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중과 싸우는 '어머니와 딸'들
  • 김은남·차형석 기자 (ken@e-sisa.co.kr)
  • 승인 2001.09.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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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중에 반기 드는 여성 점점 늘어…
성 차별 해법은 '호주제 폐지'
혈족 내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종중이 여성들로부터 맹공을 받고 있다. 그동안 족보에도 이름이 실리지 않는 등 소외되어온 여성들이 종중에 맞서는 까닭은 무엇인가.


명절을 앞둔 종친회라면 사람이 북적대게 마련이건만, 수원 시내에 있는 용인 이씨 사맹공파 종중 사무실은 철문으로 굳게 닫혀 있었다. 입구에는 폐쇄 회로 카메라가 작동하고 있었다. 기자의 신분을 확인한 뒤 문을 열어준 종중 관계자는 "몇 달 전 종중 내의 출가한 딸들이 사무실에 찾아와 간부 멱살을 잡는 등 패악을 부리고 간 사건이 있은 뒤 자구책으로 이런 장비를 설치했다"라고 말했다.




종중이란 동일한 시조의 후손으로 구성된 혈연 집단을 일컫는다(흔히 문중이라고도 하는데, 엄밀하게 구분하자면 문중은 고조할아버지가 같은 8촌 이내만을 일컫는 좀더 협소한 의미의 종중이다). 이들 종중이 요즘 들어 최대의 시련에 봉착했다. 종중 내에서 출가한 딸들이 자기들에게도 종중 구성원(종중원) 자격을 달라며, 잇달아 법정 소송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시사저널〉 제598호 참조). 용인 이씨 사맹공파말고도 청송 심씨, 성주 이씨 안변공파 종중이 현재 이같은 소송에 휘말려 있다.


언뜻 보면, 이것은 참 해괴한 일이다. 종중의 3대 역할은 △제사를 지내고(봉제사) △묘역을 관리하고(분묘 수호) △종중원 상호 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일이다. 여기에는 전통적으로 여자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시대가 바뀐 뒤에도 여자들이 여기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난데없이 자기들에게도 종중원 자격을 인정해 달라니.


소송에 휘말린 종중은 이것이 모두 돈 때문이라고 말한다. 종중이 소유한 경기도 용인 수지 일대 땅값이 택지 개발로 치솟자, 이를 팔아 분배하는 과정에서 ‘평소 종회 행사에는 코끝도 비치지 않던' 출가녀들이 꼬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부분적인 잘못이 있었던 점은 종중도 인정한다. 재산 분배에 즈음한 1998년 청송 심씨와 성주 이씨 종중은 정관에 있는 종중원 자격 규정을 증시조의 ‘후손'에서 ‘만 20세 이상 남자'로 뜯어고쳤다. 여성을 배제하려는 의도가 명백하게 드러난 정관 개정이었다.


그러나 설혹 절차에 문제가 있었다 해도 개정한 정관 자체는 법적으로 전혀 하자가 없다는 것이 종중측의 주장이다. ‘종중은 공동 선조의 후손 중 성년 이상의 남자를 종원으로 구성되는 종족의 자연적 집단'이라는 대법원 판례(1992년)가 있었던 만큼 옛 정관이야말로 오히려 무효였다는 것이다.


"출가한 딸에게 주는 돈은 죽은 돈이다"


법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는 종중측은 딸들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는다. 청송 심씨 종중회장 심광섭씨(68)는 이렇게 말했다. "출가한 딸에게 주는 돈은 죽은 돈이다. 그들은 자기네 시집을 위해 돈을 쓸 것이 아닌가. 조상을 위해서라면 남자에게 돈을 주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여자들이 언제 제상에 술 한번 올려 보았나."


용인 이씨 사맹공파 종친회 회장 이호현씨(67)는 또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남녀가 평등해진 시대라지만 출가한 딸이 친정에 와서 권리를 찾겠다는 것은 대한민국을 흔드는 일이다. 우리 15대 할머니 중 성주 이씨 집안에 시집 간 분이 있는데, 출가녀들의 논리대로라면 나도 성주 이씨의 재산 분배에 간여할 권리가 있다는 것 아닌가. 이것은 말이 안된다."


