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단체장들 '생색내기 방북' 러시
  • 나권일 광주 주재기자 ()
  • 승인 2001.04.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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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시간 낭비해 '빈축'… "한건주의 남북 교류 자제해야"

지난 3월22일 고재유 광주광역시장은 북한 방문 결과를 발표하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성과가 시원치 않다고 송곳 같은 질문을 퍼부어대는 기자들의 추궁에 진땀을 흘려야 했다. 남북 문화예술 교류를 협의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무려 열흘이나 시청을 비웠지만 올해 광주 김치축제 때 북한 김치를 선보이고, 2002 광주 비엔날레에 북한 작품을 전시하기로 했다는 '합의서' 한 장만 달랑 들고 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합의 상대는 북한의 책임 있는 당국자가 아니라 조선족 기업인 단체로 알려진 '범태평양 조선민족경제개발 촉진협회'였다. 이 합의서는 고시장 본인도 광주시장 자격이 아닌 '재단법인 광주 비엔날레 및 광주김치축제위를 대표하여 명예 이사장 고재유'라는 이름으로 서명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휴지 조각이 될 수도 있는 문서이다.

고재유 시장과 오 주 시의회 의장 등 광주시 방북단은 지난 3월17일부터 3박4일 동안 북한을 다녀왔지만 이미 추진 단계에서부터 눈총을 받았다. 베이징 주재 북한대사관으로부터 비자를 발급 받기가 여의치 않아 6일 동안이나 베이징에 체류하며 시간을 낭비했는가 하면, 한때 국내와 연락조차 끊겨 시 당국을 당황하게 하는 일까지 벌어졌기 때문이다.


수천만원 들인 방북 성과, 웃음거리로 전락


사진설명 "시민은 부끄럽다" : 3월21일 고재유 광주시장(오른쪽 세번째)이 방북을 마치고 귀국한 광주공항에서 한 시민이 '실속 없는 방북'을 비난하는 피켓 시위를 벌였다. ⓒ시민의 소리

고시장의 방북과 관련해 인터넷 게시판에 '주인은 못 만나고 집사만 만나고 왔다고요?'라는 글을 기고한 한 시민은 "고시장은 북한 방문에 소요된 비용을 공개해야 한다"라며 행정력과 예산 낭비를 지적했다. 수천만원을 들여 추진한 단체장의 방북이 시민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한 것이다.

방북과 관련해 입도마에 오른 것은 유종근 전라북도지사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2월 초 '남원 춘향문화 선양회'가 주도한 '창무극 춘향전 공연단'과 함께 북한을 방문한 유종근 지사는 오는 5월 열릴 남원 춘향제 행사에 북한 국립민족예술단의 답방 공연을 기정사실화했지만, 관계 당국인 전라북도조차 현재 성사 여부를 자신하지 못하고 있다. 전라북도는 또 올해 전주-군산 벚꽃 축제와 세계 소리문화 축제에 북한 공연단을 초청할 계획이지만 남북장관급회담마저 연기되는 현재의 경색된 분위기에서는 가능성이 낮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유종근 전라북도지사는 당시 방북 성과를 내세우면서 "북한측 민족화해협력위원회와 경제·문화예술·체육 협력사업 추진에 협력하기로 하는 '의향서'를 체결하고 북한측과 연락 창구를 개설했다"라고 강조했으나 실제 협력 사업은 아직까지 지지부진하다. 이와 관련해 당시 공연단원으로 방북했던 남원시립국악단의 한 관계자는 "문화예술 교류인 공연 자체가 주목적이었는데 단체장이 방북 성과를 독점하고 포장했다"라며 마뜩치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현재까지 우근민 제주지사가 지난해 초 민간단체 고문 자격으로 북한을 다녀온 데 이어, 김진선 강원도지사가 지난해 12월 단체장 자격으로는 처음으로 방북했고, 유종근 전북도지사와 고재유 광주광역시장이 그 뒤를 이었다. 기초단체장 가운데는 최진영 남원시장·차관훈 완도군수가 이 달에 다녀왔고, 윤영수 강진군수도 4월 초 들어갈 예정이다. 또 이수환 철원군수도 방북을 신청해 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쟁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단체장들의 방북은 대부분 민간 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는 북한동포 돕기운동과 맞물려 있다. 유종근 전라북도지사와 춘향전 공연단 방북은 미리 민간 차원에서 모금한 40만 달러어치의 내의와 상당액의 현금을 북한에 지원한 뒤에야 성사되었다. 김진선 강원도지사 역시 농업용 비닐을 지원한 뒤 방북했다.

