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 차고 싶으면 철원 땅 사라?
  • 정희상·차형석 기자 (hschung@e-sisa.co.kr)
  • 승인 2001.08.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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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녀자 노린 '토지 사기단' 극성…

10배 이상 바가지 씌우고 계약금 떼먹어


서울 광진구에 사는 주부 김미옥씨(46·가명)는 요즘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집을 사려고 남편 월급을 모아 마련한 7천2백만원을 더 불릴 요량으로 강원도 철원의 임야를 산 것이 화근이었다.




지난 7월14일 김씨는 친목회원의 소개를 받아 서울 강남에 있는 부동산회사 (주)강토월드를 찾았다. 그곳 관계자들은 김씨 일행에게 남북 관계가 진전되면서 경원선이 복구되고, 김정일 위원장이 답방만 하면 철원 땅값이 3년 안에 몇 곱절 뛸 것이라고 기염을 토했다. 아울러 경원선·금강산선을 복원하는 구간의 토지 보상과 설계가 이미 결정되었다며 신문 스크랩 자료까지 보여 주었다.


김씨는 "당시 와수리 산 137번지 도로변에는 '도시 계획 구역'이라는 푯말이 서 있었다. 디자인 업체 여사장이라는 사람이 자기도 천 평을 샀는데 그 땅에 모텔을 짓고, 땅을 더 사서 집을 지을 생각이라며 바람을 잡았다"라고 말했다. 업자들의 유혹에 마음이 끌린 김씨는 당일 결정하고 일시불로 땅값을 지불하면 3% 할인해 주겠다는 달콤한 제안을 받고 덜컥 계약을 체결했다. 평당 12만원씩에 임야 5백평을 구입한 것이다.


일시불로 계약금을 낸 뒤 김씨는 집 근처 부동산소개소에 들렀다가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었다. 계약서가 정식 토지매매 문서가 아니고, 땅값도 임야치고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될 정도로 비싸다는 것이었다. 또 자신의 이름으로 등기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김씨가 이런 하자에 대해 항의하자 부동산회사는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다가 돈을 돌려줄 수는 없으니 법대로 하라고 버텼다. 김씨는 법적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


군사 훈련장이 도시계획 구역으로 '둔갑'


최근 철원 등 북한 접경 지역을 대상으로 한 토지 사기를 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서울 화곡동에 사는 박순임씨(가명)는 지난 4월26일, 철원 민통선 땅에 투자하면 월 20% 수익을 보장하겠다는 부동산 투자 유사 금융회사의 꼬임에 넘어가 6천만원을 날렸다. 강남의 ㅁ산업은 경원선이 개통될 철원 지역의 4차선 도로 공사 장면을 담은 비디오를 보여주면서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역시 남북 관계가 진전되면 민통선 인근 철원 땅이 몇 곱절 뛴다고 장담하며 주로 부녀자들을 유혹했다. 회장이라는 사람은 "철원 땅 살 사람이 서울 강남에 줄서 있다"라며 설득했다고 한다.


이 사건을 조사한 서울 방배경찰서 박 아무개 형사는 "이 회사 회장은 사기 전과 5범이고, 피해자가 100여 명에 피해 액수만도 10억원이 넘는다"라고 말했다. 최근 금감원이 민통선 토지 투자를 미끼로 해서 불법으로 자금을 모집한 이 업체를 검찰에 고발해 현재 수사가 진행 중이다.




이처럼 6·15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남북 화해 분위기에 편승해 등기부도 확인하지 않고 서울을 중심으로 북한 접경 지역 땅에 대한 '묻지마 투자'가 확산되고 있다. 저금리 시대에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남북 교류가 진전되면 철원·파주·연천 등 북한 접경 지역이 개발되지 않을까 기대하며 무조건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사기단이 '작업'에 들어가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다. 사기단은 주로 중년 여성 계모임이나 친목회를 노리고 접근한다.


취재진은 철원군 민통선 일대에서 어떤 식으로 토지 사기가 벌어지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47번 국도를 따라 가면 철원군 서면 와수리가 나온다. 토지 사기를 당한 서울 광진구 주민 김미옥씨가 평당 12만원에 구입했다는 산은 도로 오른쪽에 있었다. 김씨가 업체 사람들과 같이 갔을 때 보았다는 '도시 계획 구역' 푯말은 찾아볼 수 없었고 '군사 훈련 교장'이라는 푯말만 있었다. 산의 경사가 가팔라서 부동산회사측 말대로 모텔을 짓는다면 산 전체를 밀어야 할 판이었다.


철원군청 관계자는 와수리 지역에 도로 확장 계획은 없고, 숙박 시설 건축은 조례에 따라 원천적으로 제한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서울 사람들이 전혀 근거 없는 소문만 듣고 군청에 문의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철원의 다른 부동산업소는 철원군 임야가 서울에서 평당 12만원에 거래된다는 얘기를 듣자 한마디로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임야 중에서 가장 비싸다는 묘지 부지도 평당 5만원을 넘지 않는다는 설명이었다.


철원에서 연천으로 넘어가는 경계에는 교각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용담교가 있다. 연천 신탄리역에서부터 철원까지 군데군데 끊긴 경원선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 일대가 서울의 토지 브로커들이 몰리는 곳이다.


연천군에 있는 한 공인중개사무소는 '연천·철원 비무장지대 땅 전문 매매'라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어 선전하고 있었다. 중개사무소 안 곳곳에 남북 정상회담·경원선 관련 기사가 붙어 있었고, 경원선 복원 예정 지역이라고 도면에 표시되어 있었다. '남북 교류와 화해 협력'안이 부동산 거래를 유인하는 최고의 미끼로 활용되는 형국이었다.


정부·지자체, 투기 부채질


이처럼 접경 지역을 중심으로 땅 투기와 사기 사건이 빈발하는 데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임도 크다. 비무장지대와 접경 지역을 관광지로 개발하겠다는 계획을 마구 발표함으로써 투기를 부채질하는 것이다.


최근 경기도가 한국관광연구원에 용역을 의뢰해 만든 '비무장지대 및 접경지역 등의 관광자원 활용방안'이라는 보고서도 그 중 하나이다. 이 보고서는 2010년까지 3조7천억원을 들여 남북 협력 시대에 대비해 경기 북부의 접경 지역 11개 시·군을 평화협력권·DMZ권 등 5개 테마 관광지로 나누어 세계적 수준의 관광휴양지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담고 있다. 남북 관계·미군 공여지·민통선 출입 문제 등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도상 계획을 짜고 있는 것이다. 겉만 화려하고 속 빈 강정처럼 진행되는 관광지 개발 계획들이 '남북교류 부동산 특수'라는 이상 기류를 부추기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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