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박' 유혹에 속아 '쪽박'
  • 고재열 기자 (scoop@e-sisa.co.kr)
  • 승인 2001.04.19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0년 '유사 금융 사기' 피해액 1조원…

수법 교묘, 기동성 뛰어난 단속에 한계


확실한 수익성이 보장되는 인형뽑기 사업에 투자하십시오. 기계 설치·운영·보수는 회사에서 맡아줍니다. 사업자등록까지 마친 회사이니 안심하시고 투자하셔도 됩니다. 원금은 100% 보장됩니다. 투자한 시점으로부터 4개월 후면 투자금의 155%(복리 기준 연 220%)를 되돌려 드립니다.'




누구나 솔깃하지 않을 수 없는 투자 조건이다. 대구에 사는 김대용씨(36)는 올해 초 일용직으로 일하며 힘들게 모은 돈 1천7백60만원을 이 회사에 투자했다. 그러나 '돈이 돈을 버는 세상인데 나도 한번 쉽게 벌어보자'는 김씨의 기대는 지난 2월26일 이 회사 대표 이승호씨(34)가 3백억원대 부도를 내고 도주하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김씨가 투자한 회사는 (주)오리오사라는 유사 금융업체였다. 유사 금융이란 정부의 인·허가 없이 금융 수신 행위를 하는 업체를 일컫는다. 정부가 허가한 금융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이곳에 투자한 돈은 전혀 보호받지 못한다.


부도 소식을 듣고 억장이 무너진 김씨는 지난 3월7일 부산 본사에 찾아갔다. 김씨는 투자금을 돌려주지 않으면 사무실에 불을 지르겠다고 위협했다. 김씨가 재떨이에 시너를 붓는 순간 남아 있던 담뱃불 티에 불이 붙어 사무실은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이 불로 (주)오리오사의 대구지사장 권기석씨(32)와 불을 끄던 부산 수안소방파출소 소속 김영명 소방장(41)이 숨졌다. 중화상을 입고 부산시립의료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김씨는 치료가 끝나면 살인방화죄로 복역해야 할 처지이다.


벤처 투자 명분 걸고 피라미드식 영업


주식 시장 침체와 저금리로 인해 시중 자금이 묶이면서 유사 금융업체의 사기가 끊이지 않고 있다. 경찰청은 지난해 유사 금융 사기로 인한 피해가 1조원(5백10개 사)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사법 처리된 유사 금융기관 업주 또는 직원도 1천5백96명(3백93명 구속)에 이른다.


유사 금융에 의한 피해는 1998년 파이낸스 사태로 거슬러올라간다. 이자를 많이 준다며 투자자를 유치한 파이낸스 업체는 1세대 유사 금융에 속한다. 그러나 정부의 단속으로 이런 업체가 불법이라는 것이 알려지고 고리를 미끼로 하는 방식이 설득력을 잃으면서 파이낸스 업체는 대부분 사라졌다.


지난해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2세대 유사 금융업체는 좀더 정교한 방식으로 금융 사기를 일삼고 있다. 이들의 영업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벤처 투자 등 주로 투자를 명분으로 내걸고 돈을 모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피라미드식 영업 방식으로 투자자를 모으는 것이다.


지난해 5월23일 서울지방경찰청 기동수사대에 단속된 리빙벤처트러스트사(리빙월드컴)의 예는 이런 2세대 유사 금융업체의 폐해가 얼마나 큰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회사는 유망한 벤처 기업에 투자할 사람을 모집한다며 피라미드 방식으로 투자자를 모았다. 1개월 투자할 경우 월 8%, 3개월 투자할 경우 월 13%, 6개월 투자할 경우 월 16%씩 확정 배당금을 지급한다는 조건이었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유리한 투자 조건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6일에 한 번씩 지정된 날짜에 배당금이 정확히 입금되었다.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다. 그것이 미끼인 줄도 모르고 사람들은 말로만 듣던 '벤처 신화' 대열에 자신이 합류한 것으로 착각하고 가진 돈을 모두 쏟아 부었다. 배당금으로 받은 돈을 재투자하고 심지어 카드 빚까지 내어 투자한 사람도 있었다. 수사를 맡았던 기동수사대 박성진 형사는 "투자자 중에는 국가 정보기관·사법기관·수사기관 종사자를 비롯해 의사·대학 교수 등 전문직 종사자에서 노점상 할머니까지 있었다"라며, 사람들이 벤처에 투자한다는 말에 쉽게 현혹되었다고 설명했다.


