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고 '엽기 대학' 서울대
  • 김은남 기자 (ken@e-sisa.co.kr)
  • 승인 2001.06.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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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9명 차출된 사범대 '교육 초토화'…
물리교육과 교수 단 1명, 학생들 '집단소송' 태세


물리가 좋다는 단순한 이유로 서울대 사범대학 물리교육과를 선택한 01학번 장 아무개군(19)은 입학 석 달째를 맞은 이즈음 심각한 회의에 빠져 있다. '이런 대접을 받으려고 서울대를 선택했던가.' 물리교육과 전체를 통틀어 교수가 단 1명. 대입 면접 시험 때를 제외하고 그는 이제껏 지도 교수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생물교육과 교수 2명, 화학교육과 교수 3명, 지구과학교육과 교수 4명. 믿기지 않지만 이것이 국립 서울대의 현주소이다. 장군이 다니고 있는 물리교육과는 상황이 더 심각해 올 초부터 교수 1명이 학부·대학원생 1백57명을 상대해 왔다. 지난해 두뇌한국(BK)21 사업 때문에 소속 교수 5명 중 3명이 자연대로 차출된 데 이어 올해는 남아 있던 두 사람 중 1명이 안식년을 맞았기 때문이다.


채점할 교수 없어 리포트 면제


수업은 당연히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학부생들은 채점할 사람이 없어 리포트를 내지 않아도 되는 '원치 않는 행운'을 누렸고, 대학원생들은 논문을 지도할 교수가 없어 애를 태웠다. 유일하게 과를 지키며 일곱 강좌를 뛰던 64세 노교수는 지난 4월 과로로 쓰러졌다.


참다 못한 학생들은 최근 이기준 총장을 상대로 집단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1년간 교수 충원을 줄기차게 요구해 왔는데도 학교 당국이 불성실한 태도로 일관하며 자신들의 '교육받을 권리'를 침해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학생들이 수업권 침해를 이유로 대학 당국을 재판정에 세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학생들 말마따나, 또는 지난 5월29일 사상 초유의 집단 성명을 발표한 사범대 교수들의 말마따나 이같은 수업권 침해는 '사범대에 대한 홀대'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BK21로 인해 소속 교수 9명을 다른 단과 대학에 빼앗긴 데 이어, 최근 자신들이 추천한 신규 임용 후보 3명 전원에 대해서마저 대학 당국이 부결권을 행사하자 사범대 교수들은 매우 격앙했다. '선생 길러내는 백면서생'을 자처해 오던 교수들의 입에서 "힘 없는 단과대라고 무시하는 거냐" "사범대 씨를 말리려는 수작이다" 같은 막말이 서슴지 않고 튀어나온다.


그렇지만 학생들이 수업권을 침해받는 것이 오늘날 서울대 사범대학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김영삼 정부의 5·31 교육 개혁 이래, 더 직접적으로는 현정권 들어 BK21 사업이 본격화한 이래 전국 어느 대학에서나 '돈 안되는' 학문은 홀대받는다.




준비 없이 강행된 학부제는 학생들의 학습 환경을 더욱 악화시켰다. 학부제 실시 이후 강의가 대형화하면서 교수·학생 간의 커뮤니케이션은커녕 출석 점검조차 제대로 못한다고 서울대 인문대학의 한 교수는 고충을 토로했다.


학생들의 전공 선택권을 넓혀주기 위해 학부제를 도입한다던 애초 취지와 달리 전공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기 학과에 학생이 몰리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서울대를 포함한 대부분의 대학은 성적 순으로 전공 인원을 제한해 뽑고 있다. 때문에 이들 대학에서는 원하는 전공을 배정받기 위해 1년치 등록금을 다시 내고 이미 들은 과목을 재수강하는 '전공 재수생'까지 등장했다.


지난해 부산대에서는 학생 2명이 학교를 상대로 행정 소송을 제기한 일이 있었다. 이 학교 건축·도시공학과군에 합격한 학생들이 전공을 배정할 때 건축공학과를 지원했으나 학점이 나쁘다는 이유로 탈락하자 이에 불복해 소송을 낸 것이었다. 비록 학생들이 패소했다고는 하지만 대학들은 유사한 소송이 자기 학교에서도 발생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2002년 입시부터 모집 단위를 광역화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학부제를 실시할 예정인 서울대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 모집 단위 광역화란 학과별 모집을 완전히 없애고 단과대 별로 신입생을 선발하는 제도. 이 제도를 실시하게 되면 전공을 선택할 때 학생들이 특정 인기 학과에 몰리는 현상이 더욱 심해져 인문·사회·자연 등 기초 학문은 도태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 해당 분야 교수들의 지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물리교육과 학생들이 집단 소송을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학생들이 수업권을 침해받게 된 데는 1차적으로 교육부와 대학 당국의 책임이 크다. 교육부는 학문의 장기·균형 발전에 대한 마스터플랜 없이 '경쟁력 없는 학과나 교수는 무조건 퇴출'이라는 식으로 대학 구조 조정을 밀어붙였다.


'힘 없는 단과 대학'에만 고통 강요


지원금에 목마른 대학 당국은 여기에 끌려 다니며 코앞의 대책을 세우는 데만 몰두했다. 그나마 일관성도 없었다. 학부제가 처음 논의될 때만 해도 서울대는 의대·법대·경영대 학부를 폐지한다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내걸었다. 이들 단과 대학을 전문 대학원으로 발전시키되 인문·사회·자연 계열 학부와 대학원은 학부제로 재편하겠다는 것이 학교측의 공언이었다. 그러나 시행 과정에서 전문 대학원 설립안은 슬그머니 후퇴해 버리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대학 당국은 '힘 없는' 단과 대학에만 고통 분담을 강요한 꼴이 되었다.


교수 또한 학생들의 버팀목이 되지 못했다. 성명서를 발표한 사범대 교수들은 학교측이 행정 절차도 제대로 거치지 않고 독단적으로 사범대 교수들을 BK21 사업에 차출했다고 비판했다. 그렇지만 서울대 내부 관행에 비추어 해당 학과나 단과 대학의 동의 없이 교수들이 자리를 옮기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 한 보직 교수의 지적이다. 교수 9명이 한꺼번에 빠져 나가면 수업에 파행이 빚어질 것이 뻔한데도 학과를 떠난 교수나, 이를 방치한 교수나 학생 위주로 사고하지 않은 것은 매한가지라고 그는 비판했다.


혼란의 최대 피해자는 학생일 수밖에 없다.'수용자 중심의 교육 개혁'이라는 구호가 무색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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