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라미드에 깔리는 대학생들
  • 고제규 기자 (unjusa@e-sisa.co.kr)
  • 승인 2001.0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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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다단계 판매 회사의 '사람 장사' 피해자속출… 돈·친구·젊음 모두 잃어

사진설명 단체 이동 : 다단계 회사는 회원 이탈을 막기 위해 봉고차로 판매원들을 합숙소까지 태워 나른다. 봉고차는 대부분 합숙소가 밀집한 성남시로 향한다.

서을 압구정동은젊은이의거리다. 젊음의 거리답게 지하철 압구정역은 약속을기다리는 젊은이들로 항상 붐빈다.그 중에서도 유난히 오전 9시부터 10시사이, 압구정역2번 출구 앞에는 20대가 많이 몰려 있다.

박지희씨(가명·21) 역시 지난1월9일 오전 9시10분쯤 압구정역 2번 출구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생인박씨는 이틀전 친구 이미나씨(가명·21)로부터 전화를 받았다."아르바이트 자리가 생겼다. 사무보조인데, 월급만 100만원이다. 일도 그렇게 힘들지 않다." 다음 학기부터 등록금이10% 인상되기때문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애타게 찾던 박씨는이 날 면접을 보러 갔다. 친구이씨를 믿고 따라 나선 박씨는 이렇게 다단계 판매 회사에 발을 들여놓았다. 요즘 이같은 메이드 작업(다단계판매 회사로 친구를 유인하는작업)을 삼성역이나 압구정역 주변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있는 ㅅ회사. 압구정역 2번 출구에서 5백m 떨어진 이 회사 입구에는 간판이 없다. 지하1층과 3·4·5 층을 사용하는 이 회사 문전은 대학 입학원서 접수 창구를 방불케 한다. 지하는 휴게실이고 3층과 4층은 강의실이다.지하 휴게실은20대 100여 명이 여기저기서 판매원 등록 서류를 작성하고 있어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이다. 계단에는 이름이 적힌 물건상자가 즐비했다. 회사로부터 구입했지만 부모한테 혼날 것이 두려워 집에도 가져가지 못한 채 이곳에 쌓아둔 것이다. 박씨도 그곳에서 3일 동안 '사업설명회'교육을 받고 3백만원 상당의 물건을 샀다.


다단계 판매 회사 3백여 개, 상당수가 불법 운영

박씨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기 위해 벼룩 시장에 과외 광고를 싣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 광진구청이 대학생 아르바이트생 59명을모집하자 3백여 명이몰릴 만큼 아르바이트자리 구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틈을 노린 불법 다단계 판매 회사가 대학생에게 유혹의손길을 뻗치면서 피해자가 늘고 있다. 안티 피라미드 사이트에는 하루 평균 천명이 넘게방문하고 있으며, 피해 사례가 계속해서 뜨고 있다.

다단계 판매 사업은불법이 아니다. 1995년 '방문 판매 등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어 다단계 판매는 합법화했다. 정부는 불법적인 피라미드 피해가 늘자, 법의 테두리 내에서 감독을 강화하기 위해 양지로 끌어냈다. 다단계 사업이 합법화하자 대기업도 시장에 뛰어들 만큼 일반화했다. 다단계 마케팅은 기업-중간 도매인-소매인-소비자라는 복잡한 유통 과정을기업-소비자로 단순화해 중간 유통비를 기업과 소비자에게 돌려주는 윈윈 마케팅이다.

그런데 문제는 중소 규모 다단계회사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면서 합법을 가장한 불법 피라미드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영업하고 있는 다단계 판매회사는 전국적으로 3백여개,서울에만도 1백15개가있다. YMCA 시민중계실 서영경 팀장은 "상당수다단계 판매 회사가 합법을 가장한 불법 회사다"라고 말했다. 박씨가가입한 ㅅ회사도 다단계 사업을 위장한 피라미드 회사였다.

