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선언의 열매는 달지 않았다"/공익 제보자 5명
  • 고재열 기자 (scoop@e-sisa.co.kr)
  • 승인 2001.06.2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익 제보자 보호' 법안 상정 계기로 들어본
'내부 비리 고발자'들의 항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문제를 외부에 알리는 것을 현명한 처세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적절히 세상과 타협해서 살아 가기를 권한다.




공익 제보자들은 이런 '비리의 카르텔' 문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직의 쓴맛'을 감내하면서까지 자신이 속한 조직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람들이다.


이번 임시국회에 상정되는 민주당의 부패방지법안에는 '공익 제보자 보호'에 관한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시사저널〉은 1990년대에 파장을 일으킨 공익 제보자 5명을 한 자리에 모아 그들의 내부 고발 내용과 고발하게 된 계기, 그리고 내부 비리 폭로자 보호를 위해 필요한 법적·제도적 장치에 대한 견해를 들어 보았다.


이 자리에는 1990년 감사원의 감사 비리(재벌의 비업무용 토지 감사가 외압에 의해 중단된 사실)를 언론에 알린 이문옥씨, 1992년 군 부재자 투표 부정을 고발한 이지문씨, 1997년 LG전자 직원으로서 사내 비리를 제보한 정국정씨, 1998년 철도청 검수원으로서 정비의 문제점을 알린 황하일씨, 1999년 인천신공항 여객 터미널 부실 공사 문제점을 양심 선언한 정태원씨가 참석했다.


자신의 양심에 충실했던 대가로 이문옥씨와 이지문씨는 구속을, 황하일씨는 파면을, 정국정씨는 해고를 당했으며 정태원씨는 직장을 그만두었다. 사회는 참여연대 공익제보지원단 우필호 간사가 맡았다.


이문옥 민주노동당 부대표




1990년 재벌의 땅 투기에 대한 감사원 감사가 외부 압력에 의해 중단되었다고 양심 선언을 했다. 우리나라 역사상 부동산 값이 최고로 폭등하던 때로, 매월 부동산 투기억제 대책이 발표되던 때였다. 전세 보증금을 마련하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내 양심 선언을 통해 감사원 기능을 마비시킨 세력이 무엇인지, 로비는 누가 어떻게 했는지, 고위층에 돈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따위가 조사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것은 조사되지 않고 나만 기밀누설죄로 구속되었다. 6년 동안 법정 투쟁을 거친 후에야 무죄 판결을 받고 복직할 수 있었다. 나중에 정부는 면죄부라도 주려는 듯 녹조근조훈장을 수여했다. 하지만 내가 거부했다.


감사원 비리를 알리기 전까지 나는 평범한 공무원이었다. 5백70만원을 내고 〈한겨레신문〉 주주로 참여한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외도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양심 선언 후에 감사원에서 파면되고 감옥에도 가고 법정 투쟁을 6년간 벌이면서 '거리의 투사'가 되었다.


그러나 밖에서는 스타 대접을 받았지만 변화된 상황에 잘 적응되지 않는 측면도 있었다. 감사원 직원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양심 선언 이후에는 이웃의 초등학생들도 인사를 하지 않았다. 집사람이 특히 힘들어 했는데, 누가 테러하면 소리라도 지르겠다며 나를 종종 따라다녔다.


이번 임시국회에서 부패방지법안이 통과되도록 6개월 동안 정신 없이 뛰어다녔다. 정치인들은 공익 제보자 보호 조항에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다. 한 여당 의원이 〈아줌마〉라는 드라마에서 허위로 양심 선언을 하는 장진구를 들먹이며 우리를 비아냥거릴 때는 피가 거꾸로 솟기도 했다. 늦게나마 법이 제정되어 후배 공익 제보자들이 더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이지문 내부고발연구센터 소장




보병 9사단 소대장으로 복무하고 있던 1992년 군 부재자 투표 부정에 대해 양심 선언을 했다. 14대 총선을 앞두고 지휘관들이 여당을 지지하도록 정신 교육을 하고 투표 당일 공개 투표를 하는 등 부정을 자행했다. 이런 선거 부정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에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군 부정 투표를 폭로했다.


그러자 군에서는 나를 무단이탈죄로 구속하고 이등병으로 강등해 파면했다. 군 기무사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사회에 나가서 얼마나 똑바로 사는지 계속 지켜보겠다'고 협박했다. 한 수사관은 "한번 제대로 손봐주고 싶은데 언론에 너무 많이 알려졌다"라며 아쉬워했다.


3년 재판 끝에 대법원에서 파면 취소 처분을 받아내고 원래 계급인 중위로 명예 전역했다. 각계에서 석방을 위한 서명운동을 해주고 무료 변론을 해준 덕이었다. 나는 운이 좋았지만 내부 고발자 중에는 자신의 행위로 인해 감옥에서, 황량한 거리에서 괴로워하는 사람이 많다. 작년에는 억울해서 끝내 자살한 사람까지 있었다.


아쉬운 점이 많지만 이번에 상정된 부패방지법에 '공익 제보자 보호'에 관한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내부 고발자들이 설 땅이 조금은 단단해졌다고 할 수 있다. 법제화와 함께 이제 건전한 고발과 정당한 신고에 대해 고자질 또는 밀고로, 혹은 조직에 대한 배신, 배반으로 생각하는 풍토를 개선하는 작업도 필요하다고 본다.


정국정 LG전자 사원




1997년 1월 컴퓨터 고객 지원실에서 대리로 근무할 때 직장 상사가 컴퓨터 부품을 특정 업체로부터 터무니없이 비싼 값으로 구매하는 것을 회사 감사팀에 제보했다. 고민 고민했지만 감사팀에서 비밀을 지켜주고 인사상 불이익이 가해지면 전보 조처까지 해준다는 확답을 받고 제보했다.


