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 19 여순 '영화 불발' 사건 내막
  • 나권일 광주 주재기자 (nafree@e-sisa.co.kr)
  • 승인 2001.10.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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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53주기 기념 다큐〈애기섬〉,
〈월간 조선〉등 '색깔 시비'로 상영 무산
여순사건 53주기를 맞아 화해를 도모하려고 추진되었던 다큐멘터리 영화 〈애기섬〉 상영이 끝내 무산되었다. 영화 〈애기섬〉은 지난해 7월부터 촬영에 들어가 올해 9월까지 모든 제작을 마치고 10월19일부터 여수와 순천에서 상영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안보 단체들의 딴죽걸기에 시달리다가 〈월간 조선〉이 제기한 '색깔론'에 휘말리면서 상영은 물론 제작을 마치기도 어렵게 되었다. 영화에 대한 국방부의 장비 지원을 '국군 지휘부의 자해 행위'라고 보도한 〈월간 조선〉 10월호는 현재 시중에서 사 볼 수 없다. 법원이 김동신 국방부장관의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김장관은 〈월간 조선〉에 5억원 손해배상 청구 소송까지 낸 상태이다.


애기섬은 경남 남해군에 있는 무인도인데, 여순사건 뒤 보도연맹원 100여명이 학살된 곳으로 알려졌다. 영화는 순천대 사학과 홍영기 교수의 안내로 관련자들을 찾아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형태이다. 한 가족의 비극을 재현해 가해자와 피해자의 화해를 모색하는 80분짜리 작품이다. 감독은 순천에서 영상제작업체 '미디어 인'을 운영하는 장현필씨가 맡았다. 여순사건을 다룬 최초의 영화로서 순천과 여수 지역 상영은 물론 국내 인권 영화제에 출품할 의도로 제작비 1억 3천여만원을 투입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제작 단계에서부터 파란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 여수·순천시재향군인회와 상이군경회 등 15개 단체는 공동성명을 내고 영화가 역사를 왜곡할 가능성이 크므로 시나리오를 공개하고 사전에 시사회를 열어 검증 절차를 밟으라고 요구했다.


영화 제작 소식을 들은 군의 향토 사단 역시 영화 제작진을 찾아 국방부의 우려를 전달했다. 이 과정에서 애초 계획했던 시나리오가 일부 변경되었고, 여순사건을 제대로 다루어 보겠다던 기획 취지도 차츰 훼손되기 시작했다. 그 대신 군부대가 협조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전남지역 향토 사단은 영화 제작을 위해 헬기 1대와 군용 트럭 4대, 그리고 100명분 군복과 소총을 지원해 과거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영화 제작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날아온 폭탄에 풍비박산이 났다.


〈월간 조선〉 10월호가 '여순 14연대 좌익 반란사건을 통일운동 성격을 띤 것처럼, 국군의 진압을 양민 학살로 부각하고 국군이 함포 사격으로 양민 천명을 죽였다고 조작한 영화 제작에 헬기·트럭 등 군장비를 지원했다'며 국군 지휘부가 자해 행위를 하고 있다고 비난한 것이다.


한나라당은 〈월간 조선〉 보도와 관련해 9월 18일 논평을 내고 현정권의 역사관과 안보관에 우려를 표명하며 김동신 국방부장관 사퇴를 주장했다. 결국 홍보 명목으로 영화제작비를 각각 2천만원씩 지원하려던 여수시와 순천시는 불똥이 튈 것을 우려해 예산 지원을 보류했다. 장현필 감독은 "〈월간 조선〉을 언론중재위에 제소하고 영화 제작에 끼친 피해에 대해 손해 배상을 청구하겠다"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여수재향군인회 "〈월간 조선〉 기사는 일방적"




영화 제작이 무산된 데 대한 여수·순천 지역 주민의 반응은 여러 갈래다. 여순사건 자료 조사에 협조한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영일 소장은 "고등학교 국정 교과서에도 '여수 순천 10·19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회단체와 연구 학자들이 50년 만에 어렵게 바로 세운 '여순사건'을 〈월간 조선〉이 다시 '여순 반란 사건'으로 만들어 놓았다. 〈월간 조선〉은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 하고 있다"라고 한탄했다. 지역 사회의 민감한 정서 때문에 사건 발생 53년이 지난 올해 겨우 출범한 여순사건 유족회 여수지역 회장 김상태씨는 "유족의 아픔을 이해한다면 더 이상 색깔론으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라며 분노했다.


여수재향군인회 김진수 사무국장은 안보 단체 간부들이 시사회를 가진 뒤 문제 없다고 판단되면 일반에 상영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그는 또 "지역 안보 단체들도 반공 영화 비슷한 냄새가 나도록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 〈월간 조선〉 기사는 기자가 지역의 정황을 알아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자기 의견을 쓴 것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순천 지역의 한 안보 단체 간부는 "영화 상영은 절대 안된다. 참전 군인은 대부분 같은 생각이다"라며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53년 만에 봉합되어 가던 여순 주민의 환부는 다시 터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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