회사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투자를 권하도록 부추기며 투자금 모집 액수에 따라서 수당을 지급했다. 투자금을 많이 모집한 사람에게는 부장(10억원 이상)·본부장(20억원 이상)·영업이사(30억원 이상) 등의 직함을 주고 부상으로 고급 승용차까지 주었다. 투자자들은 가족·친척·친구 등 주변 사람에게 '대박 신화'에 동참하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이 회사가 투자한다는 벤처 회사들은 대부분 허울뿐인 회사들이었고 매출액도 극히 미미했다. 이 회사는 투자자들의 돈으로 약간의 배당금을 지급하고 나머지 돈을 착복하는 전형적인 유사 금융업체였다. 총 모집 금액은 약 2천4백90억원으로 이 중 미지급된 1천6백50억원이 피해 금액이었다. 벤처 대박을 터뜨리겠다는 투자자들의 꿈은 악몽으로 끝이 났다.


그러자 참담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있는 돈 없는 돈 다 투자하고 빚까지 진 뒤 노숙자로 전락한 사람, 남편 몰래 투자했다가 이혼당한 사람, 화병이나 대인기피증에 걸린 사람, 심지어 정신분열증에 걸린 사람까지 심각한 후유증이 나타났다.


알거지가 되어 겪는 경제적인 어려움보다 더욱 참담한 것은 자신이 투자를 권유했던 사람들로부터 사기꾼으로 몰려 사회에서 매장된 것이었다.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서 가족·친구 관계 등 평생 맺어 놓은 사회적 관계가 엉망이 되었다. 자기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조 아무개씨와 박 아무개씨는 자살했다.


지난해 말부터 기승을 부리는 3세대 유사 금융 업체는 더욱 진화한 형태로 투자자를 모집하고 있다. 2세대 유사 금융업체와 마찬가지로 피라미드식 영업 방식을 쓰는 이들의 특징은 아이디어가 기발하다는 점과 기동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일명 '떴다방'이라고 불리는 3세대 유사 금융업체들은 다양한 사업 아이템을 앞세워 투자자를 모은 다음 금융감독원이나 검·경의 단속이 미치기 전에 도주한다.


지금까지 검·경의 단속에 걸린 유사 금융업체의 사업 내용을 보면, 이들은 인형뽑기 기계나 스티커 사진자판기 등 주로 요즘 유행하는 사업을 소개한다. 개중에는 태양광선을 이용한 보일러를 개발했다거나, 바닷물을 생수로 전환하는 기술을 개발했다며 투자자를 현혹하는 업체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사업 계획은 모두 투자자를 모집하기 위한 미끼일 뿐이다. 다른 투자자를 모집하기 위해 이들은 사업 진행 상황과 관계없이 무조건 확정 배당금을 지급한다.


떴다방들은 거점을 옮겨가면서 비슷한 사업 아이템으로 여러 번 사기를 친다. 투자금이 모이면 이들은 바로 부도를 내고 다음 거점으로 이동한다. '바지 사장'이라고 하는 명목상의 사장이 남아서 뒷마무리를 하는데 투자자들의 입을 막기 위해 조직폭력배를 동원하는 경우도 있다. 금감원은 이처럼 이름만 바꾸어 가며 사기 행각을 계속 벌이고 있는 유사 금융업체들이 전국적으로 수십여 개 암약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회사 이름 바꾸어 가며 수천억원대 사기


리빙벤처트러스트의 경우 지난해 1월 한길인베스트밸류(피해액 미상)로 시작해서 한길벤처캐피탈(5백50억원 피해)을 거쳐 리빙벤처트러스트(리빙월드컴, 2천4백90억원 피해)로 이름을 바꾸어 가며 사기 행각을 벌였다. 주로 벤처 투자를 미끼로 투자자를 모집한 이 업체는, 이후에도 부산을 중심으로 IMI 컨설팅(3백23억원 피해)으로, 광주를 거점으로 나라 포털스(피해액 미상)로 이름을 바꾸어 손해를 입혔다. 올해 1월에도 P&C 컨설팅(1천3백58억원 피해)이라는 이름으로 변신했다.


인형뽑기 기계나 스티커 사진자판기 사업을 미끼로 투자자를 모집한 한신유통은 한신21로 상호를 바꾸고 영업하다가 적발된 이후 지금도 이름만 바꾸어서 비슷한 사업 내용으로 투자자를 모집하고 있다.


유사 금융으로 인한 피해가 커지자 금감원은 '유사 수신행위 신고센터'를 금융 유관 기관과 소비자보호 단체 등 19곳에 설치하고 금융 모니터 요원 3백명을 동원해 신고를 받고 있다. 금감원 비제도금융조사팀 조성목 팀장은 "금감원·검찰·경찰로 구성된 유사 금융 대책팀이 곧 꾸려질 예정이다. 하지만 유사 금융으로 인한 피해는 예금자 보호가 되지 않기 때문에 법적 구제를 받지 못한다"라고 강조한다. '돈이 돈을 버는 세상'이라는 헛된 믿음을 버려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