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에 주사바늘 꽂은 '해상 마약왕'
  • 고재열 기자 (scoop@e-sisa.co.kr)
  • 승인 2001.07.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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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최대 필로폰 밀매업자 김동화, 중국 진출에서 검거까지


지난 2년 동안 서울지방검찰청 마약수사부 수사관들은 '김동화'라는 이름을 수도 없이 되뇌었다. 중국에서 들여오다 적발된 마약의 출처를 추적하다 보면 번번이 김동화라는 이름과 마주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약계의 '빅브라더'인 김씨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 그가 검찰 마약수사부와 중국 공안부의 공조 수사로 지난 3월5일 중국에서 붙잡혀 7월9일 인천 국제공항을 통해 한국에 인도되었다. 검찰과 김씨의 쫓고 쫓기는 싸움이 검찰의 최종 승리로 끝난 것이다.


한국에서 유통되는 마약은 대부분 필로폰(히로뽕)이다. 중국은 한국으로 유입되는 필로폰의 99.5%를 공급하는 나라이고, 김동화씨(37)는 그 중 절반 이상을 공급하고 있다. 마약계의 큰손 김동화, 그가 불과 몇 년 만에 동북아시아 최대의 마약 상인이 된 과정은 한국의 마약 문제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중국·한국·일본을 잇는 '마약 실크로드'를 개척한 바다의 제왕답지 않게 김씨는 바다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바다와 접해 있지 않은 충청북도 출신이다. 그가 바다와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부산에서 대학에 다니면서부터이다.


대학 졸업 이후에도 부산에서 살면서 그는 중국과 무역하는 일에 종사했다. 하지만 김씨는 그리 성공적인 무역상은 못 되었다. 빚에 쫓기고 사기범으로 몰리면서 결혼한 지 2년 만에 가족을 버리고 중국에 도피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까지 그는 사기 전과가 있기는 했지만 평범한 무역상이었다. 무역하는 사람이라면 흔히 저지를 수 있는 정도의 실수를 범했을 뿐이었다. 마약과 관련된 전과는 전혀 없었다.


밀입국 알선해서 번 돈으로 필로폰 판매 시작


중국으로 잠입하자 그는 이제남이라는 가명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은 180°로 변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불법 거래에 관여하기 시작한 그는, 처음에는 밀입국에 관계했다. 그는 중국인과 조선족의 한국행과 일본행을 도왔다.


밀입국을 알선해 모은 자금력을 바탕으로 그는 필로폰 판매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는 공해에서 전달하는 방법으로 일본 마약 조직에 필로폰을 팔았다. 세계에서 가장 큰 일본 시장에 필로폰을 공급하기 시작하면서 김씨는 단기간에 마약 거상이 되었다.


지난 1월 그의 일당이 검거된 곳은 제주도 남단 300km 공해상이었다. 그들이 탄 배는 중국 남부의 푸젠성에서 출발해 동중국해를 지나 일본으로 가던 길이었다. 중국 북부의 선양 시에 있는 그가 원격 조정해 대규모 거래를 진행시켰다는 것은 그가 상당히 거물이라는 점을 입증한다.


그가 미처 성사시키지 못한 다른 거래에서도 그의 역량을 엿볼 수 있다. 얼마 전 그는 캄차카 반도 남단에서 100kg 규모의 마약을 거래하려다가 실패한 적이 있다. 이곳에서 거래하려면 중·러 국경을 넘어 마약을 전달해야 한다. 그는 러시아까지로 활동 무대를 넓혔던 것이다.


일본 내 마약 조직과 주로 거래하던 김씨가 한국에 마약 공급을 시작한 것은 2∼3년 전 일이다.


검·경의 대대적인 단속으로 마약 제조공장이 대부분 적발되자 한국의 마약 공급 조직들은 한국 필로폰 제조 기술자들이 대거 잠입해 있던 중국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들은 동북아시아 마약계의 '큰 손'인 김씨를 찾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필로폰 제조업자들이 중국에 많이 몰려든 것은 중국이 필로폰을 제조할 천혜의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필로폰 원료인 염산에페드린을 구입하기 쉽고, 조선족이 많아서 신분을 위장하기도 어렵지 않다. 필로폰 제조업자들에게 중국은 말 그대로 '기회의 땅'이었다. 검찰 마약수사부의 한 수사관은 "한국에서 '깃털'에 불과하던 마약 사범이 중국에 가서 '몸통'으로 큰 경우도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필로폰 제조업자들은 김동화와 같은 마약 밀매업자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필로폰은 중국 내에서는 거의 소비되지 않아 밀수출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필로폰 밀수출을 맡기기에 최적의 인물이었다. 밀입국을 알선하던 김씨는 다양한 밀수 루트를 확보하고 있었고, 환치기를 통해 거래 자금도 잘 숨겼다.


