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 특조단 상사의 `허원근 사건` 말 바꾸기 내막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4.07.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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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일병 사인 둘러싼 의문사위와 특조단의 힘 겨루기 내막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와 국방부 특별조사단(특조단)의 전면전이 휴전으로 접어들었다. 공방은, 의문사위가 정수성 대장(전 특조단장)의 협박 발언(3월6일)과 전 특조단원 인길연 상사의 총기 위협(2월26일)을 공개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 정대장과 인상사가 반박하면서 불꽃이 튀었다. 7월14일 감사원은 두 기관에 대해 특별 감사에 들어갔다.

드러난 공방만 보면, 총기 위협을 했다는 인상사는 의문사위 조사를 방해한 장본인이다. 그러나 <시사저널> 취재 결과, 그는 한때는 의문사위와 ‘말이 통하는’ 협조자였다. 지난 1년 동안 그와 의문사위 간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2002년 8월26일 의문사위는 허원근 일병이 타살되었다고 발표했다. 다섯 번에 걸친 국방부의 자살 결론을 뒤집은 것이다. 당혹스러워진 국방부는 8월28일 군검찰과 헌병대 24명으로 특별진상조사단(단장 정수성)을 꾸려 재조사에 나섰다. 군검찰 사무관이었던 인길연 상사도 이때 특조단에 합류했다.

특조단은 의문사위에 사건 기록을 요구했다. 당시 의문사위 내부에서는 기록을 건네지 말자는 반대론이 거셌다. 특조단이 허일병 사건을 재조사하기보다, 의문사 조사를 재조사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의문사위는 2002년 9월12일 사건 기록을 특조단에 넘겼다. 인길연 상사가 이 기록을 인수해 갔다. 10월1일 의문사위는 조사 기록 일체를 특조단에 넘겨주었다.
2002년 11월28일 특조단은 허원근 일병이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정수성 단장은 의문사위가 날조 왜곡했다고 말했다. 60여 종의 존안서류를 국방부 법무관리관실과 차관보실에 넘기고, 특조단은 해체했다. 정수성 특조단장의 이름으로 남긴 마지막 <업무종결보고>에는 ‘국방부 차원에서 재조사는 절대 할 수 없다는 강력한 요구와 지속적인 관심 필요’라는 조건을 달았다.

의문사법이 개정되면서 2기 의문사위가 지난해 7월 활동을 재개했다. 지난해 10월23일 허일병 사건에 대한 조사 재개가 결정되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첫 전쟁은 공문을 주고받는 ‘공문전’이었다. 지난해 10월28일 의문사위는 특조단 조사 기록을 11월6일까지 송부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특조단은 자료 요구에 일절 응하지 않았다. 11월10일 특조단은 공문으로 답했다. ‘의문사위가 재조사를 시작할 때는 새로운 증거를 첨부해야 가능한데, 명백한 새로운 증거를 알려주시면 감사하겠다’며 어깃장을 놓았다. 의문사위는 발끈했다. 11월20일 의문사위는 특조단에 다시 자료를 요청했고, 12월13일, 특조단이 자료를 공개했다. 의문사위 박종덕 조사 3과장이 특조단을 직접 방문해 자료를 건네받았다. 2차전의 시작이었다.

당시 특조단이 순순히 건넨 자료는 총 아홉 권(2천5백74쪽) 분량이었다. 특조단이 조사한 1백26명의 진술조서 두 권을 제외하고는 핵심 자료가 빠져있었다. 특조단은 자료를 보관하던 캐비닛까지 열어 보여주며 자료가 더 없다고 버텼다. 그때 박종덕 3과장이 안주머니에 넣고 있던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특조단이 가지고 있을 자료 목록이었다. 박과장은 ‘장관 최초 보고서, 핵심 참고인 거짓말 탐지기 검사내용, 규명해야 할 쟁점’ 등 조사 기록과 참고 자료 전부를 요구했다. 의문사위는 특조단이 가지고 있는 자료를 꿰뚫고 있었다. 지난 1월9일부터 특조단은 일부 자료를 추가로 건넸다.
자료를 넘겨받은 의문사위는 분석에 들어갔다. 분석 결과,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일부 특조단 조사관들도 허일병의 타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조사한 것으로 확인했다. 의문사위로서는 그나마 객관적인 시각을 지닌 특조단원을 파악한 것이다. 그 가운데 인길연 상사가 눈에 띄었다.

의문사위가 인상사를 꼽은 것은 그가 총기번호가 수정되었다는 사실을 처음 밝혀낸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2기 의문사위는 허일병이 타살된 증거로 사건 당시 시신 옆에서 발견된 허일병의 총기 번호가 수정되었다고 발표했다. 1기 의문사위도 밝히지 못한 사실이다. 허일병이 자신의 총으로 자살했다는 그동안 국방부의 수사 결과를 뒤집을 만한 증거였다.