이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논리적 근거를 함축하고 있다. 첫째, 종중 재산 상속은 제사를 계승해 조상을 모시는 자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라는 것. 둘째, 제사 계승자는 반드시 남자라는 것. 셋째, 따라서 출가외인으로서 제사를 계승할 수 없는 여성은 재산을 상속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역사적으로 따져볼 때 이같은 논거는 상당 부분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재산을 상속하기 위한 1차적 조건이 제사 계승인 것은 분명하다. 이광규 교수(서울대·인류학)는 재산권이나 가장권을 누가 갖고 있느냐에 따라 제사 계승자가 결정되는 중국·일본과 달리 한국에서는 제사를 누가 계승하느냐에 따라 가장권이나 재산 상속권이 부차적으로 결정되었다고 분석했다(〈한국 친족의 사회인류학〉). 그만큼 제사 계승은 한국 가족 제도에서 핵심적인 권한이었다.


그런데 제사권을 처음부터 남자만이 가졌느냐 하면, 그것은 결코 아니다. 이배용 교수는, 고려식 가족 제도의 관행이 남아 있던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여러 자녀가 제사를 돌려가며 지내는 ‘윤회 봉사'가 일반적인 관행이었다고 지적했다. 〈경국대전〉에서는 제사를 장자가 승계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이것이 지켜지지 않아 고심한 흔적이 사료 곳곳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시기에 편찬된 이문건의 〈묵재일기〉를 보면 3대에 걸친 제사를 아들·딸·사위뿐 아니라 친손·외손 가릴 것 없이 거행한 것을 알 수 있다.


전통 깊은 가문, 모계 재산으로 뿌리 내려




이는 재산 균분 상속제와 상당한 연관이 있다는 것이 정긍식 교수(서울대·법학)의 지적이다. 부모 재산을 똑같이 물려받으면 의무인 제사 또한 마찬가지로 봉행해야 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의 여성들은 남자 형제와 똑같이 부모 재산을 물려받았을 뿐 아니라 결혼해서도 자기 재산을 따로 관리했다. 더욱이 이 시기에는 남자의 처가살이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여자가 친정 제사를 지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이배용 교수에 따르면 "이 시기에는 남녀 차별보다 적서 차별이 훨씬 더 심각했다."


그러나 조선 중기, 17세기에 접어들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중국의 종법적 가족제도를 모델로 삼았던 조선 왕조의 개혁 정책이 뿌리를 내리면서 균분상속제는 자취를 감추고 큰아들이 우대받게 되었다. 제사 방식 또한 형제자매가 돌아가며 봉사하던 방식에서 큰아들의 단독 봉사로 바뀌었다. 결국 여자나 다른 남자 형제들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제사에서 ‘배제'된 셈이다.


이는 일제 시기까지도 이어져 종중원 자격은 오직 가장(호주)에게만 주어졌다. 차남이나 다른 형제에게까지 자격이 확대된 것은 광복 이후였다. 이번에 종중들은 법과 전통을 내세워 여성의 종중원 자격을 박탈했지만 전통이라는 잣대를 똑같이 들이대자면 호주 이외의 남자들도 마냥 당당할 수만은 없을 듯하다.


더 역설적인 것은,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종중일수록 이들의 재산이 상당 부분 모계에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전국의 명문 종가 30여 군데를 취재해 〈종가 이야기〉를 펴낸 이연자씨(한배달 차문화연구원장)는 이들 종조의 상당수가 처가 재산을 바탕으로 뿌리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어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처가살이 관행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조선 전기가 특히 그랬다. 월성 손씨가 경주 양동마을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공신의 호를 받은 손 소 선생이 이 마을 토호인 풍덕 유씨에게 장가를 들면서였다. 고산 윤선도를 배출한 해남 윤씨 종가가 만석꾼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도 중시조 윤효정 선생이 해남의 부자인 초계 정씨 집안에 사위로 들어가면서였다.


