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연 자욱한 '담배 전쟁'
  • 정희상·고재규 기자 (hschung@e-sisa.co.kr)
  • 승인 2001.02.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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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연자·국가·담배공사 상대로 소송 잇달아…
정부 금연대책 실속 없어


지난 2월1일 국군 ○○병원 정 아무개 소령(여군 간호장교·35)은 같은 병원 진료부장 김 아무개 소령과 안과 과장 김 아무개 대위를 상해 혐의로 군검찰에 고소했다. 금연 구역인 병원내 회의실에서 담배를 피워 자신의 건강을 해쳤다는 이유에서였다. 정소령은 1천1백원짜리 담배를 2백4원에 면세 납품해 군인들의 흡연을 부추기고 있다며 담배인삼공사도 함께 고소했다.

공교롭게도 이보다 하루 전날인 1월31일 김대중 대통령은 보건복지부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국민에게 담배를 안 피우게 하는 것이 좋겠다. 담배 세제 개편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김대통령의 지시 직후 열린 복지부 회의에 참석한 한 민간 금연운동 관계자는 “정부가 담뱃값 100% 인상을 적극 고려해 디스 담배의 경우 현행 1천3백원에서 2천6백원으로 올릴 것으로 보인다”라고 전했다. 바야흐로 대통령이 직접 나서는 ‘담배와의 전쟁’이 시작된 셈이다.

새해 들어 담뱃값이 14%나 오른 상태에서 한 달 만에 대통령이 또다시 담뱃값 인상을 들고 나오자 흡연자들과 금연운동 단체에 희비가 교차하고 있다. 대통령 지시 후 담배소비자연맹이 서울의 흡연자 4백90명을 상대로 긴급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57.5%가 “기분 나빠 끊겠다”라고 응답했다. 담뱃값 인상이 결과적으로 금연자를 늘리는 데 적지 않게 기여할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이런 분위기에 크게 고무된 쪽은 한국금연운동협의회를 포함한 금연단체들이다. 그동안 정부를 상대로 줄기차게 ‘죽음의 연기’를 근절할 대책 마련을 요구해 왔지만 국가가 담배를 판매하는 현실 앞에서 번번이 좌절해 왔기 때문이다.

금연단체들의 시선은 김대통령의 담뱃값 인상 지시가 있은 다음날 정 아무개 소령이 낸 소송에 쏠려 있다. 2월8일 오후 3시 금연연구회 서홍관 회장과 한국금연운동협의회 김일순 회장 일행은 국방부를 방문해 군대내 면세 담배 공급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정소령의 소송을 앞으로 군 금연운동의 발판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실제 정소령이 상명하복의 위계 질서가 엄격한 군대 사회에서 자기에게 닥칠 불이익과 어려움을 감내하고 용기 있게 상급자와 국방 정책에 반기를 든 이면에는 오랫동안 교분을 맺어온 금연운동 관계자들의 지지와 격려가 컸다고 한다.


담뱃값 인상·소송 등 선진국형 금연운동


지난 1월16일 오전 9시 정소령은 진료부장실에서 열린 군의관 일일회의장을 증거 확보를 위해 급습했다. 군기순찰대 유 아무개 중사를 이끌고 회의장에 들어선 정소령은 “유중사! 실내 금연 조처를 어긴 사람들 사진을 찍어요”라고 명령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자 사태를 파악한 군의관들은 “야, 사진 찍지 마” “같은 부대원끼리 이게 뭐하는 짓이야”라는 고함을 내질렀다. 이어서 커피잔이 날아가는 등 회의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렇게 증거를 확보한 정소령은 군검찰에 증빙 사진과 함께 이들을 고소했다.

잇단 담뱃값 인상 조처에 이어 파상적인 소송 공세는 한국 금연운동이 새해 들어 선진국형으로 질적인 변화를 보일 것을 예고한다. 그동안 양담배 불매운동과 각종 거리 캠페인, 금연 구역 설정 및 담배 자판기 철거가 고작이었던 금연운동이 정부를 움직여 담뱃값을 올리도록 하고 피해자 소송을 통해 금연 지원 기금을 스스로 확보하려는 쪽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해외의 금연운동은 일찍부터 소극적인 금연 캠페인을 넘어 흡연의 유해성을 학술적으로 입증하고, 이를 바탕으로 담배회사에 법적 소송을 벌여 거액의 배상금을 받아내는 단계에까지 가 있다. 특히 세계 최대 담배 생산·수출국인 미국에서는 1954년에 최초로 흡연 소송이 제기된 이후 지금까지 개별 소송이 1천8백여 건 진행되었다. 물론 대다수 개인 소송에서는 원고가 패소했지만 최근에는 담배회사의 막강한 방어벽이 무너지고 있다. 1999년 미국 주정부들은 담배회사들로부터 담배로 인한 주민들의 질병 치료와 보상 비용으로 향후 25년간 무려 2천6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액수의 배상금을 받기로 합의하고 소송을 취하했다. 이에 비하면 한국의 흡연 소송은 걸음마 단계인 셈이다.

