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사관의 '주전야독' 전후방이 따로 없다
  • 정희상 기자 (hschung@e-sisa.co.kr)
  • 승인 2001.07.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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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군의 허리' 개혁…학력 높이고 고급 임무 맡겨


종일 산악 행군과 공수 훈련을 마친 일단의 군인들이 부대 한켠에 자리 잡은 건물로 삼삼오오 책보따리를 들고 들어선다. 이들이 교실을 채운 뒤, 반장이 공수부대원답게 차렷과 경례를 우렁차게 외치자 민간인 복장을 한 교수가 화들짝 놀랐다가 분필을 든다. 수업이 진행되자 종일 고된 훈련을 받은 탓인지 졸음을 쫓기 위해 기를 쓰는 군인들의 모습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20대 초반 하사에서부터 40대 후반 상사까지, 땀에 전 복장에 구릿빗 얼굴을 한 이 학생들의 계급과 나이는 다양하다.




고졸 부사관들의 향학열 : 특전사 귀성부대 내에 설치된 부천 대학 귀성분교에서는 부사관 1백40여 명이 낮에는 전투 훈련, 밤에는 대학 교육을 받느라고 구슬 땀을 흘리고 있다.


지난 6월21일 경기도 부천에 있는 특전사 귀성부대 부사관들의 저녁 일과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부천대학이 이 부대 안에 분교를 개설한 지 3년째. 벌써 1회 수료생 20명을 배출했고, 요즘은 1·2학년 1백40여명이 주전야독(晝戰夜讀)에 여념이 없다.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1학년 이상규 상사를 인터뷰했다. 올해 42세인 그는 1980년 하사 계급장을 단 이래 21년간 귀신 잡는다는 특전사 귀성부대에서 줄곧 잔뼈가 굵었다. 늦깎이 대학생이 된 이유를 묻자 다부진 몸매의 특전 부사관답지 않게 쑥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새로 들어오는 부사관들의 학력이 전문대 수준이어서, 나이 든 부사관도 이제는 배워야만 부대와 후배를 제대로 관리할 수 있겠다는 절박감에서, 대학 공부를 지원했다." 부대 통신정비실에서 근무하기 때문에 정보통신과를 택한 이상사는 기초 전자와 데이터 통신에 관련된 민간 정보기술(IT) 분야의 흐름까지 파악할 수 있어서 실전 적용에도 큰 도움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주변의 시선이 달라져 배우는 재미가 각별하다고 한다. 예전에는 야간 훈련이 없는 날 동료들과 술을 마시거나 고스톱을 치며 보낸 적이 많았지만, 대학생이 된 뒤부터는 중3짜리 딸과 공부방에서 같이 보낸다. 아내는 물론 주위 사람들이 이상사의 변화를 기쁘게 받아들여 자긍심을 느낀다고 한다.


가난 때문에 고교 졸업 후 특전사에 지원했다는 2년차 김선민 하사(24)는 한때 경원했던 대학생 친구들과도 요즘은 자주 술자리를 갖는다. 사병으로 제대한 친구들이 대개 3학년에 복학해 말이 통한다. 학업을 마치면 '부사관=가난과 저학력'이라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자신있게 군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크다.


부사관들의 향학열은 이곳 귀성부대에서만 높은 것이 아니다. 군 조직의 허리로서 부대의 안살림을 떠맡고 있는 부사관들이 전후방 곳곳에서 대학 공부에 여념이 없다. 그들은 요즘 전방 부대 인근에 있는 전문대와 4년제 대학 분교에서 밤을 밝힌다. 지난해에는 부사관 9백명이 대학이나 전문대학을 졸업했고, 올해는 1천5백명이 선발되어 전문대·대학·대학원에서 위탁 교육을 받고 있다. 군당국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관들에게만 혜택을 주다가 2년 전부터 부사관까지로 위탁 교육 기회를 확대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군 조직 병들게 했던 '하사관 홀대'




사관(장교)보다 아래라는 뜻인 하사관이라는 말은 일제 시대의 유산이다. 그래서인지 하사관은 그동안 장교를 시중하고 보좌하며, 장교의 지시를 받아 단순 잡무를 처리하거나 병사와 장교의 단순 교량 역할을 맡는 직업 군인으로 인식되었다. 일본은 이미 명칭부터가 사기를 떨어뜨린다며 조(組) 또는 조장(組長)으로 바꾸었지만 국군은 지금까지 하사관이라는 이름을 고집해 왔다. 이런 실정이다 보니 군 내부는 물론 사회에서도 어느 사이엔가 하사관은 가난한 저학력자가 지망하는 직업이라는 생각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하사관에 대한 이런 인식이 군 발전에 장애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졌다. 사병의 80% 이상이 대학 재학 이상의 학력을 가진 상황에서 대부분 중고교 졸업자인 하사관이 이들과 정서적 일체감을 갖고 지휘할 수 있기를 기대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5만여 장교와, 똑같은 숫자의 하사관으로 이루어진 직업 군인 조직에서, 하사관에 대한 상대적인 홀대도 군 조직 전체를 병들게 했다. 그동안 누적된 하사관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국방부는 수당 인상이라든지 복지 혜택 확대 등 땜질 정책으로만 대응했다. 하사관들이 가장 갈망하는 근본적인 변화, 즉 자질 향상을 위한 투자와 역할 및 위상 제고는 늘 뒷전으로 밀렸다.


