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로 간 도망자 "뛰어봐야 벼룩"
  • 주성민(자유 기고가) ()
  • 승인 2001.0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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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경찰청, 인터폴과 손잡고 도피범 줄줄이 체포·압송

사진설명 숨을 곳이 없다 : 한국에서 3억4천만원을 사기한 혐의로 수배되어 사이판으로 도피했다가 인터폴 수배망에 포착되어 2월1일 한국으로 압송된 ㅈ씨

최근 들어 범죄를 저지르고 해외로 도피한 용의자들이 국내로 속속 잡혀 오고 있다. 해외 도피 사범을 담당하는 법무부 검찰 4과와 경찰청 외사과가 부쩍 힘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시사저널>은 대륙을 넘나들며 이들 용의자를 현지에서 체포해 압송해 오는 과정을 취재했다.

아직도 어둠이 걷히지 않은 2월1일 오전 6시50분, 사이판에서 날아온 아시아나 251편이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가방을 든 남자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램프 게이트를 빠져 나왔다. 그는 강제로 호송된 해외 도피범이었지만, 순순히 지시에 따르겠다고 해 호송관들이 그에게 수갑을 채우지도 양팔을 붙들지도 않아 평범한 승객으로 보였다.

"뭐라고 말할 기분이 아니다." 긴장과 불안감에 지친 남자가 기자의 질문에 귀찮은 듯 내뱉었다. ㅈ씨(42)는 3억4천만원을 사기해 챙긴 후 도주한 혐의로 1995년 서울 동부경찰서와 동부지청으로부터 지명 수배되었다가 사이판에서 체포되어 한국 인터폴인 경찰청 외사3과 수사관들에 의해 압송된 것이다. 지난해 12월 5일 사이판 인터폴이 장씨의 수배를 조회해 오자 외사3과는 수배 사실을 통보한 후 2001년 1월18일 체포 영장을 보내면서 추방을 요청했다.

지난 1월30일 오후 2시, 사이판 인터폴이 티니안 섬에서 그를 체포한 것을 확인하고 저녁 8시20분 인터폴의 경위 두 사람이 떠났다. 31일 사이판 법원에서 추방 결정이 내려졌고, 한국 인터폴은 신병을 인수해 현지에 도착한 지 20여 시간 만인 2월1일 오전 2시30분 그를 항공기에 태웠다. "혐의를 인정한 데다, 체념 상태여서 데려오기가 쉬웠다." 그를 호송한 인터폴 수사관의 말이다.

국내에서 범죄를 저지른 후 해외로 도피한 범인을 송환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법무부가 송환하는 방법은, 소재를 파악한 후 해당 국가에 정식으로 인도요청서를 보내 체포한 후 데려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각국은 '범죄인 인도 조약(Extradition Treaty)'을 맺는다. 이 방법은 국가 간의 상당히 높은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숱한 공식 서류를 갖추고 외교 경로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두 달에서 석 달 정도 시간이 걸린다.

한국은 미국과 호주를 포함한 13개 국가와 조약을 체결하고 있고, 10개국과는 조약이 발효되어 있으며, 태국과는 2월 중 발효시킬 예정이다. 그러나 문제는 범인인도조약에 비효율적인 면이 있다는 것이다.


조약 통한 체포보다 '인터폴 공조'가 효과적

지난 10년간 정식 인도 요청을 해 범인을 송환해온 사례는 7건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해 법무부는 미국에 10건을 요청했지만 한 건도 성사되지 않았다. 범인 인도의 핵심은 체포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체포하지 못하니 데려올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범인인도조약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려면 신속한 체포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그러나 조약을 통한 송환은 국가 간에 법과 문화의 차이가 커 시간만 낭비하게 만들기 십상이다. 이런 이유로 전담 부서인 법무부 검찰4과는 고민이 많다.

범인을 송환해 오는 또 한 가지 방법은 인터폴을 통하는 것이다. 국제형사기구인 인터폴은 본부인 프랑스 리용의 메인 컴퓨터와 연결된 적색 수배(Red Notice)를 운용하고 있다. 전세계 인터폴은 지명 수배 네트워크인 적색 수배를 통해 대상자를 확인하고, 체포 영장만 있으면 용의자를 현장에서 언제든 체포할 수 있다. 물론 서울에도 인터폴이 있고, 김포공항은 적색 수배를 가동하고 있다.


