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보물 고인돌 국내에선 '애물'
  • 나권일 광주주재기자 ()
  • 승인 2001.0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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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불구, 보호·관리 엉망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무덤 양식이자 매장 문화재이다. 우리나라는 특히 농촌이나 산간 지역의 논밭과 임야, 심지어 마을 앞동산이나 길가에서 흔히 볼 수 있을 정도로 고인돌이 많아 세계적인 고인돌 밀집 지역으로 꼽힌다. 전남 지역의 경우 장흥군과 고흥군에만 고인돌이 각각 2천5백9기와 2천55기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역사가 오랜 중국에서도, 고인돌이 많다는 저장성에 5백여 기, 랴오닝·지린·헤이룽장 등 동북 3성에 산재한 고인돌을 모두 합해도 4백여 기에 불과한 점을 감안하면, 우리나라는 '고인돌 왕국'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고고학 연구자들에 따르면, 현재 5만기로 추정되는 세계 고인돌의 절반 이상인 3만여 기가 한반도 전역에 흩어져 있고, 이 가운데 1만9천여 기가 전라남도에 집중되어 있다.

지난 12월2일 유네스코는 호주 케언즈에서 제24차 세계유산위원회를 열고 선사 시대 유적으로 거석 문화를 대변하는 고인돌에 대해 의미 있는 결정을 내렸다. 전남 화순·전북 고창·인천 강화 고인돌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것이다(상자 기사 참조). 우리나라에서는 문화재라고 인정받을 수 없을 정도로 천대받았던 고인돌이 인류가 영원히 보존할 가치가 있는 문화 유산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고인돌은 아직도 생활에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큰 바위'일 뿐이다.


전남 진도에선 10년 만에 2백41기 사라져

일제 시대 때부터 고인돌은 신작로나 저수지를 만드는 데 마구잡이로 이용되어 왔다. 최근에는 경지 정리를 하면서 굴삭기로 땅속 깊이 묻어버리거나 주택을 신축하면서 주춧돌이나 조경석으로 쓰는 일이 허다하다. 매장 문화재인 고인돌을 허가 없이 마음대로 옮기거나 땅속에 묻고 반출하는 행위는 문화재보호법을 위반하는 것이지만 처벌되기는커녕 보고되는 일조차 드물다. 고인돌이 야산·계곡·저수지 등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에는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지만 인가 주변에서는 자취를 찾아볼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남 나주시의 경우 지난해 조사에 따르면 10년 전 파악된 고인돌 1천2백10기 가운데 10% 정도가 사라지거나 훼손된 것으로 나타났다. <시사저널>이 지난 12월18일 '나주사랑청년회'의 도움을 얻어 고인돌 밀집 지역인 나주시 봉황면 일대 고인돌을 조사한 결과 10여 년 전에는 건재했던 고인돌이 많이 사라지거나 원형이 훼손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용반 마을의 경우 밭을 과수원으로 조성하면서 땅에 묻을 수 없는 대형 고인돌만 한 군데 모아둔 채 나머지 고인돌은 모두 땅속에 묻어버린 것으로 드러났다. 봉황면 철천리 지역의 고인돌 실태를 조사한 이재태씨(34·나주사랑청년회장)는 "10년 전부터 죽 숫자를 세며 보아왔는데, 인근 밭과 길가에 수십 개씩 널려 있던 고인돌이 지금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주민이 논밭을 경작하면서 파묻지 않고 한 군데에 모아 놓은 것만이라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 형편이다"라고 말했다.

전남 진도 지역도 10년 전 3백61기로 조사되었으나 최근 조사 결과 1백20기로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10여 년 만에 30여 개가 무더기로 사라진 곳도 있었다. 이와 관련해 진도민속예술연구회는 최근 성명을 내고, 전남 지역 곳곳에서 관리 소홀로 수백 기의 고인돌이 훼손되거나 사라지고 있다며 일반의 관심을 촉구했다.

고인돌 원형 훼손과 방치도 심각한 상황이다. 특히 농지 정리나 도로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고인돌이 파괴되기 일쑤이다. 봉황면 철천리 마을 앞 공원에서는 고인돌이 의자처럼 사용되고 있는데, 한 주민은 "1970년대 새마을 운동으로 마을길을 넓히는 과정에서 길가에 있던 고인돌을 파서 옮겼다"라고 말했다. 또 마을 안에 있는 작은 고인돌의 경우 공덕비나 기념비로 사용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심지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화순 고인돌 지구 내 2백여t짜리 초대형 고인돌에는 '안흥 민씨 세장산'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문중 소유 임야임을 알리는 표지석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고인돌이 이처럼 훼손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극히 일부만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기 때문이다. 전남대·목포대·국립광주박물관이 1996∼1997년 '전남의 고대 묘제' 조사를 실시하면서 파악한 전남 지역 고인돌은 2천2백8개소에 모두 1만9천58기. 이 가운데 1천3백40기만이 문화재, 즉 국가 지정 사적이나 전라남도 지정 기념물, 문화재자료 등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문화재 지정에서 제외된 대부분의 고인돌은 사라지거나 훼손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 때문에 화순·고창·강화 등 한반도 최대 선사유적 밀집 지역에 대한 보존과 관리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전라남도 문화예술과 문화재계 담당자는 이와 관련해 "너무나 많은 고인돌이 시·군 지역에 흩어져 있어 사실상 뾰족한 대책을 찾기 힘든 형편이다. 각 시·군에 고인돌 현황을 파악한 뒤 일련번호를 매겨 관리대장을 만들고, 정기적으로 숫자를 보고할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했다"라고 말했다.

고인돌이 매장 문화재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자치단체들이 적극 관리에 나서지 않는 한 고인돌의 수난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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