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것 하며 남는 시간에 돈 벌자"
  • 김은남 기자 (ken@e-sisa.co.kr)
  • 승인 2001.04.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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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백수' 늘어…
도전·자유 위해 실업 선택하기도


7년 전 대학을 졸업한 뒤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던 심재곤씨(31)는 어느 날 동네 포장마차에 갔다가 봉변한 일이 있다. 옆자리에 앉은, 처음 보는 취객이 대뜸 "당신, 어디 다녀?"라고 물어 왔던 것이다. "집에서 놀아요." 심씨가 대답하자 상대는 갑자기 목청을 높였다. "그럼 백수 아냐." 난생 처음 남에게 '백수'라 불린 모멸감에 심씨는 낯이 확 달아올랐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2001년 3월 심씨는 '백수세상(www.100soo.co.kr)'이라는 포털 사이트를 개설했다. 무료 셔틀버스·시사회·쿠폰 이용 정보에서 취업 정보까지 백수를 위한 정보를 총망라한 사이트이다. 이제 그는 스스로를 당당하게 백수라고 소개한다. "백수는 할 일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단지 미래를 위해 잠깐 움츠리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드러내놓고 '백수' 자처하는 젊은이들




요즘 한국 사회에는 백수가 넘쳐난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백수는 '돈 한푼 없는 멀쩡한 건달'을 가리키는 백수건달(白手乾達)의 준말이다. 옛날 같으면 가문의 수치로 여겼을 존재.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은 드러내놓고 백수를 자처한다. 인터넷에는 백수포털·백수닷컴·백수114처럼 백수를 위한 전용 공간이 널려 있다. 국내 최대 포털 커뮤니티인 '다음'에는 백수라는 검색어로 찾을 수 있는 카페가 무려 3백82개나 있다.


이들 사이트는 백수의 해방구나 다름없다. 이곳에는 '백수 생활 6개월째에 남는 것은 카드 빚과 살뿐'(보라돌이)이라는 푸념, '이 생활의 종지부가 어디인지 알고 싶다'(백조)는 절망, '요즘 여자는 못생겨도 경제력은 있어야 한다고 닦달하는 남자 친구 때문에 못살겠다'(용가리)는 하소연, '정부는 무능한 ×들의 집합소. 이민을 가고 싶다'(나)는 분노, '아무리 어려운 환경일지라도 자신을 믿고 경쟁력을 높이자'(나그네)는 격려들이 뒤엉켜 있다.


백수가 넘쳐나고 백수 사이트가 성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은 물적 토대의 변화를 꼽을 수 있다. 실업자 100만 명 시대. 백수가 양산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심재곤씨는 이렇게 주장한다. "실업자 통계에는 잡히지 않지만 한 달에 한 번 일감이 있을까말까한 프리랜서나 취직을 못해 할 수 없이 진학한 대학원생, 휴학생, 입대·유학 예정자, 가정주부 이 모두가 백수이다. 일하고 싶어도 일할 자리가 없는 사람이 바로 백수 아닌가. 이렇게 따져 보면 성인 인구의 과반수 가량은 백수에 속할 것이다. 당연히 백수에 대한 시각도 너그러워질 수밖에 없다."


노동 시장이 급변하고 다양한 형태의 해고가 판을 치면서 백수와 비(非)백수의 경계는 날로 모호해지고 있다. 개인 홈페이지에 '백수방'을 운영하는 최운학씨는 "누가 언제 백수가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현실에 살고 있다"라고 말한다. 대학생도 실업 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요즘 후배들은 신입생 때부터 '예비 백수'라는 말을 즐겨 쓴다"라고 대학생 강진우씨(한양대·도시공학과)는 말했다. 아직 학생 신분이라는 방패막이 있건만 가공할 취업난 앞에 일찌감치 포복 자세를 갖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만으로는 백수 범람 현상을 완전하게 이해하기 어렵다. 포털 커뮤니티 '다음'에서 '난 돈 없이 산다. 백수·백조들의 모임(cafe.daum.net/beksu1550)'을 운영하는 남성훈씨(21)는 이렇게 주장했다. "최근에는 백수의 개념 자체가 바뀌고 있다. 백수는 더 이상 실업자 내지 무능력자의 동의어가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일을 잘할 수 있는데 단지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이 백수일 뿐이다."


