짓밟히던 개미 군단 '주식 반란' 꾀한다
  • 김은남 기자 (ken@e-sisa.co.kr)
  • 승인 2001.06.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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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증권사관학교' 입교, 실력 키우기 열풍


직업 군인이었던 손 아무개씨가 '사관 생도'로 변신한 것은 석 달 전이었다. 손씨가 선택한 것은 육해공군 사관학교가 아니다. 이른바 증권사관학교이다. 군인 생활 10년간 모은 알토란 같은 돈 1억원을 주식으로 몽땅 날린 뒤 그는 이곳 입소를 결심했다. 지난 4월 초 전역 절차를 마친 그는 가족에게 다음과 같은 메모만 남겨놓고 가출해 서울로 올라왔다. '반드시 성공해서 돌아오겠음.'


1주일 수업료 300만원, 개강 2주 전에 예약 끝나




손씨 같은 '개미'(일반 투자자)들을 상대하는 사설 증권 투자 교육기관이 올 들어 하나 둘 생겨나고 있다. 데이트레이딩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학원이 있는가 하면, 초보자를 위해 장기적이고 전반적인 분석 기법을 교육하는 학원도 있다.


1주일 코스 수업료가 50만∼1백50만 원으로 결코 녹록치 않은데도 이들 학원은 몰려드는 개미떼로 문전성시이다. 이른바 VIP 코스를 운영하는 한 학원의 경우 강의 시작 2주 전쯤이면 예약이 거의 끝나 버린다. 사이버 애널리스트로 잘 알려진 재야 '고수'들이 맨투맨으로 붙어 투자자의 잘못된 투자 기법을 교정해 준다는 이 코스는, 주당 강의료가 무려 3백만원이다.


개미들의 향학열은 증권가에 새로운 바람을 예고하고 있다. "지난 1∼2년 사이 주가 대폭락을 경험하며 개미들의 의식이 바뀌고 있다. 이제 이들은 더 이상 앉아서 당하지만은 않으려 한다"라고 '고수사관학교'를 운영하는 (주)인베스트스팟 김항기 사장은 말했다.


한경와우TV 증권사관학교를 운영하는 (주)디올텍 하진태 이사는 이를 '개미들의 반란'이라고 정의했다. 홈트레이딩 시스템(HTS)이 도입되어 사이버 거래가 열린 것이 제1차 증시 혁명이었다면, 최근 일어난 개미들의 반란은 제2차 혁명을 예고한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실제로 학원을 찾는 수강생 가운데 70∼80%는 증시에서 한두 번 크게 '덴' 경험을 갖고 있다. 원금이 '반 토막'되거나 '4분의 1토막'된 정도라면 명함을 꺼낼 처지가 못 된다. 한 전직 중소기업 사장은 "8이 5가 되어 버렸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8, 5란 8천만원→5천만원이 아니다. 8억원→5천만원이다. 자영업을 한다는 30대 남성은 지난해 초단타 매매에 맛을 들였다가 화장실에서 졸도한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초 단위로 피를 말리는 긴장 상황이 연속된 데다 돈을 잃은 충격이 겹치자 정신을 잃은 것이다.


이들은 심기일전의 자세로 학원을 찾는다. 올 초 명예 퇴직을 했다는 50대 남성은 "'악'소리 한번 못 내보고 당한 것이 너무나 억울해 공부하기로 결심했다"라고 말했다. '이런 데 다니는 것을 남편이 알면 큰일난다'는 50대 여성은 열심히 공부해 남편 몰래 잃은 돈을 반드시 되찾겠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피해를 본 투자자만이 학원을 찾는 것은 아니다. 주식으로 제법 재미를 보았다는 30대 여성은 증권사 직원이 하라는 대로만 따라 하는 것이 성에 차지 않아 직접 공부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실물 경제를 익혀야 한다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이곳을 찾은 대학 신입생도 있었다. 여의도에서 근무하는 30대 초반 직장인은 전업 투자자로 변신할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한 달간 직장에 휴직계를 내고 학원에 다니려 한다고 말했다.


