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청학동, '떴다방 서당' 기승
  • 박병출 부산주재기자 ()
  • 승인 2001.07.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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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캠프로 인기 끌자 시설·자격 미달 서당 난립…
식당 등 임차해 '한철 장사' 하는 곳도


'도인촌'으로 유명한 지리산 청학동이 달라지고 있다. 요란한 굴삭기 소리에 골짜기가 파헤쳐지고,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어깨를 맞댔던 자리에 대형 건축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진입로와 골목 곳곳은 간판으로 뒤덮였다. 여느 관광지와 다른 모습이라면, 간판이 하나같이 'OO서당' 'OO학당'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전체 가구 40호 남짓한 청학동에 10개가 넘는 서당이 자리 잡아, 한 집 건너 상점, 한 집 건너 서당이다. 조만간 문을 열 서당도 두세 곳이 더 있다. 살던 집을 대충 손보아 간판을 다는 경우부터 기업형에 이르기까지, 규모도 형태도 다양하다. 예전처럼 댕기머리 늘어뜨린 학동이 눈에 띄는 것도 아니다. 유치 대상은 도시 학생들이다. '방학 특수'에 매달리다 보니 여름철에는 관광 버스 행렬에 온 마을이 북새통을 이룬다. 그 틈에 '무늬만 서당'들이 끼어들고, 환경도 망가져 간다.


청학동은 원래 유불선갱정합일유도(儒彿仙更正合一儒道)라는 종교 공동체 마을이다. 광복 이후 전국에서 모여든 주민은 현대식 교육을 거부한 채 한학을 익히며 조선 시대 생활 방식을 고수해 왔다. 이런 '도인촌'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함께 눈길을 끈 곳이 마을의 유일한 교육기관인 청학서당이다. 효(孝)와 인성을 강조하고 회초리를 때리는 전통적인 교육 방식이 입소문을 탄 이후, 방학 때면 청학서당에 아이를 맡기려는 부모가 줄을 이었다.


"마을을 드나드는 외지인 발길이 잦아지자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났다. 학동이 끊겨 서당을 유지하기 어려운 차에, 방학 동안 자녀를 맡아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또 다녀간 아이들의 생활 습관이나 인사 자세가 달라진 것을 보고 문의해 오는 사람도 많았다." 마을의 한 주민은 청학동이 외부인을 상대로 서당 문을 열게 된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청학동 아닌 곳에 '청학동 서당' 간판 내걸기도


청학서당이 외부 어린이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말이다. 처음에는 마을과 끈이 닿는 도시 주민의 자녀가 방학 동안 며칠씩 머무르다 가는 정도였으나, 1994년부터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방송사가 전국에서 초등학생 30명을 선발해 '청학동 여름 예절 캠프'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내용이 방송을 통해 소개되자 부모들은 '내 아이'도 청학동으로 보내고 싶어 아우성을 쳤다. 자녀 교육을 위해 주민들이 공동으로 운영해 평소에는 7∼8명, 많아야 스무 명 정도 가르친 청학서당이 이들을 다 수용하기는 무리였다. 자연히 '개인 서당'을 차리는 사람이 생겨났다. 서당 10여 곳은 대부분 지난 1∼2년 사이에 문을 열었다. 주로 'OO 청학서당' '청학동 OO학당' 등 '원조'인 청학서당과 비슷한 이름을 내걸고 있지만,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실제로 몇몇 서당은 한학을 공부한 적도 없는 사람들이 운영하거나, 아예 서당을 차리기 위해 이사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천자문도 떼지 못한 사람이 훈장질한다"거나 "망치만 든다고 목수냐"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평소에는 식당이나 상점을 하다가 방학 때면 서당으로 간판을 바꾸는 웃지 못할 경우까지 있다.


지난해 여름방학 때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을 한 서당에 보냈던 김재철씨(41·회사원·부산시 동래구 안락동)는 "청학동이라는 이름만 믿었다가 나중에야 '이상한' 서당에 다녀온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한자 몇 개 정도는 누구나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녀를 굳이 먼 청학동으로 보낼 때는 무엇을 배우기보다는 예절과 전통 문화 등 '정신'을 느끼게 해주려는 것인데, 사기를 당한 심정이었다"라며 분개했다. 그래도 김씨는 덜 억울한 편이다. '청학동 서당'을 다녀가면서도 청학동은 밟아 보지 못하는 어이없는 일도 있다. 이른바 '철(계절) 장사'에 속는 경우다.




방학이 다가오면 서울·부산 등 대도시에서는 '청학동 서당' 광고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상당수는 가짜이다. 기획사나 여행사가 방학 동안 식당이나 주말농장 등을 임차해 서당 간판을 걸고 장사를 하는 것이다. 청학동의 위치는 행정 구역상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이다. 넓게 잡아도 학동과 청학동 두 마을이 '청학동권'일 뿐인데도, 이들은 20㎞ 이상 떨어진 곳까지 청학동으로 둔갑시켜 학동 모집에 나선다. 정체불명의 훈장이 도포 차림으로 등장하는 것을 빼고는 일반적인 물놀이 캠프와 다를 바 없다. 지난해 여름 방학 때 '청학동 서당'에 참가한 5천 명 중 절반 가까이는 이런 '무늬만 서당'에 속고 갔다는 것이 청학동 주민의 주장이다.


방학만 되면 난장판이 벌어지는 것은, 이미 '멸종'하다시피 한 서당 교육에 대한 규정이 교육 관련 법 어디에도 없는 탓이다. 시설이나 자격에 대한 최소한의 규제나 검증조차 거치지 않는다. 간판만 걸면 서당이요, 도포 한 벌만 있으면 훈장으로 변신해 학동을 받을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개선책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1992년부터 방송 활동을 해 온 김봉곤씨(청학동 예절학교)와 〈세상 사람은 나를 보고 웃고 나는 세상을 보고 웃는다〉 등 베스트 셀러를 펴낸 이정석 훈장(명륜학당)의 경우다. 지난해 청학동에서 가장 규모가 큰 현대식 서당을 개설한 두 사람은 청소년 수련원으로 허가를 받았다. 학원 인가를 받자니 숙식 제공이 문제가 되고, 사단법인으로 하자니 참가비를 받는 '수익 사업'이 저촉되어 궁여지책으로 이 방법을 택했다.


"서당특구 만들어 제대로 관리해야"


문제는, 수련원 규모에 못 미치는 작은 서당들이다. 인가를 받자면 청소년 지도사·양호사·영양사·관리자 등 적정 인원과 시설을 갖추어야 한다. 이훈장은 "적용 법 규정이 없다고 방치하는 것보다 제도권으로 끌어들여 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라며 '서당 특구'를 두어 육성 관리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먹고 마시는' 관광특구도 있는데 서당특구를 만들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이다.


김봉곤 훈장 역시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청소년기본법 등에 서당 관련 조항을 신설하고 자격 요건과 규모에 맞추어 수용 인원을 제한한다면, 합리적으로 관리 감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서당 난립에 따른 일부 부작용은 인정하지만, 모처럼 일고 있는 관심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운영 방법 문제는 고쳐 가면서 서당 문화를 확산해 가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여름 방학을 앞두고, '청학동 서당' 학동 모집이 한창이다. 상업주의에 물든 교육의 대안을 기대했다가 '교육이라는 이름의 상술'만 겪고 올 수도 있다. 안전 사고에 무방비인 곳도 적지 않다. 서당 바로 세우기가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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