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중고에 신음하는 희귀병 환자들
  • 차형석 기자 (papapipi@e-sisa.co.kr)
  • 승인 2001.10.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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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사각지대에서 병고·생활고·가족고…진단에만 2년 이상 걸려
"새벽에 갑자기 호흡이 멎었다. 119로 연락해 영동 세브란스 병원으로 갔다. 오후 5시께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며칠 전부터 입에서 침이 많이 나온다. 하루에도 몇십 번씩 가래와 침을 닦아낸다. 몸무게를 재보니 52㎏이다. 눈물이 난다. 마음이 자꾸 약해져 눈물이 난다. 새로 나온다는 약은 나오지 않고, 한없이 기다리고 있으려니 답답하기만 하다."




서울 방배동에 사는 김진자씨(60)는 지난 8년 동안 희귀 질환을 앓는 남편 곁에서 꼼꼼히 기록해 온 간병 일지를 보여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 장동호씨(65)가 왼팔에 이상을 느낀 것은 1993년. 평범한 회사원이던 장씨에게 의사는 50대에 흔히 나타나는 오십견이라면서 물리 치료를 권했다. 그러나 증상은 점점 악화했다. 병원을 전전하다 2년여 만에 장씨가 최종적으로 통보받은 병명은 이름도 희한한 근위축성 측삭경화증.


희귀질환 35종,
2만1천5백여 명 '신음'


근위축성 측삭경화증 환자는 운동신경 세포가 파괴되어 나중에는 호흡 곤란까지 겪게 된다. 정확한 발병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불치병인 이 병은 미국의 야구 선수 루 게릭이 앓았기 때문에 흔히 루 게릭 병이라고 불린다.

장씨에게는 50대에 병이 찾아왔지만, 희귀병은 대부분 유전자 질환이어서 유소년기에 걸리는 경우가 많다.


인천에 사는 조미숙씨(36)의 딸 배성(5)이는 생후 3일 만에 호흡 곤란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감기만 들어도 바로 호흡 장애가 올 수 있기 때문에 배성이는 3년간 호흡기를 단 채 병원에서 지냈다. 퇴원해 집에서 지내려면 호흡기와 객담 흡입기를 설치해야 하는데 호흡기 비용만도 2천만원이 넘는다. 조씨는 "5년에서 10년만 잘 관리하면 어느 정도 병을 고칠 수 있다는데 이제 더 손 벌릴 친척도 없다"라며 애를 태웠다.


희귀병 환자들이 현대 의학의 사각 지대에서 고통을 겪고 있다. 변변한 치료법이나 마땅한 약이 없기 때문이다. 희귀 질환이란 말 그대로 매우 드문 병을 말한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실태 파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히 몇 명이 희귀 질환으로 고통받고 있는지 모른다.


한국희귀의약품센터가 2001년 8월 42개 종합 병원을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희귀병 환자들은 전국적으로 35개 질환 2만1천5백여 명에 이른다. 5천 가지 질병을 희귀 질환으로 등록해 관리하는 미국의 경우와 달리 국내에서는 희귀병 진단이 쉽게 나지 않는다는 상황을 감안할 때 실제 환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26개 희귀질환자 자조 모임의 연합 단체인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 전용석 사무총장(33)은 희귀질환자가 삼중고를 겪는다고 말했다. 병고(病苦)·생활고(生活苦)와 가족의 고통이다.


희귀병 환자들의 고통은 진단을 받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흔한 질병이 아니기 때문에 확진을 받는 데만도 2∼3년이 걸린다. 환자들은 여러 의료기관을 옮겨 다니다가 종합 병원에 가서야 확정된 진단을 받는 경우가 많다.


김현주 교수(아주대 의대·임상유전학)는 "하루에 몇십 명을 진단하는 한국 의료 현실에서는 희귀병 환자 진단에 신경을 쓸 틈이 없는 게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질환별 전문의 교육·수련 과정도 없고 유병율 파악도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는 앞으로도 희귀병 '지각 진단'이 계속될 것이라고 김교수는 말한다.




지방에 거주하는 환자의 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도 단위 국립 병원이 희귀병을 필수 진료 과목으로 정해 병상을 확보하지 않아 지방 환자들은 호흡기를 단 채 서울의 큰 병원을 찾아야 하는 실정이다.


확진을 받은 뒤 희귀병 환자들은 생활고라는 두 번째 장벽에 부닥친다. 뚜렷한 치료 방법이 없는 상태에서 투병 기간이 길어져 가계가 파탄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선천성 면역결핍증(CGD) 환자인 이태한씨(29) 가족도 이런 고통을 피할 수 없었다. 현재 이씨는 의식을 잃은 채 서울대병원 중환자 격리실에 한 달 반째 입원 중이다.


선천성 면역결핍증은 25만명당 1명 정도 빈도로 발생하는 유전성 질환인데, 면역력을 극도로 저하시킨다. 대부분 소아 때 발병해 성인이 되기 전 사망하는 병이다.


이씨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발병해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 왔다. 처음에는 무슨 병인지 모르고 동네 병원을 찾아 다녀, 정확한 진단을 받는 데 2년이 걸렸다. 어머니 정기순씨(50)는 24년 전 직업 군인이던 남편이 순직해 도배 일을 하며 홀로 병수발을 해오고 있다. 국가유공자 가족이어서 진료비 혜택을 받았지만 눈덩이처럼 늘어나는 치료비를 감당할 길은 막막했다.


그동안 얻은 빚이 4천여만원. 중환자실 치료비만도 하루 52만원에 달해 정씨는 살고 있는 내발산동의 집을 내놓았다. 병상에 누운 아들을 이대로 보낼 수 없다며 그녀는 내내 흐느꼈다.


"오랜 투병에 지쳐 호흡기 떼는 가족도 있다"


희귀병은 환자뿐만 아니라 가족의 삶도 파괴한다. 남편 송재규씨(49)가 9년째 루 게릭 병으로 투병하는 정영희씨(47)는 "치유할 방도도 없이 24시간 환자 옆에서 간병해야 하는 가족의 고통은 당하지 않고는 모른다"라며 간병인 지원이 매우 절실하다고 말했다. 비디오 프로덕션을 경영하던 남편이 루 게릭 병으로 자리보전을 한 뒤 여유 있던 집안이 몰락한 것은 한순간이었다. 2년 전부터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지정된 정씨는 "너무 오랜 투병에 지쳐 환자의 호흡기를 떼는 가족도 있다"라고 전했다.


희귀질환자가 처한 어려움을 감안해 정부도 지원에 나섰다. 보건복지부는 2001년부터 만성신부전증·근육병·혈우병·고셔병에 한정해 의료비 본인부담금을 지원할 기금으로 국비·지방비 절반씩 4백50억원을 책정했다. 또 7월1일부터 소아암·근육병 등 일부 희귀질환자에 대해 외래 본인부담 비율을 현행 40∼55%에서 20%로 경감했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이 환자와 가족의 고통을 크게 덜어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4개 질환에만 한정해 지원하기 때문에 다른 희귀질환자들은 혜택을 받을 수 없을 뿐더러 의료비 지원 대상자 선정 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해 실제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환자의 수가 매우 적다는 것이다.


미국과 캐나다는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환자들에게 정보와 약품을 제공하고 일본은 연간 1조원을 투입해 45개 질환을 지원한다. 이에 비해 국내의 희귀질환자 지원 제도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한국희귀약품센터 장영수 소장(62)은 "정부 차원의 지원이 늘어야 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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