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이라고 할 말 못할소냐
  • 차형석 기자 (papapipi@e-sisa.co.kr)
  • 승인 2002.0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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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협, 부당·편중 인사에 집단 반발…‘인사 개혁’ 성과 얻어내
지난해 9월6일, 제2회 ‘부평을 빛낸 공무원상’을 받고 포상으로 중국 여행을 1주일간 다녀온 공무원 박준복씨는 귀국하자마자 황당한 일을 당했다. 부평구청에서 남동구 만수3동으로 가라는 구청간 인사 발령이 사전 통보 없이 9월3일자로 나 있었던 것이다.




박씨는 주변으로부터 인정받던 공무원이었다. 20여 년 공직 생활의 공로로 2000년 11월에는 행정자치부가 주는 ‘청백봉사상’을 받기도 했다. 청백봉사상은 6급 이하 수상자에게는 특별 승진은 물론 본인이 원하는 부서에 갈 수 있는 특전까지 주어지는 상이다.


발령이 나자 부평구청에서는 ‘그간 내부 고발을 많이 했던 박씨에 대한 보복 인사가 아니냐’ 하는 뒷말이 많았다. 박씨가 구청장 업무추진비를 문제 삼고, 사회복지시설 아동숙사 개·보수 공사가 잘못되었다고 내부고발센터를 통해 시정을 요구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평구 공무원직장협의회(공직협)도 즉각 성명을 발표했고, 전체 공무원의 절반이 넘는 4백30여명이 서명 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지난해 12월12일 박씨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인사 발령을 철회해 달라는 진정서를 냈다. 그리고 부평구청 감사실이 운영하는 내부고발센터에도 시정을 요구했다. 박씨는 “법적 방법을 통해서라도 끝까지 원상회복 조처를 받아내겠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구청 관계자는 구청간 교류 차원의 정당한 인사였다고 말하면서도 “오해할 부분이 없지는 않다”라며 말끝을 흐렸다.


서울시, 승진 심사 기준·심사위원 공개


공무원 사회가 변하고 있다. 억울한 일이 있어도 참기만 했던 ‘참을 인(忍)자’ 공무원은 이제 옛말이다. 박씨처럼 제 권리를 찾는 ‘능동형’ 공무원이 점점 늘고 있는 것이다. 조직에서도 변화의 물결은 나타나고 있다. 6급 이하 하위직 공무원 모임인 공직협도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인사가 있을 때마다 끊임없이 뒷말이 나오면서도 아무런 대응이 없었던 ‘인사 복지부동(伏地不動)’의 공직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다.


지난 1월10일 3시 서울특별시청 1층 소회의실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서울시와 공직협 관계자들이 3급 공무원 승진 심사에 대해 협의하는 자리였다. 이희세 서울시 공직협 회장이 “3급 이상 공무원 승진 심사 대상자를 사전 공개하라. 5급 이하는 이미 공개하고 있다”라고 공격하자, 서울시측은 “인사권자 고유 권한이다. 인신 공격 등 부작용이 따를 수 있어 사전 공개는 불가능하다”라고 반격했다.




논란이 시작된 것은 서울시가 지난 1월4일 3급 승진 대상자 명단을 발표하면서부터. 명단이 알려지자 시 홈페이지에는 인사에 대한 불만이 쏟아졌다. 공직협 또한 문제점을 지적하며 ‘심사 기준을 밝히고, 심사 대상자를 사전 공개하라’는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임용 출신별 불균형이 심하다는 것이었다. 이번에 승진한 10명을 출신 별로 보면, ‘유신 사무관’ 4명, 고시 출신 3명, 특채 출신 2명, 일반직 출신 1명이다. ‘유신 사무관’은 군사 정권 시절 5급 공무원으로 특채된 육사·공사·해사 출신들을 지칭하는 비공식 용어이다. 이회장은 “일반직 공무원 4만5천명 중 3급으로 승진한 사람은 1명뿐이다. 지나치게 불균형한 인사다”라고 말했다.


서울시는 처음에는 자치단체장의 고유 권한인 인사권을 직원들이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고수했지만 공직협 쪽에서 집단 행동에 나설 움직임을 보이자 심사 기준과 심사위원 명단을 공개하며 진화에 나섰다. 1월10일 양측은 이 날 협의한 내용을 시장에게 전달하고 앞으로 있을 인사에서 최대한 반영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서울시 인사 관계자는 “공직협과 협의한 내용을 시장에게 보고하고 앞으로 타협점을 찾아가겠다”라고 말했다. 이희세 공직협 회장은 “상위직 공무원 인사에 중·하위직 공무원들의 의견이 반영됐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앞으로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와 공동으로 ‘인사 공개 운동’을 전개하겠다”라고 밝혔다.


인사 개혁 운동이 활발한 것은 비단 서울만이 아니다. 경기도 오산시에서는 지난해 8월 ‘낙하산 인사’ 반대 운동이 있었다. 당시 오산시에는 조직 개편에 따라 국장급 2명과 과장급 4명에 대한 신규 인사가 있었다. 오산시는 절반은 경기도청에서 승진한 공무원으로 임명하려 했다. 공직협은 지자체의 자율성을 저해하는 낙하산 인사라고 반발하며 성명서를 내고 침묵 시위를 벌인 끝에 결국 ‘부분 철회’ 약속을 받아냈다. 김원근 오산시 공직협 회장은 “그전에 하위직 공무원은 인사에 대해 아무 소리도 못했다. 지금은 시청측에서도 공직협을 대화 파트너로 받아들이는 추세다”라고 말했다.


근무하고 싶은 상사와 근무하기 싫은 상사 뽑아


광주 북구에서는 지난해 10월 초 공직협에서 하위직 공무원을 상대로 ‘이색 설문 조사’를 실시해 그 결과를 구청장에게 전달했다. 청렴도·리더십 등 여러 항목을 기준으로 가장 근무하고 싶은 상사와 가장 근무하기 싫은 상사를 뽑아 순위를 매긴 것이었다. 설남술 북구 공직협 회장은 “구청장은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다른 결과가 나왔다고 깜짝 놀랐다. 간부들도 이 결과에 민감하게 반응해 실제 근무 태도가 달라지는 효과도 있었다”라고 말했다. 북구는 승진 후보자 명단 공개를 포함한 11개 항의 공직협 인사 참여안에도 합의했다.


정부가 도입한 다면평가제도 하위직 공무원들로부터 호응을 받고 있다. 창원시에서는 1월 초 상급자뿐만 아니라 동급자·하급자가 인사 대상자를 평가하는 다면평가제를 실시했다. 상급자 40, 동급자 30, 하급자 30 비율로 다면평가위원을 구성했고 공직협이 추천한 5명이 평가위원으로 들어갔다.

강창구 창원시 공직협 사무차장은 “이번 인사는 ‘될 사람이 됐다’는 분위기다. 상사한테 잘 보여야만 승진하는 것은 아니라는 인식도 자리 잡고 있다”라고 말했다. 창원시는 공직협과 협의해 직위 선호 공모제를 실시하기도 했다. 직원들이 선호하는 ‘노른자위 자리’에 대해 같은 급수 공무원들의 공개 신청을 받는 제도이다. 공직협이 공모자를 심의해 의견을 제출하는 과정을 거치는 이 제도는 하위직 공무원들의 의사를 대폭 반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호응을 받았다.


박재범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총연합 정책기획실장은 “민간 기업에서는 임금과 근로 조건 에 관심이 많지만, 공무원 사회에서는 투명한 인사에 대한 열망이 가장 높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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