박씨는 첫날 헬프 교육(다단계의부정적 이미지를 씻는 사업설명회)을 받았다. 오전10시부터 시작된 헬프는점심 때까지 계속되었다. 오후 교육은 빽마진(사업 성공담)이라불린다. 높은 단계 업라인(보석 이름을딴 루비·사파이어·다이아몬드로 불린다)에 있는 헬퍼(헬프 교육 담당자)들의현란한 말솜씨가펼쳐졌다. 첫날 강의를 들은 대부분이 이때다단계 사업에 대해 경계심을 푼다.오후 4시까지 이어진 교육이 끝나면 술자리가 마련된다.

박씨는 둘쨋날 제품을 소개하는 사업 설명과 다단계 마케팅 교육을 받았다.'우리는 합법적인 다단계다. 절대 불법피라미드가 아니다'라며 다단계에 대한 선입견을 깨뜨리고, '3개월만 열심히 뛰면 1천6백만원을 벌 수 있다'고 사행심을 조장하는 내용이었다.박씨도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박씨처럼 둘쨋날 강의까지 듣게 되면 다단계판매원 가입은일사천리로 이루어진다. 그 날 마지막 강의에서 헬퍼는 슬쩍 '투자' 이야기를꺼낸다. 기본적으로 3백만원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헬퍼는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투자가 가능하다면서 대학생 신분을 이용한 투자방법을 설명한다. 마지막 3일째 교육에서 헬퍼는 박씨에게 투자 결정을 다그쳤다. 투자 결정에 망설이는 사람이 대부분이어서 이때는 피라미드로 잔뼈가 굵은 프로급이헬퍼로 투입된다. 이들의 말솜씨에 백기를 들지 않는 사람은 없다.


카드 빚 내 3백만원 투자

대학생들이 기본 투자금 3백만원을 조달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는 카드 대출이다. ㅅ사 입구에는 카드 신청대가 마련되어 있어 교육을 받은 뒤 곧장 카드를만들면 된다. 둘째 방법
은 학자금 융자이다.각종 신용금고에서 등록금 대출을 받는 것이다. 대출을 위해서는 주민등록등본·재학증명서·도장만있으면 된다.
ㅅ사 주변에는 동사무소와 도장을 파는 가게가 있다. 투자금 마련을 위한 원스톱 체계가 갖추어져 있는 셈이다.

지난해 여름 방학때부터 다단계판매원이 된 김은정씨(가명·23)도 이같은교육 과정을 거쳐 3백만원으로물품을 구입해 블루(1단계 판매원)가 되었다. 보통 다단계 회사는판매원이 7단계로 나뉘는데 이회사도 블루·레드·실버·골드·사파이어·에메랄드·다이아몬드 7단계로 분류했다.블루가 된김씨는 레드로 승진하기 위해 친구 3명을 업라인에게 '보여주었다'(회사에 데려오는것을 보여준다고말한다). 김씨가 이렇게 친구들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업라인들이 치밀하게 교육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판매원에 가입한 뒤 곧바로블루 교육을 받았다. 그는업라인으로부터 제품 판매 노하우가 아니라 사람을 끌어오는 다음과 같은 노하우를 전수 받았다. '폰팅:통화는 짧게 자주 한다. 밝은 목소리로상대방에게 친근한 이미지를 주어라.' '미팅:시간약속을 지켜라. 어색하지 않게 공감대를 형성한다. 최근 상황을 파악한다.'

김씨는 폰팅과 미팅으로 만난 친구들에 대한 보고서를 정성껏작성해업라인에 보고했다. 이 보고서는 소속 학교·장래 희망·이성 친구 유무·이상적인 이성상 등으로 채워졌다. 김씨는 업라인과 상의한 뒤 치밀하게사람 장사에 나섰다. 이처럼 치밀한준비 뒤에 이루어지는 만남이므로 다단계에 부정적 시각을 지녔던 사람도 당할 수밖에 없다.