명함 있는 백수는 1등급, 시간 많은 백수는 4등급




이같은 주장은 이른바 '자발적 백수'가 등장하면서 힘을 얻고 있다. 영화 전문 주간지 〈필름 2.0〉에 '나만의 에로 극장'을 연재하는 김 식씨. 그가 지면에 내건 공식 직함은 백수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곳저곳에 글을 기고하는 그는 백수라기보다 프리랜서에 가깝다. 그렇지만 김씨는 스스로를 백수라고 규정함으로써 더 자유로운 사고와 글쓰기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남성훈씨는 아웃사이더로서 백수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백수는 낯선 이국땅에 홀로 떨어진 이방인 같은 존재이다. 사회 구성원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방인은 한 발짝 떨어진 거리에서 그 사회를 관찰할 수 있다. 관광버스 운전 기사 경력 7년 만에 중장비 사업을 벌였다가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는 이용호씨(31)는 이렇게 말한다. "잘 나갈 때는 백수를 사회의 기생충처럼 취급했었다. 그렇지만 나 자신 백수가 되고 나니 진짜 소중한 것들이 비로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씨는 요즘 '나를 찾아 떠나는 버스 여행(bustour2.com)'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백수 세계의 법칙을 따르자면, 백수에도 등급이 있다. 1등급:명함이 있는 백수, 2등급:할 일이 있는 백수, 3등급:약속이 있는 백수, 4등급:시간만 많은 백수가 그것이다. '백수광부'라는 아이디로 인터넷 매체에서 필명을 날리고 있는 이승훈씨(33)는 이 중 1등급 백수에 속한다. 1등급 품질 보증서처럼 이씨의 명함에는 여러 가지 직함이 적혀 있다. 인터넷 칼럼니스트, 〈딴지일보〉 엽기고증부 자문위원, 〈뉴스보이〉 논설위원, 성인 포털 BL커뮤니티 자문위원.


2년 전까지만 해도 이씨는 4등급 백수에 불과했다. 법대를 졸업한 뒤 고시촌에 들어갔다가 부친이 사업에 실패해 공부를 접어야 했던 이씨는 '만화방 갈 돈조차 없어 공원에서 시간을 죽이는' 최악의 상황들을 경험했다. 막막함·무료함·비참함. 이런 것을 덜어 보고자 이씨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PC방에 앉아 이런저런 인터넷 사이트에 글을 올리던 어느 날 '대박'이 터졌다. 고시 공부 시절 쌓았던 법학 지식을 바탕으로, 인터넷 포르노 사이트 검열의 위법성을 조목조목 따지는 글을 〈딴지일보〉에 올렸는데 이것이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것이다.


이름이 알려지고 나니 돈도 직장도 따라왔다. 지난해 수원의 한 벤처 회사에 스카우트된 그는 회사 일 외에도 인터넷 매체에 칼럼이나 에세이를 연재하면서 월 3백만원 가량 버는 고수익자로 변신했다. 그러나 그는 4월 중순께 다시 백수로 돌아갈 작정이다. 대학원에 진학해 인터넷 언론을 공부하고 싶어서이다. "나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백수를 '선택'한다. 30대의 나이가 부담스럽지 않느냐고? 천만에. 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삶에 만족한다."


자발적 백수의 공통점은 '돈'보다 '삶의 질'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백수의 일상을 섬세하고 유쾌하게 포착한 포털 사이트(iam.zzagn.net /herpil/)로 재주를 인정받은 허필수씨(25)는 대학 졸업을 앞둔 지난해 가을 취업이 되었지만 한 달 만에 박차고 나왔다. '일 하며 스트레스 받고→돈 쓰며 스트레스 풀고→스트레스 풀 돈을 벌기 위해 다시 일을 해야 하는' 악순환의 사슬을 끊고 싶었다는 허씨는, 스스로를 비조직형 인간이라고 진단한다.


백수는 진화 가능성 높은 신흥 지식 계급?




만화 가게를 운영하면서 만화에 대해 마음껏 토론하고 칼럼을 쓰는 것이 꿈이라는 허씨의 좌우명은 다음과 같다. '하고 싶은 일을 하자. 단 남는 시간에 돈을 벌자.' 허씨는 지금 야후코리아에서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백수의 스펙트럼은 넓다. 아직은 비자발적 백수가 다수이지만 자발적 백수를 넘어 한국에서도 최근에는 '오타쿠족'(집에 틀어박혀 무엇인가에 열중해 있는 사람) 등장을 예감하게 만드는 백수들이 생겨나고 있다. 지난 3월 포털 사이트를 개설한 심재곤씨는 '영화면 영화, 음악이면 음악' 어느 분야에서건 전문가를 뺨치는 지식 수준을 자랑하는 백수들이 등장해 사이트에 제공된 정보의 허점을 날카롭게 꼬집는 바람에 혀를 내둘렀다고 전했다. 개중에는 자기가 가진 정보를 백수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하고 싶다며 '동지애'를 과시한 백수도 있었다.


'노동시장 유연화'가 핵심 구호인 시대에 백수를 낙오자로 여기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일지도 모른다. 이승훈씨 말마따나 백수는 불안정한 노동 시장의 희생양인 동시에 진화 가능성 200% 이상의 신흥 지식 계급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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