법대로 하라던 오빠가 칼 들고 달려오고…


그러나 역사적인 진실과 무관하게 현실은 딸들에게 가혹하다. 기존 판례에 따라 여자가 종중원이 될 수는 없는 만큼 천만원씩 받고 종중과 화해하라는 수원지법의 조정을 거부했던 심정숙씨는 친어머니에게 ‘돈독이 오른 ×'이라는 폭언을 들어야 했다.




심씨는 소송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세 번 큰 상처를 받았다고 말했다. 첫 번째는, 30년 전 아버지 유산을 독차지했던 남자 형제들이 6백억원대가 넘는 종중 재산 매각 대금마저 자기들끼리 나누면서 여자 형제한테는 양말 한 짝 살 돈조차 건네지 않았을 때. 두 번째는, 법대로 하라던 친오빠가 분을 못 이겨 칼을 들고 덤볐을 때. 세 번째는, 구청 직원이 ‘심씨 성 가진 여자는 필요없고, 남자가 와야만 종중 재산을 열람할 수 있다'고 못박았을 때.


성주 이씨 출가녀 이명자씨는 종중에 대한 기여도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홉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오빠가 방탕하게 밖으로 나도는 동안 어린 딸들은 야간 학교를 간신히 다니며 병든 어머니를 부양했다. 부모를 섬기는 것이 곧 조상을 섬기는 것 아닌가? 1년에 몇 차례 여자들이 차려놓은 제상 앞에서 절하는 것만이 조상 숭배인가?"


오늘날 종중을 둘러싸고 갈등이 불거지는 것은 기실 남녀 간의 역학 관계가 바뀐 때문만은 아니다. 종중 그 자체의 역할과 기능도 바뀌었다. 용인 이씨 출가녀들의 소송을 대리하는 황덕남 변호사는 "과거 종중의 주요 기능이 봉제사와 분묘 관리였다면 오늘날의 주요 기능은 재산 관리로 바뀌어 가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종중의 땅은 매매 대상이 아니었다. ‘이 땅에 절대로 손을 대서는 안된다'는 말은 당시로서는 흔한 유언이었다. 해남 윤씨 선조들은 ‘이 땅에서 나온 소출로 재산을 불리지 말라'는 유훈을 남겼고, 후손들은 이에 따라 남는 소출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정을 베풀었다. 세금을 내지 못해 감옥에 갇힌 백성을 위해 대납도 해주었다. 그 결과 윤씨 가문은 민란과 전란의 와중에도 횡액을 면했다. 이연자 원장은, 이런 것이 바로 진정한 조상의 음덕(蔭德)이라고 말한다.


종중 땅 관련 소송 한 해에도 수십 건


그러나 종중 구성원끼리 치고받는 현실은 이같은 이상론을 무색하게 만든다. 여성이 소송을 제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종중 땅과 관련해 한 해에도 수십 건씩 제기되는 소송은 법관들로서도 가장 골치 아픈 분야에 속한다. 관련 법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종사법(가칭)을 조속히 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문제는, 종사법이 제정된다 한들 사정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한국씨족총연합회가 1999년 국회에 입법 청원 형식으로 제출한 종사법안을 보면 종중원 자격을 ‘종중 시조의 남계 후손'으로 제한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한국여성단체연합 김기선미 부장은 ‘결국 관건은 호주제'라고 잘라 말했다. 부계 혈통주의를 명시화한 공법(호주제)이 존속하는 한 다른 법률 관계 또한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종중이 ‘민족적 정체성의 마지막 보루'(정환담 전남대 교수)인지 ‘가부장적 권력을 공고화해온, 청산해야 할 파쇼 문화의 유물'(고은광순 호주제철폐를위한시민의모임 운영위원)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그러나 ‘법대로'를 외치며 우주의 절반인 여성을 배척하는 오늘날 종중의 모습에서 전통적인 위엄과 기품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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