3∼4개월 교육 받으면 다단계 신봉자 돼

특별한 일이 없더라도김씨는 학기중에도 회사에 출근했다. 아침 8시30분까지 출근해 일일계획표를 쓰고 아침 조회와 라인미팅에 참석했다. 메이드(미팅 약속)를 잡거나 보충 교육도 받았다. 김씨는 이런교육을 매일 계속 받으면 성격까지 바뀐다고말했다. 3∼4개월 동안 교육을 받으면 완전한 다단계신봉자가 되기 마련이다.이쯤 되면'도를 아십니까'라며 접근하는 거리의 포교사도 "그럼, 다단계 사업을 아시나요"라며 맞상대하는 다단계 판매원들에게는 고개를 돌린다.

이탈자를 막고 소속감을 키우기 위해서 일부 업체는 단체 생활도강요한다. 서울 거여동에 위치한 ㅋ사. 이곳 역시 대학생이 주고객인 다단계 회사다. 1월11일오후 7시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회사 입구에세워진 봉고차에올랐다. 이들이 봉고차로 이동한 곳은 성남시 수진동 주택가. 이들은 한 지하방을 얻어 합숙했다. 지하방 입구에는 이들의신발이 가득했다. 지하방은 보증금 5백만원,월세 30만원,싸지만 여자 19명과 남자 6명이생활하기에는 턱없이
좁은 공간이다.

군대를 제대한 김기성씨(가명·25)는 지난해 12월부터 이곳에서 합숙생활을 했다. 서울이 집인 김씨는 "ㅋ사는 피라미드 회사다"라고 털어놓았다. 물건을 팔러돌아다니지 않고 사람을 끌어오는 것이 주요한 사업이라고 했다. 사람을 소개해야 수익금이 배당되기에 한 사람이 이탈하면 그만큼 손해라는것이다. 처음에 교육은 6박7일간 이루어지는데,교육이 끝난 뒤에도 합숙은계속된다. 합숙소는3명의 상위 업라인이 책임지고운영하며,운영비는 각자 조금씩 낸다.

다단계 합숙소는 서울로 통하는 도로변과 지하철역 주변인 성남시 태평동·신흥동·수진동 일대에 밀집해 있다.다단계 합숙소가 밀집하면서 이 지역에는 새벽과 밤에 이색 풍경이 펼쳐진다. 새벽 4∼5시쯤성남시 중앙시장과 시청 주변은 환경 관리원보다 먼저20대 10∼20여 명이 회사에 출근하기 위해 새벽잠을 깬다. 핸드폰이 필수품인 20대들이 공중 전화에 붙어 있는 모습은 다른지역에서는 좀처럼찾아볼 수 없지만, 성남에서는 흔한 풍경이다. 밤 10시쯤 신흥역과 수진역 지하철 공중전화 부스는 20대들이 점령한다. 이들은거의 다단계 판매원인데, 칼바람을 피하기 위해 지하철 공중 전화를 애용한다. 폰팅작업을 핸드폰으로 하면 통화비가 비싸기 때문이다.


다단계 합숙소 단속은 불가능

합숙소가 만연하더라도 이를 단속할근거는없다. 성남시태평3동 파출소최종열 순경은 "지난해 12월 한달 동안 아들이나 친구를 찾아달라는 민원이 6건 정도있었다. 감금과 폭행신고가 접수되지 않는 한단속하기 힘들다"라고 털어 놓았다.

이용우 변호사는 "법망을 피하는데 익숙한 다단계 사업자들이 눈에 띄는 위법행위를 하지 않는다. 피해를 보면 신고하고, 그전에 불법 다단계 유혹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다단계판매회사를 빠져나오더라도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인간 관계가 끊길뿐 아니라 대출금 3백만원이평생을 가로막는 올가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매달 지급하는 이자도 만만치 않지만,연체하거나 갚지 못할 경우 신용불량거래자 명단에 올라 취업이 불가능하다. 젊었을 때 한번 실수치고는 그 상처가 너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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