국방 당국은 뒤늦게 그같은 하사관 정책이 군 조직 전체를 낙후시키는 중요 요인이 된다고 보고 하사관 제도를 대대적으로 수술했다. 1998년 육군본부는 하사관 종합발전계획을 마련해 이름부터 부사관으로 바꾸었다. 아울러 부사관 자원을 장기적으로 전문대졸 이상 학력자로 바꾸고, 장교에 버금가는 권한과 책임을 부여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최근 전후방 곳곳에 몰아닥친 부사관 교육 열풍도 그런 정책이 가져온 변화이다. 육군본부는 부사관제도 개혁을 위해 창군 이래 처음으로 부사관만을 전담하는 부사관제도과를 신설하기도 했다. 현재 부사관 제도과장을 맡고 있는 신영진 대령은 "군 조직에서 부사관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도 그동안 제 역할을 부여하지 않아 군의 발전을 가로막았다고 분석해, 이제부터라도 부사관을 군 발전의 주체이자 한 축으로 세워야 한다는 절박성을 가지고 장기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미국 고교생이 선망하는 '미국식 부사관'이 모델


현재 육군이 모델로 삼는 부사관제도는 미국식이다. 미군은 부사관 요원을 선발할 때부터 장교에 못지 않은 우수한 자질을 요구한다. 또 부대 업무에 관한 책임과 권한이 명백해, 전장에서 장교는 판단과 계획 수립만 할 뿐 나머지 병력 이동과 전투 현장의 모든 실무 지휘는 부사관이 담당한다. 미군 원사급은 학사 학위 이상의 학력을 가져야 하며 미군 지휘참모대학을 수료해야 한다. 미군의 드릴 서전트(훈련 전문 부사관)는 위상과 역할이 존중받기 때문에 미국 고교생들이 선망하는 장래 직업 가운데 하나이다.




육군본부의 꿈은 바로 이같은 미국식 부사관제도를 정착시키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군당국은 부사관이 수행하던 보조 잡무 대신 병사·인사·행정 전반과 부대 관리 전권을 주고 책임을 지우는 방식으로 제도를 개편했다. 장교(중대장)가 수행해 오던 병사들의 외출 외박과 휴가, 교육 및 신상 파악을 통한 사고 방지 권한과 책임을 부사관에게 이전한 것이다. 또 훈련부사관제를 신설해 신규 입대 사병에 대한 훈련도 맡길 방침이다. 육군은 모든 부대에 훈련부사관제를 도입하기로 하고 현재 전북 여산에 있는 부사관학교에 훈련부사관 교육 과정을 신설했다. 여기서는 선발된 요원들을 10주간 특별 교육해 전 군에 내보내고 있다.


최근 훈련부사관 교육을 마치고 백마부대 병사들의 훈련을 맡고 있는 김동현 상사(34)는 "15년간 부사관 생활을 했지만 이 교육 과정을 이수하면서 군대와 인생을 보는 사고틀이 완전히 변했다"라고 말했다. 과거에는 오기와 군인 정신만 강조했는데, 병사들의 인격을 존중하는 신병 교육과 전투력 향상을 위한 전문 교육을 받은 덕분에, 군에 대한 사회의 첫 인식이 자기의 어깨에 달려 있다는 부담과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백마부대 박순국 주임원사(54)는 "훈련부사관 교육을 마친 김동현 상사가 맡은 병사들의 사기와 전투 능력이 사단 내 일반 부대 병사보다 월등히 낫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라고 말했다.


이런 작은 변화들 덕분인지 최근 새로 지원하는 부사관은 교육 수준이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 한 해 지원자 중 전문대 졸업자(56%)가 고졸자(44%)를 앞서기 시작한 것이다.


육군은 또 장기적으로 모든 소대장 요원을 장교에서 부사관으로 교체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부대 별로 시범 운영에 들어갔다. 2년 전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부사관이 소대장을 맡아 병사를 지휘하는 부대가 곳곳에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결국 이대로 가다가는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부사관 자신들의 위기 의식과, 군 조직의 허리가 중병에 걸렸다는 국방부의 자가 진단이 결합해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는 셈이다. 군당국의 부사관제도 개혁 정책에 대해 대다수 부사관은 늦었지만 환영한다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좀더 지켜보겠다고 한다. 너무 오랜 세월 설움만 받고 살아왔다고 느끼는 고참 부사관들 사이에서 특히 이런 유보적 태도가 강하다. 30년간 전방 사단에서 근무하고 있는 한 상사는 "1960년대 하사관들의 가장 절실한 요구는 임금 인상이었지만, 임금이 별로 오르지 않았어도 1970년대 이후부터는 인간다운 대접을 해달라는 것으로 바뀌었다"라고 말했다. 요즘도 간부 교육장에 나가면 부사관 자리에 놓인 종이·연필·가방 따위가 장교들 것보다 확연히 질이 낮은데 인격적 대우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겠느냐는 볼멘 항변이다.


물론 오랜 세월 뿌리 깊은 푸대접에 불만이 누적된 고참 부사관들이지만, 이들도 현재 국방당국이 설정한 부사관제도가 큰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는 점은 인정한다. 아울러 이들은 부사관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인식을 바로잡아야 군 허리층의 사기가 높아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해 이들은 대통령이 부사관학교 졸업식장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은 지난 역사를 설움의 상징으로 거론한다. 그동안 대통령이 사관학교는 물론 국립대·사립대 그리고 여자 대학 졸업식장에 참석했지만 부사관학교는 외면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부사관에 대한 사회 인식 변화를 유도하는 의미에서도 군통수권자인 김대중 대통령이 임기 안에 부사관학교 졸업식장을 반드시 방문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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