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하면 아들로 태어나라?'
  • 노순동 기자 (soon@e-sisa.co.kr)
  • 승인 2001.04.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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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지역 세 가문, 종중 땅 매각 대금 남자 위주로 분배…
여성에겐 1원도 안준 곳도


국토 개발이 진행된 이래 '조상이 밥 먹여주는' 예는 많았다. 경기도 용인 지역에도 뒤늦게 조상의 음덕이 미쳤다. 1990년대 후반 용인군 수지읍 부근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면서부터다. 하지만 음덕은 오롯이 아들 몫이었다. 서울에서 가까워 임금이 훌륭한 집안에 하사하곤 했다는 용인 땅은 지금 아들과 딸의 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출가한 딸에게 돈 떼주는 '나쁜 선례' 남겼다?




지난 3월25일 수원 지방법원이 출가한 딸에게는 종중 재산을 나누어 주지 않아도 된다고 판결하자, 출가한 딸들은 착잡한 표정이었다. "차라리 재단을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돈벼락을 맞은 아들과 손주 들은 학교도 때려치운 채 외제차 끌고 룸 살롱에 다니고, 누이는 오빠가 칼을 들고 쫓아오는 변을 당하고 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현재 용인 지역에서는 세 가문에서 출가녀들이 종중을 상대로 소송을 벌이고 있다. 용인 이씨 사맹공파를 비롯해 성주 이씨, 청송 심씨가 주인공이다. 이들은 지난해 여성에게도 종중원 자격을 인정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1심에서 모두 패소했다. 하지만 여성들은 멈추지 않을 기세다. 용인 이씨 사맹공파 출가녀 53명으로 구성된 '출가녀 모임' 회장 이원재씨는, 위헌 소송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 "대법원 판례(1996년)가 종중원을 성인 남자로 보고 있는 만큼 하급심이 그걸 뒤집기는 어렵다. 대법원까지 갈 작정이고, 그 다음 위헌 청구 소송을 내겠다. 돈 문제지만, 돈 문제만은 아니다."


싸움은 토지 매각 대금을 남자 위주로 나누면서 시작되었다. 성주 이씨는 종중 재산을 성인 남자에게만 1억8천만원씩 나누어 주고 여성에게는 한푼도 주지 않았다. 청송 심씨는 성인 남자 1인당 5천만원, 미망인에게 2천만원씩 주었다. 역시 딸들은 배제했다. 아들 머릿수대로 돈을 나누다 보니 아들이 많은 경우 막 태어난 손주 몫까지 모두 10억원 넘게 챙긴 집이 나왔다. 가장 정교한 분배 기준을 갖고 있는 용인 이씨는, 뒤늦게나마 출가한 딸에게 돈을 떼주어 주변 종중으로부터 나쁜 선례를 남겼다고 눈총을 받는 처지다(48쪽 표 참조).


용인 이씨 이원재씨가 적으나마 돈을 받고도 재판을 벌이게 된 데는 배신감이 깔려 있다. 열세 차례나 종중 사무실을 항의 방문해 겨우 돈을 받았는데, 며칠 뒤 며느리 계좌로 3천만원씩 추가 지급한 것이 확인된 것이다. "똑같이 받자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좋은 낯으로 헤어졌다. 하지만 뒤처리를 보고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우리 몰래 남자 몫을 늘린 것이다." 성주 이씨 이명자씨는 "옛 종중에서 돈을 쓸 때는 효자 효녀 등 사람을 가려 도움을 주었지만, 지금은 무슨 짓을 했건 남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돈을 준다. 무슨 합리적인 기준이 있는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행법에서 여성들은 법적으로 별 승산이 없다. 남녀 차별 없이 재산을 상속하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는 개인 상속과 달리, 종중이 재산을 나누어 주는 행위는 증여로 분류되어 어떻게 하든 종중 마음이기 때문이다. 실제 각 종중은 재산이 늘자 여성들을 '확실히' 배제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청송 심씨 심정숙씨에 따르면, 1998년 종중원 자격이 성인으로 되어 있던 정관을 성인 남자로 못박는 개정 작업을 벌였고, 출가한 딸과 사위의 이름을 지운 새 족보도 만들었다.