물론 국내에서 담배 관련 소송이 이번에 처음 제기된 것은 아니다. 담배인삼공사를 상대로 한 피해자 소송은 현재 2건이 재판에 계류되어 있다. 1999년 9월5일 폐암 말기 환자인 외항선원 김안부씨(그 해 사망)가 국가와 담배인삼공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국내 담배 피해 소송 1호였다.

김씨와 가족은 김씨가 36년 동안 하루 30~40개비씩 장기 흡연한 것이 폐암을 유발했다며 1억원을 배상하라고 청구했다.

이어 1999년 12월에는 폐암 말기 환자 6명과 가족을 포함한 31명이 공동으로 국가와 담배인삼공사를 상대로 3억원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이들의 공동 소송은 금연운동 단체 및 법률가 집단과 연계해 치밀하게 준비되었다. 폐암을 앓은 가족이 없고, 석면·라돈 등 유해 물질 취급 작업장에서 일한 적이 없는 장기 흡연자 중에서 폐암에 걸린 6명을 선정한 것이다. 이들의 소송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소속 변호사 21명이 대행하고 있다.

이 두 가지 흡연 소송은 모두 불법 행위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로서 원고측이 흡연과 피해의 인과 관계를 입증해야 하는 만큼 결과를 점치기는 쉽지 않다. 현재 원고측은 국가와 담배인삼공사가 수십 년 동안 담배의 심각한 유해성을 의도적으로 은폐해 왔다는 점을 지적하며 재판을 이끌고 있다. 흡연 피해자를 대리하는 배금자 변호사는 “지금까지 담배 제조 과정에서 첨가되는 유해 물질에 대한 정보가 공개된 적이 없어 한국 인삼연초연구원에 담배 성분 자료를 요청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담배인삼공사 대리인인 박교선 변호사는 “의도적으로 소비자를 속인 적도 없고 중독성 물질을 첨가하지도 않았다”라며 담배와 질병의 인과 관계가 의학적으로 논쟁거리인 만큼 승소를 자신하고 있다.

미국은 제조물책임법(PL)에 따라 담배 피해 소송이 이루어지면 피고로 하여금 책임을 인정하게 하기가 수월하지만, 우리나라는 1999년 제정된 제조물책임법이 2002년 7월1일부터 시행될 예정이어서 아직은 원고측에 불리한 형국이다. 그러나 앞으로 피해자의 소송이 봇물을 이룰 것으로 보여 법정에서의 담배 전쟁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담배 소비세 4조원, 금연 비용으로도 써야


새해 들어 금연운동의 방향이 담뱃값 인상과 소송에 맞추어지면서 가장 곤혹스러운 쪽은 1천3백만명에 달하는 흡연자와 담배인삼공사이다. 특히 흡연자들은 대통령이 담뱃값 인상을 지시한 후 조직적으로 반발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이들은 정부와 금연단체들의 주장과 달리 담뱃값 인상이 실효성 있는 금연 대책이라 할 수 없고 서민 경제를 더욱 주름지게 할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와 금연단체들은 담뱃값 인상이 금연을 위해 가장 강력한 조처라고 주장한다.세계은행이 담뱃값을 10% 올리면 각 나라마다 담배 수요가 적게는 4%에서 많게는 8%까지 감소하는 것으로 보고했다는 것이다. 특히 새로운 금연 인구 유입을 막는 데 심혈을 기울여 온 금연단체들은 값 인상만이 청소년의 흡연을 줄일 것이라며 반기고 있다.

유해 물질 4천여 종이 포함된 담배가 인체에 해롭고 한국이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담배 소비 국가라는 점은 담배 소비자들도 잘 안다. 흡연자는 비흡연자보다 질병에 걸릴 확률이 훨씬 높거나 오랜 기간 병으로 고생하다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일찍 죽는다는 점도 의학적으로 증명되었다. 지난해 우리나라 40대 이상 성인 흡연자 중 62%가 금연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흡연자의 48%는 담배를 언젠가 반드시 끊겠다고 응답했다. 이런 점 때문에 금연은 개인 의지 탓으로 돌려지곤 한다.

그러나 한국인 흡연의 가장 큰 원인은 정부가 제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선 정부 산하 공기업이 담배를 생산해 판매하고 있다. 흡연자들이 부담하는 연간 4조원의 담배 소비세는 대부분 지방자치단체로 들어가 현재 지방 재정의 60~70%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흡연자들에게는 담배를 끊도록 비용을 지원하지 않는다. 영국의 경우 생명보험사들은 흡연자에게 연금보험료를 깎아준다. 흡연이 생명을 단축시켜 연금 수령 기간을 짧게 만드니 재정에 보탬이 된다는 이유에서이다. 결국 값만 인상하고 흡연자를 상대로 한 실효성 있는 정책을 마련하지 않는 정부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담뱃값 인상으로 금연의 실효성을 높이려면 흡연자 호주머니에서 거두어들이는 막대한 세금을 그들이 건강을 되찾도록 돕는 비용으로도 써야 할 것이다. 우선 흡연자가 담배를 끊으려고 병원을 찾을 때 드는 금연 프로그램 비용 및 금연 교실 참가 비용과 금연 보조제를 지원하는 것이 그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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