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한줌에 한숨 한줌…농민들 '핏발 선 풍년가'
  • 고제규 기자 (unjusa@e-sisa.co.kr)
  • 승인 2001.10.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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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들, 수매가 폭락하자 곳곳에서 '추수 파업'…"농부가 봉이냐"
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 관창리에 사는 최종길씨(51)는 1만2천평 논농사를 짓는 쌀 전업농이다. 최씨의 논도 올해 대풍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줄곧 한숨만 내쉰다. 다른 농가는 이미 추수를 끝냈지만 최씨는 논 3백평의 추수를 포기했다. 정부의 쌀정책에 항의하는 '추수 파업'에 나선 것이다. 지난 9월18일에는 여문 벼로 꽉 찬 그의 논 2백평을 트랙터로 갈아엎었다. 최씨는 자식 같은 벼에 직접 손을 대지는 못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이상구씨(45)에게 트랙터 운전대를 맡겼다. 그는 짓밟히는 벼를 보며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워 물었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짓는 추수철에 농심(農心)이 불타고 있다. 연중 가장 바쁜 때에 농부들은 '아스팔트 농사'를 지으러 거리로 나서고 있다. 최씨처럼 추수 파업을 결의하고 다 자란 벼를 뭉개는 농사꾼도 늘고 있다. 농림부에 따르면, 올해 쌀 생산량은 최대 3천7백∼3천7백60만석에 달할 전망이다. 이는 올해 생산 목표치 3천5백50만석을 훨씬 웃도는 수치다. 이처럼 대풍인데도 농부들이 좌절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5천평을 경작하는 충청남도 부여군 초촌면 신암리 강경선씨(46)도 3천평의 추수를 포기했다. 시가로 따지면 천만원이 넘는다. 강씨가 소득의 절반 이상을 포기한 것은 추수를 해도 손해볼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믿었던 쌀마저 무너지고 있다. 이제부터 농부들에게 IMF가 시작되었다"라고 강씨는 주장했다.


뼈빠지게 일하고도 가마당 1만∼2만원 손해


걱정했던 쌀값 폭락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지난해 쌀 한 가마니(80kg)가 16만원대였는데, 현재 산지 쌀값은 15만원대로 만원이나 떨어졌다. 추수된 쌀이 한꺼번에 시장에 나오면서 얼마까지 떨어질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농민은 뼈빠지게 일하고도 가마당 많게는 1만∼2만 원 손해를 보고 있다. 손해를 무릅쓰고 추수하더라도 팔 곳이 마땅치 않다.
판로는 크게 정부·농협과 미곡종합처리장(RPC), 민간업자를 통한 수매로 나뉜다. 농민이 가장 선호하는 쪽은 정부 수매다. 정부 수매가가 가장 높기 때문이다. 올해 정부 수매가는 1등급을 기준으로 벼 40kg당 6만4백40원이다(농협과 RPC는 5만1천원 선이다). 그러나 우루과이 라운드 협정에 따라 매년 국내보조금(AMS)이 줄어들면서 정부 수매 물량도 감소하고 있다. 올해 정부 수매량은 5백75만석이다. 나머지는 농협이나 미곡종합처리장이 담당한다.


문제는 농협이나 미곡종합처리장, 민간업자는 손해 보는 장사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부 수매가는 등급에 따라 일률적으로 정해져 있는데, 농협이나 미곡종합처리장은 현지 시장 가격에 따라 자율적으로 수매가를 정한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이 적자 운영을 면치 못하고 있다.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농협이 직접 운영하는 1백99개 미곡종합처리장 가운데 1백44개가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쌀값의 계절 진폭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미곡종합처리장은 싼 값으로 쌀을 사들인 다음 이듬해 봄까지 보관했다가 비쌀 때 판다. 계절에 따라 쌀값이 유동적으로 오르내려야 수지타산이 맞는데, 올해는 계절 진폭이 0.4%로 거의 사라졌다. 미곡종합처리장이나 농협은 창고 보관료도 건지지 못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최대한 낮은 가격으로 수매하기를 원한다.


결국 죽어나는 쪽은 농부이다. 추수를 했지만,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헐값에라도 당장 내다 팔아야 한다. "농부들이 유일하게 돈을 만져볼 때가 바로 추수 때다. 이 때 목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신용불량거래자로 전락한다"라고 이상구씨(45)는 말했다. 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 주교리에서 가장 크게 농사를 짓는 쌀 전업농 이씨는 올 연말에 각종 이자와 원금을 상환해야 한다. 상환 날짜를 어기면 경제적인 사형 선고인 신용불량거래자 명단에 오르게 된다. 이씨는 그를 믿고 연대 보증을 선 사람들을 보아서라도 또다시 부채를 얻어 상환금을 갚아야 할 판이다.