사진설명 해외 동포에게 희소식 : 과테말라에 밀입국해 교민들로부터 40만달러 이상을 갈취하고 협박을 일삼다가 한국 경찰과 현지 경찰특공대의 합동작전으로 일망 타진된 조직 폭력배들.

2000년 12월10일, 싱가포르에서 항공기를 탄 젊은 남자가 마카오 공항을 빠져나오다 적색 수배에 걸려들었다. 마카오 이민국 수사관은 즉시 그를 체포했다. 그는 청구 파이낸스 사건으로 7천여 명에게 9백억원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주고 1999년 9월 도주한 혐의로 수배된 김석인씨(35)였다. 이민국은 홍콩영사관의 경찰주재관 조민오 경정에게 연락했고, 그는 한국 인터폴의 사건 담당자에게 전화했다. 담당 수사관이 현지로 지원하러 갈 방법을 찾는 동안 조경정은 헬리콥터로 45분 만에 마카오로 날아갔다. 추방을 결정한 이민국은 조경정에게 신병을 인도하면서 다음날 11일 낮 12시 이전에 마카오를 떠나라고 했다. 이리 뛰고 저리 뛰었으나 항공편을 마련하지 못한 조경정은 외사3과 사무실에서 새벽 4시까지 속을 태웠다.

11일 새벽 5시30분, 이민국 보호실에서 김씨를 데리고 나온 조경정은 카페리를 타고 홍콩에 도착해, 항공편을 확보하고 대기하던 영사관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공항으로 직행했다. 오전 9시10분, 홍콩발 대한항공 606편으로 홀로 호송 임무에 나선 그는 오후 1시25분, 별 사고 없이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그는 기다리고 있던 부산 남부경찰서 형사들에게 신병을 넘겼다. 김씨는 마카오에서 체포된 지 불과 17시간 만에 한국으로 압송되었다. 인터폴의 적색 수배가 없었다면 7천여 소액 투자자들에게 상처를 준 김씨를 법정에 세울 수 없었다.


범인 호송에 수사관들 '진땀'

2000년 한 해 동안 인터폴과 외사3과는 33건에 34명을 강제 송환해 왔다. 법무부 송환이 지난해에 3건인 데 비하면 10배 이상 성과를 올린 것이다. 인터폴이 송환하는 방법은 대체로 이렇다. 범인의 소재지를 파악하면 해당 국가 인터폴에 체포 영장을 보내 추방을 요청한다. 현지 인터폴이나 이민국이 추방을 결정하면 즉시 체포하든지 혹은 한국의 경찰주재관과 합동으로 체포에 나서기도 한다.

2000년 10월17일, 전남 고흥에서 50대 남자가 공범과 함께 김아무개씨(55)를 칼로 살해한 후 시체를 암매장하고 이틀 뒤 바로 필리핀으로 도주했다. 11월7일 외사3과는 필리핀 인터폴에 공조 수사를 요청했고, 이 해 12월16일 KBS는 <사건 공개 수배 25시>에 범인 이영식씨(51)의 사진을 방영했다. 올해 1월20일, 현지 교민으로부터 제보를 받은 필리핀 경찰주재관 차경택 경정은 이민국 직원 2명과 함께 마닐라의 현장을 찾아갔으나 하숙하고 있다던 범인은 없었다. 그러나 차경정은 범인이 하숙집에 현금 2백50만원을 맡겨놓았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자신있게 외사3과에 연락했다. "잡을 수 있을 것 같으니, 송환해갈 준비를 하라."

그때부터 수사관들은 잠복 근무에 들어갔고, 이틀이 지난 1월22일 밤 12시30분 범인이 집안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문을 열고 들어가 격투를 벌인 끝에 체포했다. 범인은 50대였지만 체격이 아주 큰 데다 힘이 세어서 체포하기까지 애를 먹었다.

