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 라팔 · F15, 차세대전투기 사업 '대 바겐세일'
  • 권은중 기자 (jungk@e-sisa.co.kr)
  • 승인 2001.10.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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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게 뭐냐 다 들어주마"
차세대전투기사업(FX)에 출사표를 던진 전투기들이 서울 하늘에서 치열한 공중전을 펼쳤다.


4조6천억원에 달하는 '상금'이 걸린 FX 사업의 기종 선정을 코앞에 둔 지난 10월15일 열린 서울에어쇼에서 후보 전투기들은 깊은 인상을 심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FX 사업 기종이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결정될 예정이어서 이번 에어쇼에서 각 항공사의 홍보전은 치열할 수밖에 없다. 9·11 테러 때문에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서울 에어쇼에 참석하려고 했을 정도였다. 또 지금까지 어떤 에어쇼에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던 미국의 F15E가 에어쇼에 참석한 것도 이런 까닭이다.




FX 사업은 공군 전력의 한 축인 F4·F5의 노후화가 심한 데다 우리 군 주력기인 F16을 보완할 후속 기종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추진하는 것이다. 공군은 F16보다 작전 반경이 넓고 공대지 기능이 강화된 전투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또 FX 사업을 통해 기술을 습득해 2015년에는 우리 손으로 차세대 전투기를 만들 선진 기술력을 확보하겠다는 목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1990년대 초 검토되기 시작했던 FX 사업은 IMF 사태로 인해 1998년에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예산 때문에 애초 1백20대였던 사업 규모가 70대로 줄더니 결국 40대를 도입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조립 생산'이라는 FX 사업의 목표는 '완제품 도입'으로 궤도를 수정했다. 물량이 너무 적어 조립 생산하면 가격이 상승하므로 완제품 구매로 돌아선 것이다. 그래서 한국군이 조립 생산 대신 생각해낸 것이 절충 교역(비행기를 파는 대가로 한국 제품을 사거나 기술을 이전해 주는 것)이다. 한국군은 FX 사업의 총 비용인 40억 달러의 70%인 28억 달러에 대한 절충 교역을 각국 항공사에 요구했다. 때문에 일부 항공사는 'FX 사업을 따내도 밑지는 장사'라는 볼멘 소리를 내기도 한다.


하지만 사업이 늦추어지면서 전투기 생산 업체들은 몸이 달았다. 그래서 한국군이 해외 무기 획득 사업에서 처음으로 주도권을 잡는 드문 풍경이 연출되었다. 이들 항공사는 파격적인 기술 이전을 제시하며 군 관계자는 물론이고 기술을 이전받고자 하는 관련 업계를 들뜨게 하고 있다.


시험 평가 성적 라팔·타이푼·F15·SU35 순서


앞으로 30년 동안 한반도 영공을 지킬 대한민국 공군이 되려고 지원한 전투기는 모두 네 종류다. F15(미국 보잉), 라팔(프랑스 다소), EF2000 타이푼(영국·독일·이탈리아·스페인 4개국 컨소시엄인 유러파이터), SU35(러시아 수호이) 등이 경합하고 있다. 이들 전투기는 50 가지가 넘는 한국군의 작전요구능력(ROC)을 모두 충족하고 있다. F15는 이미 검증된 세계 최고 전투기라는 자존심을 내세우고, 라팔과 타이푼은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차세대 전투기라는 점을 강조한다. SU35는 가격(F15의 60%선)에 비해 뛰어난 성능으로 관심을 끈다.




그렇다면 이렇게 뛰어난 전투기들에 대한 군의 평가는 어떨까. 군은 FX 사업 후보 기종을 모두 네 차례 평가한 후 최종적으로 기종을 선종해 계약에 들어간다. △시험 평가 △기술 평가 △가격 평가 △비용 대 효과 분석 등 4단계 평가 가운데 이미 시험 평가와 기술 평가는 끝났다. 현재 국방부 조달본부와 국방과학연구소가 가격 평가와 비용 대 효과 분석을 진행 중이다.


지난해 연말 가장 먼저 평가에 들어간 공군 시험평가단은 각국을 돌며 후보 기종을 직접 몰아 본 뒤 지난 4월 중순 국방부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군사 기밀이라는 이유로 보고서 내용이 공개되지 않았지만 그 순위는 알려졌다. 라팔이 1등을 했고 타이푼, F15, SU35 순서였다.


라팔과 타이푼이 시험 비행에서 좋은 성적을 얻은 것은 비행기의 각종 시스템을 통합함으로써 계기판이 단순해 조종하기가 수월했기 때문이다. 공군 시험평가단은 지상에서 시뮬레이터로 교육받은 지 하루 만에 라팔을 몰았다. 거기에다 라팔은 음성인식 장치나 터치 스크린 등으로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어 호평을 받았다. 타이푼은 헬멧만 쓰면 모든 정보가 눈앞에 펼쳐지는 액정 디스플레이와 음성인식장치를 갖추어 높은 점수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비해 F15는 열흘 가량 지상 교육을 받고 나서야 이륙할 수 있었다는 후문이다.