우근민 제주도지사는 '북한동포돕기 제주도민 운동본부' 고문 자격으로 과잉 생산된 제주 감귤을 지원한 뒤 방북했고, 차관훈 완도군수와 윤영수 강진군수도 '사랑의 김·미역 보내기 운동본부' 고문 자격으로 '미역이 잘 전달·분배되었는지 확인할 목적'으로 방북했거나 방북할 예정이다.


"미역이 잘 전달되었는지 확인하러…"


사진설명 교류한다지만 : 유종근 전북도지사)왼쪽에서 다섯번째)는 2월 방북 직후 '창구를 개설했다'고 강조했으나 협력 사업은 지지부진하다.

이처럼 '선물'을 먼저 지원해야 방북이 성사되는 추세이기 때문에 자치단체들마다 민간 단체들이 주도해 북한동포 돕기 운동에 열심이다. 전남 지역의 경우 현재 담양군에서는 방울토마토 보내기 운동이, 목포시에서는 옥수수보내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물론 민간 단체가 주도하는 자발적인 북한동포돕기 운동이기는 하지만 일부 자치단체장들은 이를 자매 결연이나 교류·협력 다짐을 받기 위한 방북의 기회로 삼으려고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와 단체장들은 이같은 대북 교류와 방북에 대해 긍정적이다. 차관훈 완도군수의 방북과 관련해 완도군청 기획담당 공무원은 "잉여 생산 미역이 많아 지역 경제가 어려움을 겪었는데 북한에 미역을 지원한 덕분에 정부가 어민들에게 추가 수매를 2천 t 해줄 수 있었다"라며, 결과적으로 완도 어민들을 돕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고재유 광주시장 역시 "민주 인권 도시인 광주가 남북 문화 교류를 활성화하는 데 앞장섰다는 의미가 크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방북에 따르는 후유증 역시 만만치 않다. 공연단 방북을 주도한 남원춘향문화선양회나 남원시립국악단원들은 한동안 '돈만 퍼주고 온 것 아니냐'는 온갖 억측과 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남원춘향문화선향회장 안한수씨는 "비용이 얼마나 들었는지는 3년 뒤에나 얘기하고 싶다"라며 손사래를 쳤다.

고재유 광주시장 역시 무리한 방북 때문에 이미지에 상당한 타격을 입었고, 차관훈 완도군수는 방북에는 성공했지만 뇌물 수수 혐의로 징역 5년을 구형받아 약속한 남북어업교류 협력 사업 추진은커녕 단체장직 유지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정부 당국도 이러한 후유증과 자치단체 역량의 한계를 알고 있지만 단체장들의 방북을 무조건 막을 수 없는 형편이다. 통일부 교류협력국의 한 관계자는 "나쁜 일도 아니고 동포를 돕기 위해 가겠다는데 막을 수는 없다. 민간 차원의 충분한 지원과 교류·협력 분위기가 조성된 뒤 단체장들이 꼭 필요한 경우에만 방북을 신청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단체장들의 생색 내기 방북 견제는 자치단체의회와 시민의 몫이다. 오수열 교수(조선대·정치외교학과)는 "단순히 남는 물건이나 식품을 인도적 차원에서 보내는 것이라면 적십자사나 민화협 등 사회단체에 맡기면 된다. 북한에 다녀왔다는 것이 무슨 특별한 일도 아닌 터에 막대한 예산을 써가며 추진하는 단체장의 한건주의식 대북 교류는 자제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주민이 공감하지 못하는 단체장의 방북은 예산과 행정력 낭비로 이어진다는 주장을 자치 단체장들은 귀담아 들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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