종중측 "여자 권리는 시댁에서 찾아라"




법리를 떠나 여성들은 남자들의 이기심을 참을 수 없다고 말한다. "남자끼리 나눠 갖기로 박수치고 결정하면서, 오빠나 남동생을 위해 희생을 감수했던 누이와 딸의 얼굴이 스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라고 이원재씨는 말했다. 이씨는 딸만 셋인 집안의 장녀로, 친정 어머니가 노후를 위해 양자를 들였지만 결국 어머니 돌아가실 때까지 자신이 7년 동안 병수발을 해야 했다.


여성들은 최근 한 방송 프로그램의 보도 태도에도 울분을 참지 못했다. 맥락을 설명하지 않고 싸우는 화면을 내보내는 바람에 '돈에 환장한 여인들'로 비쳤다는 것이다. 멱살잡이를 했던 이은상씨는 종중측으로부터 '묘지기'라는 얘기를 들은 터였다. 친정에서 조상의 묘를 돌보며 살아온 자신이 하루아침에 천민이나 다름없는 묘지기 취급을 받은 것이다. 이씨는 취재 카메라를 앞에 두고 종중측이 말하는 것을 보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딸에게도 돈을 주라고 말하라"며 노모를 윽박지른 딸의 사연은 이렇다. 그 노모는 아들이 다섯인데 딸과 함께 산다. 하지만 노모는 카메라 앞에서 "요즘 세상 망조다. 여자들 목소리만 드세다"라고 말했다. 다섯 아들로부터 외면당한 그 노모가 누구를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명자씨는 "취재진이 촬영할 때는 사실을 몰랐어도 돌아갈 때는 알았을 것이다. 아무리 싸우는 장면을 좋아하는 게 언론의 생리라지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라고 말했다.


매각 대금이 1천6백억 원으로 가장 덩지가 큰 성주 이씨 집안의 경우, 남자들이 자기 몫을 늘리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여동생으로부터 고소를 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큰오빠가 미국에서 의사로 살고 있는 남동생을 실종 상태라고 신고했기 때문이다.


시비에 휘말린 종중은 하나같이 해결 의지를 찾아보기 어렵다. 성주 이씨 효자선녀파 회장 이인열씨는, 법정에서 다툴 문제라며 아무것도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말했고, 오빠가 칼을 들고 쫓아오는 바람에 112에 구조 요청을 해야 했던 청송 심씨 심 아무개씨의 경우 바로 그 오빠가 종친회 회장을 맡고 있다.


여성들이 복잡한 심경을 토로하는 것과 달리 종중의 입장은 명쾌하다. 용인 이씨 종친회 이인상씨는 "남녀 차별이라고 말할 일이 아니다. 여성의 권리는 시댁에서 찾으면 된다. 여자가 친정 조상 모시느냐"라고 말한다. 매각된 재산은 100년, 많게는 4백∼5백 년 된 가문의 재산인 만큼 뿌리를 지켜온 남자들의 몫이지 딸들이 상관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종중 재산 이용에 관한 새로운 관습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용인 이씨 소송을 대리하고 있는 황덕남 변호사는 "예전에는 종중이 여성을 완전히 배제한 것이 아니며, 종중원의 자격도 성혼 후에 비로소 얻게 되는 예가 많았다. 시대가 바뀌면 현실을 반영해 새로운 규약을 만들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서울대 법대 정긍식 교수는 "요즘은 딸만 가진 경우에도 양자를 들이지 않는다. 가정이 조상의 대를 잇는 것이 아니라 성원 중심으로 바뀐 것이다"라고 말했다.


법원이 어떻게 판단하든, 이번 딸들의 반란은 '아버지의 딸, 남편의 아내, 아들의 어머니'로 존재를 증명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의 처지를 되돌아볼 수 있는 사례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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