제보 내용은 사실로 밝혀졌고 담당자는 징계되었다. 회사는 해당 업체로부터 약 1억원의 보상을 받았다. 그러나 징계당한 부서 책임자들이 집요하게 추적해서 내가 고발자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때부터 이른바 '직장내 왕따'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아슬아슬한 점수 차이로 승진에서 누락시키는 '은따'(은근한 따돌림)가 행해졌다. 1998년과 1999년 연거푸 승진에서 탈락했다. 1999년 3월부터는 본격적인 왕따가 시작되었는데, 대기 발령을 내고 강제 퇴직을 종용했다. 사물함과 책·걸상을 회수하고 심지어 회사 e메일 ID까지 회수했으며, 매일 창가에 서 있게 만들었다. 동료들 앞에서 나에게 '저 친구는 밥벌레다'라고 욕하기도 했고, 팀원들에게 '왕따 메일'을 발송해 따돌림을 부추기기도 했다.


대기 발령을 받고 회사에서 온갖 설움을 당했지만 이런 보복 조처는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었다. 그러나 해고하기 위해 계속 꼬투리를 잡더니, 무단 외출한 것으로 거짓 보고하여 2000년 2월1일 징계 해고했다.


복직 투쟁을 벌이던 중 다행히 2000년 7월20일 노동계 최초로 '왕따'로 인한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대한 산업재해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내부 비리 폭로를 별로 권하고 싶지 않다. 내부 고발자를 보호하는 제도적 장치가 아직 미흡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소송이 진행되고 있지만 회사에 돌아갈 수 있을지 아직 불확실하다.


황하일 철도노동조합 정책국장




철도청 검수원으로 서울동차사무소(현 용산차량기지)에서 열차 정비 업무를 맡았다. 1998년 새로 도입한 열차(도시통근형 열차)에 대한 제작사의 하자 보수 회피와 축상발열으로 인해 열차가 탈선할 위험성, 열차 땜질 정비 문제를 제기했다.


이런 문제는 수십 년 동안 관행처럼 있었던 일이었다. 공식·비공식 경로를 통해 끊임없이 시정을 요구했지만 개선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98년 6월과 12월 사이에 축상발열(바퀴 축에서 심하게 열이 발생해 열차 탈선으로 이어지는 중대 고장)이 계속 발생하고 이에 대한 조처가 미봉책으로 일관되자 이 내용을 언론에 제보했다. 보도가 나가자 현장 직원들은 대다수가 '잘 했다' '시원하다'며 격려했다.


그러나 직원 조회에서 '반조직적 행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협박성 발언을 들었다. 이후 철도청 본청의 특별 감사가 실시되더니 1999년 4월28일자로 제보와 관련된 동료 직원 3명과 함께 파면당했다. 약 2주간 항의 농성을 하며 저항했으나 사용자와 한편인 노조마저 우리를 외면했다.


파면된 다른 2명과 함께 1999년 5월2일부터 12월 말까지 서울역 광장에서 항의 농성을 벌였다. 다행히 언론이 우리의 사연을 중점적으로 다루었고, 이어 복직 재판에서 승소했다. 고등법원은 1심 판결을 정면으로 뒤집으면서 '공익 제보자에 대한 부당한 징계'로 규정하고 우리의 손을 들어 주었다.


우리의 제보는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 이처럼 큰 일이 벌어질 줄 미처 몰랐다. 어느 날 갑자기 특별한 인생이 되어 버렸다. 일상적이고 소시민적인 가족의 생활을 잃었다.


정태원 경실련 공공사업감시단 간사




단군 이래 최대 역사라는 인천 신공항 건설 현장에 감리사로 참여했다. 개인적으로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현장에 갔더니 감리를 위한 기본 측정 도구도 주지 않고 심지어 도면도 보여주지 않았다.


최고의 현장에서 최악의 부실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신공항 건설은 각종 부실 공사와 부조리로 얼룩져 있었다. 그것을 고쳐 보고자 3년 동안 온갖 노력을 했지만 허사였다. 적발하면 오히려 내가 징계를 당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비리에 연루된 부하 직원이 현장에서 목을 매고 자살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부실 증거를 모으기 시작했다. 부실의 발생 원인, 전개 과정, 결과까지 전과정에 대한 증거를 확보했다. 2000년 6월30일 부실 상태로 준공식을 치르려고 하자 이를 시정하기 위해 부실 공사를 폭로했다.


속은 후련했지만 그 덕에 밥줄이 끊겼다. 평생을 업으로 삼았던 건설계에는 이제 얼씬할 수도 없게 되었다. 평소에 불의한 이익을 멀리하려고 한 까닭에 그동안 모아 놓은 돈도 별로 없어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컸다. 초등학생 자녀가 둘 있는데 다니던 학원을 전부 끊어야 했다. 심지어 '경실련 간사가 되려고 그랬다'는 악성 유언비어에도 시달렸다. 참고로 경실련 간사가 된 뒤로 월급이 전보다 4분의 1로 줄었다.




개인적으로 내부 비리 고발자의 신변 보호 문제가 중요하다고 본다. 나의 경우 테러가 두려워서 처음 한 달 동안은 경실련 간사의 집에서 묵었다. 나의 폭로로 인해 손해를 본 건설업체 관계자들은 청부 테러라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지금도 항상 조심하고 있고, 예상 용의자를 정리해서 보관해 놓고 있다.


양심 선언을 한 것을 후회한 적은 없다. 하지만 성과에 대해서는 회의가 든다. 나는 양적·질적으로 훌륭한 근거와 함께 문제점을 제시했다. 그러한 근거를 가지고 국가가 그 문제를 올바르게 풀어낼 줄 알았다. 그러나 정부는 그런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