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공격으로 2백명 몰사"
  • 박병출 부산주재 기자 ()
  • 승인 2001.05.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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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안도섬 피난민 학살 사건 캐는 이춘송씨


지난 4월30일, 민주당 이낙연·배기운, 한나라당 김원웅·신영국 등 여야 의원 8명이 국회에서 간담회를 갖고 진상규명위 설치, 위령탑 건립과 피해자 호적 정리 등 '한국전쟁 민간인 사상자 특별법'을 의원입법으로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이 소식을 접한 이춘송씨(64·부산시 사하구 다대포 몰운대아파트)는 마치 자신의 공이기라도 한 양 남다른 감회에 젖었다. 이씨는 영영 묻힐 뻔한 여수 안도섬 집단 학살 사건을 세상에 알린 사람이다.




1950년 8월2일 여수시 남면 안도섬 이야포 앞바다에 정박 중이던 한 화물선에 피난민 3백50여 명이 타고 있었다. 전쟁 발발 직후 부산으로 몰려든 서울·강원도 지역 피난민 일부가 부산시 공무원들의 주선으로 통영을 거쳐 낙도로 옮겨 간 것이다. 그러나 피난민들은 살 길을 찾기는커녕 이 날 오전 9시께 미군기 편대의 집중 사격을 받고 2백여 명이 몰사했다. 다행히 갑판 물통 뒤에 숨어 화를 면한 이씨는 부모와 어린 동생 세 가족을 눈앞에서 잃었다. 누나와 형 등 삼남매가 살아 남았으나, 누나는 당시의 충격으로 몇 년 뒤 세상을 떠났다.


열두 살에 천애 고아가 된 이씨와 형 대혁씨(당시 15세)는 구두닦이·막노동 등으로 평생 어렵게 살면서도 사건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그가 사건을 밝히기로 결심한 것은 노근리 사건이 보도된 후다.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부산의 한 일간지를 찾아 당시 상황을 소상히 전했는데도 기자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손수 사건을 규명하기로 결심한 이씨는 안도섬을 몇 차례나 방문해 10여 명의 목격자를 찾아 냈다.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서투른 글솜씨로 당시 상황을 소상히 밝히고 증언까지 옮겨 적은 이씨는, 관계 부처에 희생자들의 억울한 사연을 밝혀 달라고 탄원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한결같았다. 경위를 알아보고 조처하겠다는 의례적인 말뿐이었다. 심지어 1999년 12월 국무조정실·국방부·외교통상부의 회신은 받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았다. 우선 노근리 사건의 진상 규명에 노력을 집중하고, 유사 사건은 차후에 사례 별로 검토해 처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씨는 오는 6월 난생 처음 미국에 간다. 자비를 들여서라도 코리아전범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미군의 만행을 알리겠다는 생각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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