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못말리는 '노터치' 성역 '용산 합중국'을 가다
  • 고제규 기자 (unjusa@e-sisa.co.kr)
  • 승인 2001.04.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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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8군 기지내 게임룸, 출입 금지된 내국인 넘쳐


지도를 펴고 서울 용산구 용산동 2가부터 5가까지 살펴보면 여백뿐이다. 지도상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태원과 후암동 등 주변의 빽빽한 주택가와 비교하면 너무나 대조된다. 남산공원의 1.2배이고 서울대공원의 3배에 달하는, 지도에는 여백인 이곳이 바로 용산 미8군 기지다. '용산합중국' '용산공화국' '용산 게리슨'이라 불리는 이곳의 정식 명칭은 'The US Yongsan Compound'이다.




용산기지는 지하철 4호선 숙명여대 입구 역에서 삼각지역을 지나 신용산역까지, 1호선 국철로는 이촌역에서 서빙고역까지 아우른다. 그런데 서울의 금싸라기 땅을 차지하고 있는 용산기지의 크기를 누구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관할 구청인 용산구청은 80만평, 매주 금요일마다 기지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는 96만평, 기지를 생태공원으로 만드는 운동을 펴고 있는 문화개혁시민연대의 조명래 교수는 1백5만평으로 추정할 뿐이다.


용산기지에 들어가려면 게이트를 통과해야 한다. 게이트는 20개가 넘는다. 중심은 메인 포스트와 사우스 포스트로 통하는 5번과 10번 게이트이다.


삼각지에서 이태원 쪽으로 뻗은 길을 가다 국방부를 지나면 교차로가 나온다. 남북으로 이어진 교차로에는 전투경찰이 24시간 지키고 있다. 이곳이 바로 용산 미군기지로 통하는 주요 관문이다. 북으로 향한 5번 게이트는 메인 포스트로 통하고, 남으로 뻗은 10번 게이트는 주택가가 있는 사우스 포스트의 관문이다. 각 게이트에서는 미군이나 카투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출입증(ID 카드)을 검사한다. 그러나 이들은 군복만 입고 있을 뿐이지 실제로는 한국인 노동자이다. 이들은 '신천개발' 소속으로 현재 1천76명이 주한미군 경비를 위해 파견되어 있다. 기지 출입은 주한미군·미군속·카투사·한국인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출입증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나 출입증이 없더라도 출입증을 소지한 사람이 3∼4명을 에스코트(동행)할 수 있다.


'환전 엄금' 경고문 옆에서 버젓이 달러 교환




〈시사저널〉 취재팀은 지난 3월28일과 4월12일 두 차례에 걸쳐 일반인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기지 안을 둘러볼 수 있었다. 특히 기지내 게임룸과 불법 건축물이라며 용산구청과 마찰을 빚었던 드래곤 힐 랏지를 살펴보았다. 용산구청에 따르면 메인 포스트의 규모는 23만9천평이고, 사우스 포스트는 51만7백평이다. 메인 포스트에는 한미연합사령부와 미8군사령부 등 군사 시설이 대부분이고, 사우스 포스트에는 초중고등학교를 비롯해 주거 시설이 들어서 있다.


지난 3월28일에는 밤에, 4월12일에는 낮에 메인 포스트와 드래곤 힐 랏지의 게임룸을 둘러보았다. 평일인데도 30대 여성부터 40∼50대 남녀 내국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정신 없이 슬롯머신에 빠져 있었다.


용산기지는 단층 건물이 대부분이어서 게임룸은 1층에 있다. 게임룸에 내국인 출입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게임룸 입구마다 내걸린 안내문에는 한국인 출입 금지와 원화를 달러로 교환할 수 없다는 내용이 영어와 우리말로 분명히 표기되어 있다.


지난 4월12일 오후 3시, 메인 포스트 클럽내 게임룸과 기지 내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드래곤 힐 랏지의 게임룸은 정선 카지노를 연상시킬 만큼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드래곤 힐 랏지 게임룸은 60여평 공간에 슬롯머신이 1백50대 이상 들어차 있다. 이른 시간인데도 60여명이 슬롯머신에 매달려 있었는데, 그 가운데 2명만 외국인이고 나머지는 모두 내국인이었다.


게임룸에서는 환전이 금지되어 있지만, 규정뿐이다. 원화를 들고 가더라도 얼마든지 환전이 가능하다고 주한미군에 근무하는 한 관계자는 귀띔했다. 실제로 눈앞에서 한 내국인이 만원짜리로 달러를 교환했다. 몇몇 전문 게이머들은 아예 스마트 카드를 구입해 무인 교환기로 슬롯머신 게임을 즐기기도 했다.


불법인데도 굳이 이곳을 찾는 이유에 대해 게임룸에서 만난 내국인은 명쾌하게 답변했다. "정선 카지노까지 너무 멀다. 외국인 전용 카지노는 드나들다 적발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곳은 게이트만 통과하면 경찰의 단속에서도 벗어난 안전 지대다." 주한미군에 종사하는 한 관계자는 기지내 게임룸 단골 손님의 80%가 내국인이라고 말했다.