지난 1월27일 의문사위 정은성 조사관은 인길연 상사와 처음으로 통화했다. 첫 통화에서 인상사는 “공직에 있으니 할말이 없다”라며 전화를 끊었다. 뭔가 할말이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정조사관은 2월12일 대구로 내려가 인상사를 직접 만났다. 이때부터 정조사관은 디지털 녹음기로 인상사와 나눈 대화를 전부 녹취했다. 천주교인권위원회 출신인 정조사관은, 허원근 일병 사건의 특성상 진술 번복이 잦기 때문에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것이다.

첫 만남에서 인상사는 놀랄 만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인상사가 먼저 특조단 내부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고 밝힌 것이다. 인상사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꺼내,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은, 보관 중인 자료 사진까지 보여주었다. 5년 후에 양심선언을 하려고 자료를 보관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위원회 처지에서 인상사는 내부 고발자나 다름없었다.

다음날인 2월13일 정조사관은 자료 제공을 요구했고, 인상사는 그를 집으로 데려가 자료를 보여주었다. ‘DBS 파일’이라는 표지가 붙은 자료 두 권 등 두 상자 분량이었다. 정조사관은 처음에는 DBS 파일을 데이터 베이스의 약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인상사가 “D는 Dirty, B는 Black, S는 Secret 약자다. 은폐 의혹 자료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참고인 박 아무개씨의 입을 막았으며, 의문사위가 확보하지 못한 시체 사진이 있다는 등 자료를 보여주고 설명까지 해주었다. 인상사는 의문사위가 자신을 파견시켜 달라고 국방부에 요청하면 자료를 건네고 조사를 돕겠다고 했다.
2월14일과 2월17일 인상사가 의문사위 정은성 조사관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의문사위에 파견되기 전에 특조단장이었던 정수성 대장을 만나자고 제안했다. 뜻밖의 제안이었다. 내부 고발을 하겠다는 인상사가 1기 의문사위 조사를 왜곡 날조했다고 말한 정대장과 만남을 제안한 것이다. 의문사위는 인상사에 대한 진술보다 그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를 확보하는 데 무게를 두었다.

그러나 인상사는 매번 자료 제출을 거부했다. 의문사위는 2월26일 실지 조사를 결정했다. 정은성 조사관이 인상사 집에서 문제의 자료를 가지고 나가자, 이를 알고 인상사가 총기로 위협하며 반발했다. 협박은 물론 자해 소동까지 벌여, 의문사위는 인상사에게 자료를 돌려주었다. 그러면서 인상사를 계속 설득했다. 여전히 인상사와는 말이 통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인상사는 군 내부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다며 자료 제출을 거부했다.

3월6일 의문사위와 전 특조단장이던 정수성 대장과 만난 자리에 인상사가 함께 나타났다. 의문사위는 더 이상 자료 확보를 늦출 수 없었다. 울산이 고향인 의문사위 조사3과 박종덕 과장은 주말마다 집에 내려가면서 인상사를 만나기 위해 대구를 들렀다. 그때마다 인상사는 자료를 제공할 듯하다가 거부했다.

5월2일 박종덕 과장이 폭발했다. 인상사 집을 방문해 20분 정도 문을 두드렸고, ‘더 이상 인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며 질타했다. 다음날 인상사는 정은성 조사관에게 전화를 걸어 자료 제공을 약속했고, 5월7일 자료를 넘겼다. 전체 열여덟 권 분량(2천9백5쪽)이었다. 인상사가 건넨 자료 가운데 절반 가까이는 국방부가 넘기지 않은 내부 자료였다. 허일병의 타살 가능성을 염두에 둔 조사 자료도 포함되어 있었다(상자 기사 참조).

자료를 건네받은 의문사위는 속도를 냈다. 인상사를 참고인으로 조사하려 했다. 하지만 인상사가 출석을 거부했다. 조사 막바지, 의문사위는 뜻밖의 진술을 확보했다. 참고인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인상사가 특조단 활동 때 일부 참고인의 진술을 강요하는 데 관여했다는 진술이었다. 특조단의 은폐 의혹을 폭로하겠다던 당사자가, 반대로 은폐에 가담했다는 진술에 의문사위는 인상사에 대한 신뢰를 거두었다.

7월12일 의문사위는 국방부 특조단 조사의 문제점과 인상사가 보유한 자료를 공개했다. 그리고 지난 2월26일, 인상사의 총기 위협 사실도 공개해 버렸다. 의문사위는 지금도 왜 인상사가 특조단 내부 자료를 빼돌리고, 그 사실을 실토했는지 궁금해 한다. 이를 궁금해 하기는 특조단도 마찬가지다. 7월17일 인길연 상사는 취재 요청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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