목표 의식이 뚜렷한 만큼 학원을 선택한 개미들은 아침 8시30분부터 저녁 10시까지 사관생도 못지 않게 빡빡한 일정을 감수한다(학원 중 상당수가 정예 투자자를 길러낸다는 의미에서 '∼사관학교'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이들의 수업 시간은 웬만한 대학 강의실보다 진지하다. 주식종합반을 운영하는 고수사관학교를 기자가 찾아간 지난 6월5일. 수강생 20여 명은 각자 자기 앞에 높인 컴퓨터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때마침 이들 수강생이 종목 분석을 통해 당일 추천 종목으로 선택한 △△건설 주가가 가파르게 치솟고 있었다.


오후 2시38분 이 종목이 마침내 상한가를 쳤다.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누가 제일 많이 벌었어? 오늘 저녁 짜장면 내." 들뜬 수강생들은 강사에게도 질문을 퍼부었다. "어떡할까요, 선생님. 지금 팔까요?" 강사는 여유 있게 대답했다. "지금 거래량이 바닥이니까 괜찮을 거에요. 그래도 불안한 사람은 파세요." 그런데 이게 웬일. 강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가 차트가 파란색 음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급전 직하한 주가는 2시48분 급기야 바닥으로 떨어졌다. 수강생들은 충격에 휩싸인 듯 말을 잃었다.


"우리가 당했다." 한참 만에 한 수강생이 침통하게 말했다. "정말 엽기적인 장이야." "어떡해, 나는 몰빵(한 종목에 몰아서 투자하는 것) 쳤는데…." 수강생들이 여기저기서 수군대자 강사가 수습에 나섰다. "자, 오늘 여러분은 10분 사이에 천국과 지옥을 넘나들었습니다."


강사 체면이 말이 아닐 텐데도 수강생들은 그를 원망하는 기색이 없다. 대신 이들은 작전 세력에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 "개미들의 패는 뻔히 노출돼 있다니까." "(작전) 세력의 깊은 뜻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 죽일 ×들." 수업이 끝난 뒤에도 삼삼오오 이들의 대화는 이어진다. 화제는 오직 주식뿐이다. "오늘 상황을 한번 더 분석해 보자구." 누군가 제안하자 이들은 우르르 주식 차트 앞으로 몰려든다.


"차트 보는 법과 손절매 배운 것에 만족"


이들 사설 학원이 한계를 안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한 증권사 직원은 "그렇게 투자 기법에 빠삭하면 자기네나 수익을 올릴 일이지, 뭐하러 그 아까운 걸 가르쳐 주겠다는 거냐"라고 비아냥댔다. 그렇지만 한 수강생은 "주식 차트 보는 법을 익히고, 손절매를 배운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라고 말했다.


지난날 그는 장기 보유가 능사인 줄 알았다고 했다. 주가가 떨어져도 '언젠가는 오르겠거니' 하고 움켜쥐고 있었다. 그러나 공부를 시작한 뒤 그는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주식을 파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그가 거래했던 증권사 중 그에게 이런 것을 가르쳐 준 곳은 없었다.


수강생 중 간혹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많은 이도 있다. 강사가 찍어 주는 추천 종목을 노리고 학원에 다니는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이라면 전문 투자자에게 자금을 맡기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라고 이 아무개씨는 말했다. 선풍수가 사람 잡는다고, 설풋 배운 지식으로 투자를 시도했다가 더 큰 돈을 날린 수강생도 여럿 있었다는 것이다.


대구에서 올라왔다는 강 아무개씨(47)는 공부를 통해 자신의 잘못된 투자 습관을 교정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안정된 종목에 종자돈을 100% 털어넣는 투자 습관을 갖고 있었다. 그 결과 확실하게 '감'이 오는 종목이 나타났을 때 '실탄'이 없어 속수무책이었다. 무차별 포격을 퍼붓는 것이 아니라 목표물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을 때 정확하게 한 발 당기기, 이것이 그가 요즘 훈련하는 투자 기법이다.


'묻지마 투자' 대신 이론적 지식과 정확한 시황 분석에 근거해 투자를 시도하려는 개인 투자자가 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증시를 발전시키고 이끌어갈 주인공은 누가 뭐라고 해도 개미 군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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