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공사 ‘관행’ 불도저에 맞선 토목공학 박사
  • 주진우 기자 (ace@sisapress.com)
  • 승인 2004.07.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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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공사 ‘일방 통행’에 제동 건 장승필 교수
‘건설업’ 하면 부정과 비리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건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나쁜 사람이 많아서일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그런데 왜 건설업에 관계한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받을까. 한국 토목공학계의 대부로 불리는 서울대 장승필 교수(62·지구환경시스템 공학부)는 건설인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웠다고 한다.

그의 생각에는 건설업계가 국민의 신뢰를 잃은 것이 가장 결정적인 이유이다. 대개 비자금은 건설사에서 만들어져 총수나 정치권에 건네졌다. 게다가 개발이라는 절대 명제 아래 국가기관과 대기업이 공사를 밀어붙였다. 불만을 토로하면 ‘지역 이기주의’ ‘밥 그릇 챙기기’라는 말로 입을 막아버렸다. 그래서 2001년 대한토목학회장을 맡은 장교수는 ‘건설 비전 2025’를 만들 계획이다. 건설업이 지닌 근본적 문제를 조금이나마 고치고 방향을 제시하겠다는 생각에서다.

2002년 3월 장교수는 한국도로공사와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아신리 주민들을 만나게 되었다(상자 기사 참조). 아신리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망가뜨리는 개발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며 학자들을 찾아 나섰다가 장교수를 만났다.

장교수는 아신리 문제가 건설계에 대물림되던 밀어붙이기식 공사의 전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신리를 돕기로 했다. 장교수는 “설계자들이 현장에 나가 주민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지도에 펜으로 그어 도로를 만들어 왔다. 공사 편의와 경제적인 이유만 우선하고 있다. 이제는 변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라고 말했다.

아신리 주민 임영환씨는 “여러 교수들을 찾아 다녔지만 도로공사 같은 공룡을 건드리면 자신들은 단칼에 날아간다며 피했다. 장교수님에게도 회유와 협박이 끊이지 않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도와주고 있다”라고 말했다.

사실 장교수가 아신리 돕기에 나서기로 한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장교수는 토목 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권위자다. 전문 분야는 교량이다. 장교수는 성수대교 붕괴 조사 책임자로서 국내 교량 공사의 사고 예방 시스템을 작동하도록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서해대교와 영종대교도 그의 손을 거쳐 태어났다. 현대건설의 한 임원은 “한국 교량 기술을 선진국 대열에 올려놓은 데 가장 크게 공헌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장승필 교수다”라고 말했다.

대한토목학회장을 지냈다고는 하지만 장교수는 도로 건설 분야와는 거리가 있었다. 때문에 한국도로공사측은 민원인들과 특수 관계라느니, 도로 교통 전문가가 아니면서 나선다느니 하며 노골적으로 공격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국가 시책이니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불도저식 행정을 장교수는 더 묵과할 수 없었다고 한다. 지역 국회의원인 정병국 의원(한나라당 가평·양평)은 “장교수는 자기 전문 분야가 아니지만 선진 공법을 연구해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힘 없는 시골 사람들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발 벗고 나섰다”라고 말했다.

도공, 장교수가 제시한 절충안 번번이 거부

장교수는 우선 도로 건설은 무조건 안 된다는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민을 설득했다. 대신 대안을 내놓았다. 장교수는 서울대 공학연구소에 의뢰해 2003년 5월 한국도로공사의 설계와 민원인들의 주장을 절충해 새로운 선형을 제시했다. 장교수는 “주거 환경뿐만 아니라 환경을 보호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으로 도로는 능선을 따라 터널로 처리하고, 인터체인지도 터널에 설치하는 공법을 채택했다”라고 말했다. 노르웨이나 이탈리아의 산악 지역에서 이미 적용하고 있는 방법이어서 기술적인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한국도로공사는 국내에서 이런 공사가 시공된 예가 없고, 5백50억원이나 예산이 더 든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그러자 장교수는 이 금액이 부풀려진 액수임을 공학적으로 증명했다. 한국도로공사는 터널 내 환기 문제를 들고 나왔다. 장교수는 일부 구간의 터널이 노출되도록 설계도를 고쳐, 문제를 해결했다.

장교수는 한국도로공사를 설득해, 함께 절충안을 만들자고 제의했다. 장교수와 한국도로공사의 최초안을 설계했던 회사는 4~5 차례 회의를 통해 최종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한국도로공사는 별 이유 없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고는 한술 더 떠 아예 원점으로 돌아가버렸다. 한국도로공사의 한 간부는 “장교수와 조율해서 내놓은 안보다 최초의 설계안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라고 말했다.

갑갑한 노릇이었다. 거대한 벽에 부닥쳐버린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장교수는 “공을 처음 굴리려면 더 큰 힘을 모아야 한다. 아신리 문제뿐만 아니라 건설업계에 만연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힘을 모으겠다”라고 말했다.

장교수는 비판과 감시뿐만 아니라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전문가들이 주축이 된 시민단체를 만들려고 한다. 건설과 환경이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하고 좀더 조직적인 활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번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장교수가 시민단체를 만든다고 하니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아신리 주민도 허드렛일이라도 돕겠다고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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