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의 횡포'에 돌 던진다
  • 고재열 기자 (scoop@e-sisa.co.kr)
  • 승인 2001.05.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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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운동가들,

미군 범죄·일본의 정신대 처리 등 질타…봉사 활동도 활발




지난 4월4일 미국대사관 정문 앞에서 한 미국인 수녀가 피켓을 들고 1인 침묵 시위를 벌였다. '한강에 독극물 방류하고 벌금 5백만원이 웬말이냐, 맥팔랜드를 구속하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서 있던 그녀는 여러 해 기지촌에서 봉사 활동을 해온 문애현 요안나 수녀였다. 주한미군 문제에 대해서 한국인보다 더 많이 문제 의식을 품고 있는 그녀는 '불평등한 주한미군 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을 위한 1인 릴레이 시위'의 마흔세 번째 참가자가 되어 '조국'을 질책하고 있었다.


암에 걸린 사실을 감추고 매향리 미군 사격장 폐쇄운동에 참여했던 서 로베르또 신부도 아직까지 살아 있다면 이 릴레이 시위에 반드시 참여했을 미국인이다. 지난해 7월29일 숨진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주한미군 주둔군지위협정에 관한 소식을 물을 정도로 주한미군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명동성당에서 치러진 그의 장례 미사에는 매향리 주민 1백50명 등 신도 천여 명이 참석해 그가 남긴 뜻을 기렸다.


문수녀나 서신부 외에도 이 땅에서 시민·사회 운동에 참여하는 외국인은 많다. 정치·경제·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한국 사회에 대한 비관적인 소식이 들려오고 있지만, 이들은 한국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한국 사회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성남 '외국인 노동자의 집'에서 일하는 요르그 바루트 목사도 그런 사람이다. 그가 관심을 쏟는 분야는 외국인 노동자 문제이다. 그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임금 체불이나 인권 침해 문제를 상담하고 있다. 자녀가 한국 아이들에게 매맞고 오기도 했고 뺑소니 사고를 당하기도 했지만, 그는 한국 사회에 대한 애정을 거두어들이지 않고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서 시민·사회 운동을 하는 외국인의 역사는 1970년대로 거슬러올라간다. 인혁당 사건을 외국에 알린 조지 오글 목사나 짐 시너트 신부는 추방되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메리 컬린스 선교사와 같은 사람이 군부 독재에 반대해 민주화운동에 참여했고, 루츠 드레셔 신부는 상계동 철거 반대운동을 벌이며 도시빈민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외국인 활동가의 양상은 조금 변했다. 선교나 봉사를 목적으로 한국을 찾았다가 한국 사회의 문제를 발견하고 운동에 동참하는 '정통 코스'를 밟는 사람이 여전히 주류를 이루지만, 순수하게 한국을 공부하러 왔다가 운동을 시작한 경우도 많아졌다.


"한국 사회에 '희망의 증거' 있다"




마이카 조셉 애들러 씨(〈조선일보〉 통한문제연구소)가 바로 앎이 실천으로 연결된 경우이다. 유태인인 그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대학원에서 한국정치학을 전공했다. '주한미군 범죄에 대한 한국 비정부 조직의 활동'에 관한 연구 논문을 발표한 그는, 실제로 기지촌에서 봉사 활동을 펴고 주한미군 범죄근절운동본부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했다.


그는 "미국인들은 왜 한국 사람이 반미운동을 하는지 모른다. 관심도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무조건 한국 사람의 주장은 비논리적이라고 몰아붙인다. 그런 미국인들의 생각이 더 비논리적이다"라고 지적했다.


일본인 안자코 유카 씨(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는 한국사를 공부하다가 정신대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형태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많은 그녀는 일제의 전시 강제동원 정책을 연구했다. 고려대 한국사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하던 그녀는 정신대 문제를 접한 뒤부터 연구와 자원봉사 활동을 병행했다. 정신대 할머니 보호 시설인 나눔의집에서 봉사 활동을 시작하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을 건립하는 데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는 일을 도왔다.


"전쟁 피해에 대한 일본의 사죄·진상 규명·보상·교육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그녀는, 5월 말에 열릴 역사학 대회에서 역사 교과서 왜곡과 관련해 일본 역사학계를 비판하는 패널로 참가할 예정이다.


다바타 가야 씨는 1980년대 후반 한국 여성운동가들이 일본에서 기생관광 반대운동을 하는 것을 보고 한국의 여성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경우이다. 대학에서 한국어를 배운 그녀는 학교를 졸업하고 '맨날 시위만 하는 나라'에 와서 본격적으로 정신대 문제에 뛰어들었다. 정대협이 일본 여성단체와 연대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운 그녀는 일본에서 정신대 할머니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낮은 목소리〉를 홍보하고 영화기금 모집 사업도 벌였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군기지나 사격장 때문에 동병상련의 고통을 앓고 있는 일본인들은 주한미군 문제에도 관심을 많이 기울이고 있다. 오키나와 출신인 히로유키 씨는 통역·번역 일을 해주며 일본 오키나와와 류큐 주민들이 매향리 주민과 연대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외에도 시민단체에서 통역·번역 자원봉사를 통해 국제 연대 활동을 돕는 외국인은 많다. 환경운동연합에서는 미국인 글렌 해리스 씨와 호주인 머레이 그리피 씨가 국제연대 사업을 돕고 있고, 녹색연합에서는 미국인 마이클 셰이 씨가 통역·번역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이처럼 시민·사회 운동을 펼치는 외국인 활동가들의 모습은 우리 사회에 '희망의 증거'가 있음을 보여준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국제국장을 지낸 김매련(미국 이름 메리언 김)씨는 "한국에서 시민운동을 하는 것은 무척 재미있고 보람이 있다. 한국은 문제가 많지만 해결되는 것도 많다. 한국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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