농부들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정부가 연내 타결을 추진하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도 불타는 농심에 기름을 부을 또 다른 변수다(64쪽 상자 기사 참조). 하지만 정부는 뾰족한 수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자충수를 두었다. 지난 9월4일 정부는 2004년 세계무역기구(WTO) 쌀 재협상에 대비한다며 중·장기 대책안을 발표했다. 내년부터 △추곡 수매에서 밭벼 제외 △수매 등급을 미질에 맞도록 개선 △2005년까지 고품질 벼 재배 면적을 50% 수준까지 확대 △논농업 직접 지불제 실시 등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했다. 그러나 중·장기 대책안의 핵심은 쌀 증산 정책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농민단체는 살농(殺農) 정책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농민들은 추수 파업과 벼 태우기로 대응했다. 농민의 반발이 심해지자 당·정은 9월24일 특별 대책안을 마련했다. 농심마저 정권에 등을 돌리면 심각하다고 판단해서였다. 정부는 △지난해보다 4백만석을 더 수매하고(총1천5백25만석) △쌀값 계절 진폭을 확대하며 △재고미 100만석을 주정용으로 공급하겠다며 급한 불을 끄려 했다. 하지만 특별 대책안 역시 농심을 다독이지는 못했다. 수매량은 늘었지만, 핵심이라 할 쌀값 폭락을 막을 대책이 빠졌기 때문이다. 정부 수매량이 한정된 상황에서 추가 수매는 전적으로 농협과 미곡종합처리장이 담당해야 하는데, 특별 대책안은 수매가를 시가로 못박았다. 시가 매입이란 말 그대로 시장 가격으로 수매한다는 것이다. 결국 정부는 추가 수매라는 공을 농협과 미곡종합처리장에 떠넘겼다.


정부 특별대책안, 농민 두 번 울려




무엇보다 농민이 거세게 반발하는 것은 농정 당국의 탁상 행정과 손바닥을 뒤집듯 자주 바뀌는 농업 정책 탓이다. 지난 8월29일 정부는 5백75만석 수매량 가운데 산물벼(건조하지 않은 벼) 수매를 지난해 2백50만석에서 1백50만석으로 줄이고, 포대 수매를 늘린다고 발표했다. 저장이 가능한 포대 수매를 늘려, 쌀값 안정을 꾀하겠다는 취지였다(산물벼는 곧장 시장으로 유입된다). 그러나 이 대책은 노동력이 부족한 농촌 현실을 외면한 탁상 행정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논에서 베는 즉시 넘기는 산물벼 수매는 여러 모로 농민에게 편리하다. 그런데도 당국은 농민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고 계산기만 두드려 산물벼 수매량과 포대 수매량을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이다. 농민의 반발이 거세지자 9월24일 특별 대책안에서는 산물벼 수매량을 지난해 수준인 2백50만석으로 되돌려 놓았다.


일관성이 결여된 농업 정책을 불신하는 목소리도 높다. 전국농민회총연맹 부여농민회에 따르면, 불과 5개월 전만 해도 농정 당국은 산비탈에까지 벼를 심으라며 증산 정책을 독려했다. 농민들은 60년 만에 찾아온 가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밤낮을 안 가리고 물을 퍼 날랐다. 그런데 반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쌀이 남아돈다며 증산 정책을 포기한 것이다. 충청남도 부여군 황산면의 쌀 전업농 이진구씨(39)는 "언제 한번 정부의 관리가 책임진 적이 있었느냐?"라며 분개했다.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연동리 홍일권씨(48) 역시 정부 말만 믿다가 뒤통수를 맞았다. 1993년부터 내리 2년간 흉작으로 쌀 비축량이 급감하자 정부는 농업기반공사를 통한 농지 확대 지원을 강화했다. 홍씨는 그때 대출을 받아 3천6백평을 늘렸다. 늘어난 농지를 경작하기 위해 콤바인·트랙터 등 농기계도 지원 받았다. 그러나 쌀값이 떨어져 홍씨는 지금 농지 상환금을 갚기에도 버겁다.


홍씨는 젊은 농사꾼 30여명과 함께 미질이 뛰어난 브랜드 쌀을 개발하고 있다. 상품명은 '미래쌀'로 정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다. 9·24 특별 대책안이 수매 현장에서 전혀 약효를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홍씨는 "추수해 놓고도 판로를 걱정해야 될 판에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다"라고 말했다.


지난 9월25일부터 본격적인 수매가 시작되었다. 현재 일부 농협과 미곡종합처리장이 담합해 수매 가격을 낮추고, 자체 수매 등급을 만들고 가격 격차를 벌여 농민으로부터 원성을 사고 있다. 전국농민회 이호중 정책부장은 "정부가 쌀값 폭락을 방치한다면 농민 대란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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