연락을 받은 외사3과 최경위가 23일 오전 8시30분 항공기로 필리핀에 도착해 보니 상황은 아주 급박했다. 범인이 이민국 보호실에서 난동을 벌인 탓에 수갑을 뒤로 채우고 입에는 두꺼운 테이프를 여러 겹 붙여 놓은 상태였다. 공항에서 신병을 인수한 최경위는 동행하기로 한 이민국 수사관 한 사람과 오후 1시 30분발 대한항공 622편에 탑승했다. 그는 수갑을 뒤로 채운 범인에게 시트벨트를 채운 후 앞뒤로 한 줄씩의 좌석은 비우도록 했다. 범인과 한 자리 건너 양옆에 이민국 수사관과 자리를 잡은 그는 스튜어디스를 불러 말했다. "범인이 저런 상태이니 못 먹을 것이고, 우리도 안 먹겠다. 식사는 가져오지 마라."

항공기가 이륙하자 얼굴이 테이프로 범벅이 된 범인은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앞자리를 발로 걷어차기 시작했다. 얼마 후 필리핀 수사관을 노려보던 그는 테이프 사이로 소리를 질렀다.

"죽여버리겠다!" 긴장을 늦추지 않던 최경위가 오후 5시30분 김포에 도착해 범인을 일으켜세우자 순간 그는 돌진해 필리핀 수사관을 머리로 들이받아 쓰러뜨렸다. 이 강력범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수사관들을 땀깨나 흘리게 만들었다.


한국에서 체포된 271년형 선고받은 남자

서울지검 강력부는 2000년 11월3일, 한국계 미국인 에디 강(32)을 대마관리법 위반과 도로교통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단순해 보이지만, 이 사건에 범인 송환 전담 부서인 법무부 검찰4과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미국 시민권을 가진 에디 강은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법원에 45건이 기소되어 39건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모두 2백71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죄명은 강도·강간·절도·마약 거래·불법 총기 소지 등 다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그는 법원에 보석금 2백만 달러를 내고 풀려난 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한국으로 도피했다.

그가 한국에서 체포된 사실을 안 로스앤젤레스 검찰은 워싱턴 DC의 연방 검찰에 협조를 요청했고, 연방 검찰은 그가 풀려날 것을 염려해 지난해 말 한국 법무부로 범인인도조약 제10조에 규정된 '긴급 인도 구속'을 요청해 왔다. 범인 인도를 위한 정식 요청이 이루어질 것이며, 외교 경로를 통해 요청서가 갈 때까지 구속을 연장해 달라는 것이 그 핵심이다. 이 때문에 그에 대한 재판은 1월 중순으로 잡혀 있다가 2월8일로 연기되었다.

범인인도조약 제10조에는 긴급인도구속일로부터 2개월이 경과할 때까지 정식 인도요청서를 받지 못하면 석방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요청서는 곧바로 도착할 것이며, 한·미 간에 이루어지는 첫 번째 범인 인도 사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과테말라의 '한국 조폭' 뿌리 뽑기도

지난 1월14일 과테말라로 파견된 외사수사계 수사관들은 한국인 조직폭력단의 범죄 행위를 수사한 후, 현지 경찰특공대와 합동으로 조직원을 모두 체포했다. 과테말라에 밀입국해 폭력단을 조직한 그들은 이스라엘제 우지 기관단총과 리벌버·45구경 권총으로 무장하고 가게를 보호해 준다는 명목과 자신들이 운영하는 술집의 회원 카드를 강매하는 방법으로 교민들에게 40만 달러 이상을 빼앗아 챙기고 있었다. 외사분실 수사관들은 두목 ㄱ씨(34)와 행동대장을 포함한 7명을 1월23일 한국으로 압송했고, 이 사건은 경찰 최초로 현지에서 수사한 후 송환까지 마무리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외교부와 법무부가 노력만 한다면 인터폴과 경찰의 활동 영역은 넓어질 것으로 보인다. 범인인도조약을 체결하는 이유는 해외로 도피한 범죄인을 송환해 법정에 세우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조약을 통해서보다는 인터폴을 통한 송환이 더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국가간 조약에 인터폴이 움직일 수 있는 조항을 넣어 지금보다 활동 폭을 넓혀주는 쪽으로 개선해야 한다. 인터폴을 통해 직접 송환이 가능한 법적인 배경을 마련한다면, 범죄인 송환은 더 신속해질 것이다. 그래야만 도망가도 숨을 곳이 없고, 피해를 당한 사람들에게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줄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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