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민 학살 조사 국방부는 손 떼라"
  • 정희상 기자 (hschung@e-sisa.co.kr)
  • 승인 2001.07.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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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국민 "왜곡·은폐 가능성 크다" 주장


"50년 묵은 체증이 이제야 좀 내려가는 것 같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후퇴하던 경찰에게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간 부친이 주민 2백여 명과 함께 학살된 전북 정읍의 한 유족이 지난 6월27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유족회 행사에 참석해 내뱉은 말이다.




무고한 혈육을 잃고도 입도 벙긋하지 못한 채 살아오다 오랜 회한을 딛고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본 사람이 그만은 아니다. 이 날 전국 각지에서 모인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유족 3백여 명은 이제야 비로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정당한 대접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기대에 들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쟁 전후에 억울한 죽음을 당한 전국의 희생자 유족이 대규모로 한자리에 모인 것은 1960년 4·19 혁명 직후를 제외하고는 이 날이 처음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1960년 전국적으로 유족회를 결성하여 유골 발굴 작업과 함께 진상 규명 운동을 벌였으나 뒤이어 집권한 5·16 쿠데타 세력에게 된서리를 맞았다. 유족과 지방자치단체가 발굴해 지역마다 안장한 피학살자 합동 봉분은 처참하게 파헤쳐져 유실되었으며, 진상 규명 운동을 벌인 유족 대표들은 혁명포고령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줄줄이 감옥에 들어가야 했다. 이후 피학살자 유족에게 닥친 것은 모질고 모진 연좌제의 굴레뿐이었다.


이렇듯 통한의 세월을 살아온 유족이 40여 년 만에 다시 모여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때마침 지난 6월 국회 지하 서고에서는 4·19 혁명 직후 제5대 국회에서 전국 각지에 양민 학살 진상조사반을 파견해 조사했다가 5·16쿠데타 세력이 덮어버린 처참한 현장 기록이 발견되었다.


범국민위, 양민 학살 통합특별법 제정 추진


이런 진전은 지난 10여 년 동안 〈시사저널〉을 비롯한 여러 언론이 한국전쟁 전후에 군경과 미군 등 아군과 우군에 의해 집단 학살된 뒤 철저히 은폐된 민간인 학살 사건들을 발굴해 지속적으로 보도해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 특히 지난해에는 인권·사회 단체도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끝에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범국민위·상임대표 강정구 교수)를 결성해 전국의 유족과 함께 이 문제 해결에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최근 들어서는 국회도 한국전쟁 전후에 자행된 민간인 학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국민 화해와 역사 청산이 공허한 메아리라고 인식하고 지역 별로 의원입법으로 특별법을 제출하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을 하나로 묶어 진상규명 운동에 박차를 가하고, 국회에서 전국 모든 지역의 민간인 학살 문제 해결을 위한 통합특별법을 마련토록 하는 작업이 범국민위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학자·언론인·사회단체 관계자가 모여 지난해 9월 결성한 범국민위는 그동안 한국전쟁 전후 전국 각지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 피해 실태를 조사하고 지역 유족회와 함께 위령제 및 유해 발굴 작업을 펼쳤다. 문경 함평 부산 나주 고양 강화 화순 대전 등지의 민간인 학살 사건이 그 대상이었다. 아울러 지난해와 올해 6·25 기념 주간에는 한국전쟁 종전 이후 처음으로 학계 차원에서 민간인 학살 관련 심포지엄을 열었다. 지난 5월22일에는 국회에서 통합특별법 제정을 위한 공청회를 열기도 했다.


범국민위 김동춘 사무처장(성공회대 교수)은 "좌우익을 막론하고 당시 불법 학살된 피해 대상을 모두 조사해야 하며, 우선 한국 정부의 책임을 규명해야 하고, 통합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라고 이 문제에 접근하는 세 가지 원칙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 범국민위는 전국 유족회(회장 채의진 문경양민학살사건유족회장)와 함께 국회에 통합특별법 청원에 나섰다. 지난해 문경·함평 사건에 대해 헌법소원을 낸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조용환·강금실·백승헌 변호사와 범국민위 소속 장완익 변호사는 최근 국회에 청원할 통합특별법 초안을 완성했다.


특별법 초안을 넘겨받은 국회에서는 한나라당 김원웅 의원이 주도해 '나라와 문화를 생각하는 의원모임' '정치 개혁을 위한 의원모임' 등 여야 의원 모임에서 16대 국회 회기 안에 통합특별법을 제정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 김원웅 의원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문제에 대한 매듭을 풀지 않고서는 국가 이성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인식해 당내 보수 진영을 대변하는 김용갑 의원까지 반드시 설득하겠다는 각오로 통합특별법 제정에 나섰다"라고 밝혔다.


국회와 시민단체가 이처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문제를 공론화하고 나서자 국방부는 이 문제를 더 이상 피할 수 없다고 인식하고 대책 마련에 나섰다.


국방부의 대책은 전쟁 전후 군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 실태를 국방부가 자체 조사하겠다는 것이다. 국방부는 1999년 미군에 의한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이 쟁점으로 떠오른 직후 그동안 〈시사저널〉이 집중 보도한 문경·함평 등지의 민간인 집단 학살 현장을 자체 조사하고, '해원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의 집단 학살 사건에 대한 민원을 접수해 왔다. 현재 국방부가 접수한 민간인 학살 피해 현황은 국군 관련 사건이 19건이고, 미군 관련 사건이 54건이다. 물론 이 내역은 한국전쟁 전후에 벌어진 전국 각지의 집단 학살 사건 중 극히 일부이다.


진실 규명 의지 의심받는 국방부의 '조사 지침'


어쨌든 국방부는 이처럼 피해를 접수한 사건 현장을 중심으로 진상 조사를 벌이겠다는 내부 방침을 세우고 최근 군사편찬연구소를 통해 조사업무 지침서를 만들었다. 이 지침서는 한국전쟁 전후 군사 작전 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인 피해 사건들을 조사하되 '조사 행위가 참전 군인들의 명예를 훼손해서는 안된다'고 전제하고 다음과 같이 진실 규명 의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조건들을 달았다. △사건에 직접 관련된 군인은 극소수이다. △사건에 관련된 군인들의 행위조차도 전쟁 범죄를 구성하는 행위를 범했는지 여부는 조사 범위에서 제외하라. △조사 행위가 참전 장병 전부의 명예나 작전의 정당성을 훼손해서는 안된다.


이같은 내용을 담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기밀 자료를 입수한 범국민위는 즉각 '민간인 불법 학살 가해 부처는 스스로 진상을 조사할 자격이 없다'는 요지의 반박 성명을 발표하고 요식 행위를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범국민위 강정구 상임대표는 "가해자이자 학살자가 주체가 되어 조사한다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고 어물쩍 넘기려는 시도이다"라고 주장했다.


사건 현장 유족의 증언과 각종 문서 공개 등으로 학살 사건 진상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하자 다급해진 국방부가 스스로 조사한다는 형식을 빌려 사건 진상에 대한 또 다른 왜곡과 은폐를 꿈꾸고 있다는 것이다. 범국민위는 이에 따라 군의 자체 조사는 철회되어야 하며, 경찰·극우단체 등이 저지른 민간인 집단 학살 사건들과 함께 통합특별법이 제정된 후 객관적이고 전면적인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국회가 입법을 준비하는 통합특별법은 현행 의문사진상규명 관련 특별법과 마찬가지로 민간인 희생 진상을 조사하는 주체가 대통령이 임명하는 위원장 1인과 상임위원 3명을 포함하여 위원 9명으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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