중국과 무역을 해보았던 그에게 한국으로 필로폰을 넘기는 일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 수출입 화물을 이용해 제품을 은폐해 들여보내거나, 마약 운반자(일명 지게꾼)를 활용해 공항을 통해 들여보내거나, 택배를 활용해 들여보내는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는 조국에 무차별로 마약 공세를 펼쳤다.


전국 이곳저곳에서 마약이 적발될 때마다 '김동화'라는 이름이 계속 터져 나왔다. 서울지검·부산지검·성남지청 등 전국 검찰에 접수된 김씨 관련 사건만도 총 10건이고, 압수된 필로폰 물량은 15kg(소매가 기준으로 약 4백50억원어치)에 이른다.


검찰은 '김사장'이라고 불리는 이 정체 불명의 인물을 파악하기 위해 모든 수사망을 동원했다. 조그만 끈이라도 붙들기 위해 검찰은 중국으로 오가는 마약 사범의 신상을 모두 파악했다.


한국 검찰이 이렇게 자신을 붙잡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을 때 김씨는 중국에서 여유를 만끽했다. 조선족 현지처까지 둔 그는 제법 사치스런 생활을 했다. 특히 그는 중국 공안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중국 공안과 결탁해 승승장구




그가 중국 공안과 가깝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중국 마약업계에서 '야당'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마약 조직 정보를 넘기며 중국 공안과 친하게 지냈다. 주로 헤로인과 코카인 문제 때문에 골치를 썩이는 중국 공안에게 필로폰을 다루는 김씨는 관리할 대상이 아니었다. 검찰은 그가 중국의 마약 사범 검거를 돕는 대가로 조국에 마약을 파는 일을 묵인 받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가 중국 공안들과 이처럼 잘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마약 판매업자가 아니라 사업가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마약 판매업자들은 대부분 의심이 많다. 언제 어디서 함정 수사에 걸려들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이들이 공안과 어울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김씨는 사업가답게 공안원과 더 잘 어울릴 줄 알았다.


공안과 결탁하자 그는 판매 네트워크를 중국 전역으로 확대하고 동북아의 필로폰 시장을 장악했다. 검거될 때 중국 공안은 그에게서 필로폰 750kg을 압수했다. 이는 2천5백만명이 한번씩 투약할 수 있는 양이고, 소매가 기준으로 2조2천5백억원어치이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검찰은 끈질긴 추적 끝에 김씨와 거래하는 국내 마약 판매 조직원을 검거했다. 검찰은 '칠룡'이라고 암호명을 붙인 그를 통해 김씨와의 위장 거래를 성사시켰다. 검찰은 야쿠자를 가장해 제주도 남쪽 해상에서 김씨와 거래하기로 약속을 받아냈다.


1월16일 밤 검찰은 기관 고장으로 표류하고 있는 김씨 조직원의 마약 운반선을 제주도 남방 300km 지점 공해상에서 잡아들였다. '마약왕 김동화'의 발목을 잡는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검찰의 수사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검찰은 중국 공안부 금독국(Drug Control Bureau)에 김씨와 관련된 수사 자료를 넘기고 검거를 의뢰했다.


지난 3월5일 중국 공안부는 금독국 중앙 직원을 직접 현지에 내려보내 김씨와 그의 부하 4명을 잡아들였다. 아는 공안으로부터 '술이나 한잔 마시자'는 말을 듣고 나왔다가 그는 그 자리에서 붙잡혔다.


검찰, '마약 국제 전쟁'에서 첫 번째 개가 올려


김씨를 검거함으로써 검찰은 국제적으로 전개한 마약과의 첫 번째 전쟁에서 기선을 제압했다. 마약 범죄의 세계화에 맞추어 마약 수사도 세계화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중국과 한국과 일본의 국경을 유린하며 동북아 마약 시장을 주름잡았던 김씨는 송환되는 비행기 기내에서 수사관들에게 "이제 중국이든 한국이든 일본이든 내겐 갈 곳이 없다. 고국에 마약을 팔아서 미안하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마약계의 큰손인 김씨를 검거하자 당장 국내 필로폰 시장에 여파가 일기 시작했다. 중국산 필로폰 유입이 줄자 필로폰 가격이 상승한 것이다. 국내 필로폰 도매가는 김씨가 검거되기 전보다 3배 가까이 뛰었다.


국내 필로폰 유통량이 줄었지만 검찰은 이를 일시적인 힘의 공백으로 보고 있다. 곧 제2, 제3의 김동화가 나타나 이 공백을 메우리라는 것이다. 검찰은 김씨 조직만한 규모의 필로폰 밀매 조직이 중국에 3개 정도 더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정선태 서울지방검찰청 마약수사부장은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는 마약을 막느냐 못 막느냐 여부가 2년째 만 명을 넘어서고 있는 국내 마약 중독자 수 조절에 분수령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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