기술 평가에서도 역시 최첨단으로 무장한 유럽의 비행기가 F15보다 앞섰다고 국회 국방위에서 보고된 것으로 알려졌다. 다소 사의 이브 로빈스 부사장은 "F15는 지나간 20세기의 마지막을 장식한 전투기이고 라팔은 21세기 최초의 전투기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보잉측은 "F15는 1987년에 실전 배치된 전투기로 후속 군수가 결정된 2030년까지 미국 공군의 주력기이다"라고 주장했다.


전투기의 눈과 귀라고 할 수 있는 레이더도 기술 평가에서 논쟁이 되고 있다. 라팔이 전자 주사 능동형 레이더를 장착하고 있는 데 비해 다른 전투기들은 기계식 레이더를 달고 있다. 라팔의 전자 주사 능동형 레이더는 적외선 추적 시스템과 카메라 기능을 하는 광학 장치의 도움을 받아 적기는 물론 지형·기상 정보 따위를 수집·분석할 수 있다.


라팔측은 미국의 최신형 전투기 F22 랩터와 F15J의 후속 기종인 일본의 F2가 전자 주사식 능동형 레이더를 채택했다며, 능동형 레이더는 21세기 전투기의 필수품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해 보잉의 제임스 슐리터 커뮤니케이션 이사는 "능동형과 수동형 레이더가 어떤 차별이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국이 원한다면 능동형 레이더를 부착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국방부의 한 관계자는 "능동형이든 수동형이든 모두 ROC(요구 성능)를 충족한다. 레이더가 기종 선정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라고 레이더 논쟁을 일축했다.


절충 교역 면에서도 라팔과 타이푼측은 매우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다소가 가장 적극적이다. 한국이 라팔을 선택하면 다소는 해외에 수출할 라팔의 부품 생산을 한국에 맡기는 것은 물론 레이더와 엔진 생산 등에도 참여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거기다 다소 사가 제작하는 민간 항공기인 팰컨 생산에도 한국을 참여시킬 것이라고 말한다. 팰컨은 개인용 항공기 시장을 미국과 함께 양분하고 있는 다소의 주력 제품이다.


이런 유럽 항공사의 적극적인 공세에 맞서기 위해 보잉 사는 항공기와 무기 시스템 설계, 테스트, 운용과 관리 등 전투기 개발과 관련한 28건의 기술 이전 프로젝트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미국은 미국 정부가 무기를 보증·판매하는 해외무기판매방식(FMS)으로 FX 사업에 뛰어들었으므로 기술 이전이 말처럼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FMS로 무기를 구입하면 상용 구매와 달리 무기 체계의 모든 것을 미국에 일임하고, 인도받은 이후 관리·보수도 미국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군에서는 FX 사업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FMS에 얽매이지 말고 상용 구매의 기초를 닦아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왼쪽 상자 기사 참조).


기종 선정 평가를 절반 가량 끝마친 현재, 군 내부에서는 F15와 라팔로 후보가 압축되고 있다. 타이푼은 공대지 기능을 갖춘 전투기가 2007년에나 양산될 예정이어서 탁월한 성능에도 불구하고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


한·미 관계로 인해 F15가 역전할 수도


라팔은 기술력과 절충 교역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점수는 라팔에 뒤졌지만 F15는 이미 실전에서 검증받은 전투기인 데다 한·미 관계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다. 국회 국방위의 한 의원은 "라팔의 성능과 기술 이전에 고개를 끄덕이던 장성들도 95% 이상이 미국 무기인 기존 공군력과 상호 운용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다소측은 "프랑스는 나토군으로서 미군과 성공적으로 코소보 폭격을 수행했다. 상호 운용성에 문제가 없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군이 아무리 합리적인 평가를 통해 기종을 선택해도 마지막 낙점은 정치 바람을 탈 가능성이 있다. 과거 군이 F18로 결정한 것을 청와대가 F16으로 뒤집은 KFP 사업이 대표적이다. 특히 미국이 아프카니스탄 공습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통해 세계 질서를 재편하려는 과정에서 우리 정부에 압력을 행사할 가능성을 우려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FX 사업처럼 무기 도입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된 적은 없었다. 예전 같으면 입찰 형식을 빌려 들러리를 세운 뒤 미국 무기를 비싸게 사도 별 말이 없었다. 하지만 10년에 걸쳐 진행되어온 FX 사업은 언론에 노출되었고, 미국 전투기가 다른 전투기의 견제를 누를 만큼 성능이 뛰어나지 않아 경쟁이 치열해졌다. 경쟁이 치열한 만큼 얻을 것도 많아 군과 정부가 방위력을 증강할 좋은 기회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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