공짜로 준 뒤 돈 내고 찾는 아리랑택시 부지




내국인의 게임룸 출입은 그동안 사회 문제가 되었지만,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 주한미군측은 단속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는데,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단속이 가능하다. 게임룸 곳곳에 CCTV가 설치되어 한국인 출입을 한눈에 알 수 있는데도 주한미군은 단속할 의지가 없어 보인다. 이유는 간단하다. 게임룸의 주고객인 내국인 출입을 금지한다면 그만큼 손해이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주한미군이 게임룸이나 클럽 등에서 정확히 얼마를 벌어들이는지 공식적인 통계는 나와 있지 않다.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는 주한미군이 기지내 위락시설을 통해 한 해 평균 3천억원씩 매출을 올릴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가장 큰 게임룸이 있는 드래곤 힐 랏지는 기지 내에서 제일 높은 7층 건물이다. 사우스 포스트로 통하는 10번 게이트를 통과하면 왼편에 보인다. 주한미군이 미국의 예산 지원 없이 자신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건설했다고 자랑하는 호텔이다. 드래곤 힐 랏지는 1990년 2백99개실 규모로 문을 열었고, 지난해 호텔 앞쪽에 지하 1층 지상 6층 규모의 별관 건물을 지었다. 별관 건축과 함께 호텔 뒤편에 지하 1층 지상 1층 주차장 건물도 증·개축했다.


주한미군의 호텔 증·개축과 관련해 성장현 전 용산구청장이 관할 지자체와 상의하지 않고 주한미군이 공사를 강행한 것은 불법 행위라며 불도저로 강제 철거하려고 별렀던 일이 있었다. 힘없는 자치단체장이 주한미군에 맞서자 여론의 눈길을 모았지만, 성구청장이 선거법 위반으로 중도 하차한 뒤 드래곤 힐 랏지 문제는 잠잠해졌다.


드래곤 힐 랏지는 우리나라 1급 호텔 수준이다. 지난해 건설한 별관은 구관과 연결되어 있는데, 실내 수영장·헬스클럽·쇼핑센터 등을 갖추고 있다. 입구 쪽에서 보이지 않는 호텔 뒤편은 인공 폭포에 산책로까지 갖추어져 있을 정도다. 이 호텔에서의 숙박은 철저하게 미군과 미군속에게만 허용되는데, 장사를 위해서인지 게임룸은 누구나 이용 가능하다.


지난해 4월25일 성구청장이 물러난 뒤 용산구청은 드래곤 힐 랏지 문제에서 완전히 손을 떼었다. 용산구청 관계자는, 외교통상부가 미군 손을 들어 주었는데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용산구청은 현재 드래곤 힐 랏지보다는 아리랑 택시 부지 반환에 주력하고 있다.


아리랑 택시 부지는 기지 밖인 이태원동 34-87에 위치해 있다. 사우스 포스트 맞은편, 크라운호텔 옆에 위치한 부지는 3천3백평 규모인데, 주택가에 둘러싸여 있다. 주변의 오밀조밀한 다세대 주택에 비해 차고지는 운동장처럼 넓어 보였다. 이곳에는 주한미군이 점유하고 있는 것을 시위하듯 붉은색 단층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건축물은 3백평 규모다.


미군은 원래 국방부 소유 잡종지였던 곳을, 1963년 군사 목적으로 무상 제공 받았다. 그런데 미군은 이 땅을 미군 전용 택시인 아리랑 택시측에 차고지로 임대하고 매년 3억∼4억 원씩 부당하게 임대료 수입을 올리고 있다. 용산구청은 차고지를 용산기지로 이전시키고, 국방부로부터 매입해 주차타워를 건설할 계획이다. 구청으로서는 이태원 입구에 위치한 이곳을 활용하면 침체에 빠진 이태원 관광특구를 활성화할 수 있다고 본다.


용산구청 관계자는 "현재는 실무선에서 주한미군과 구입 가격을 조율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차고지를 반환받게 되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길 수 있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우리 땅을 공짜로 내주었다가 돈을 주고 다시 사는 웃지 못할 협상을 하고 있는 셈이다.


주한미군, 기지 이전 문제에 '노 코멘트' 일관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 그것도 국방부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어 용산기지는 그동안 뜨거운 논란거리였다. 동작대교가 미군기지내 골프장 때문에 시내 쪽으로 곧장 통과하지 못해 교통난 해소에 무용지물이 되었다거나, 지하철 4호선이 용산기지를 가로지르지 못하고 불필요하게 구부러졌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불평등한 한·미 관계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실체가 바로 이 용산기지였다. 1980년대 반미운동은 곧장 용산기지 반환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반환운동이 활발히 이루어지자 기지 이전에 정부가 나선 적도 있었다. 1990년 6월25일 한·미 양국 사이에 용산기지 이전을 합의했다. 당시 메네트리 주한미군 사령관은 후임 사령관에게 용산기지 이전에 관한 합의 각서를 미루려다 이임하기 하루 전날 각서를 체결했다. 이런 메네트리 사령관의 행보는 기지 이전의 난항을 예고했다. 미군측이 기지 반환 비용을 무리하게 요구하면서 용산기지 이전은 사실상 백지화했다.


그러나 올해 용산기지 이전 문제가 뜨거워질 전망이다. 시민·사회 단체가 올해 주요한 투쟁으로 기지반환운동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위 상자 기사 참조). 게다가 지난 3월27일 토머스 슈워츠 주한미군 사령관이 미국 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앞으로 10년 안에 주한미군 기지 46개를 25개로 대폭 줄이겠다"라고 발언하면서 용산기지를 포함한 기지반환운동에 탄력이 붙을 전망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용산기지 이전 문제에 대해 주한미군의 공식 입장은 '노 코멘트'다. 주한미군 관계자는 "기지 이전 문제는 우리가 아니라 한국 국방부에 물어 보라"고 말했다. 이 미군 관계자는 용산기지는 한국 정부가 주한미군에 공여한 군사 시설이므로 국방부가 다른 장소를 물색해 주면 옮기겠다는 입장이다. 미군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급할 것이 없다는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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