감정만을 앞세워서는 안된다. 파장을 최소화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고려시멘트가 쓰러지면 6백여 직원은 어떻게 되겠는가”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고려시멘트가 지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역할을 고려할 때 ‘박씨 일가의 머니 게임’ 때문에 건실한 토착 기업 하나가 쓰러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여론도 높은 편이다. 특히 상장 회사에서 하루아침에 부도 기업으로 전락한 고려시멘트에 대한 법정 관리 여부는, 그동안 ‘기업은 망해도 기업주는 산다’는 통념에 익숙한 국민에게 ‘기업주는 망해도 기업은 산다’는 새로운 교훈을 심어 줄 수도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 결과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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