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땡땡이 쳐도 놀 데가 없는 걸요”
  • 차형석 (papapipi@sisapress.com)
  • 승인 2002.0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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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 1번지’ 대치동 24시 현장 취재/소규모 위주로 160여 개 밀집…유흥 시설 거의 없고 분식집도 드물어
지난 1월 초순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서 강남구 대치동으로 이사한 우성희씨(44·가명)는 1주일 동안 대치동 학원가를 돌아다녔다. 중3짜리 아들이 다닐 학원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아파트 값이 20% 정도 오르는 바람에 부담스러웠지만 대치동이 교육 환경이 좋다고 해서 금세 결심했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우씨가 ‘맹모삼천(孟母三遷)’을 감행한 대치동의 부동산 가격은 지난해 12월부터 들썩들썩했다. 대치동 인근 도곡동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재건축에 대한 기대감이 집값을 20∼30% 끌어올렸다. 대치동 사교육 열풍이 부동산 투기 바람을 일으켰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투기 조짐을 우려한 정부가 지난 1월8일 세무 조사 등 집값안정대책을 내놓은 후 지금은 소강 국면에 들어간 상태. 대치역 부근에 있는 한 공인중개업소 대표는 “매물이 거의 없다. 집 팔려는 사람은 집값이 오를 것이라 기대하고, 사려는 사람은 내릴 것이라 여겨 거의 거래가 끊겼다”라고 말했다.



전문직 중산층 동네…한의원·증권사·학원 많아



학원 1번지 대치동에는 단과 학원과 보습 학원을 합쳐 입시 학원이 1백60여 개나 있다. 지하철 3호선 대치역에서 신대치 사거리까지 학원 한두 개가 안 들어선 건물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한의원과 증권사도 유난히 눈에 많이 띈다. 대치역 근처에서 5년째 한의원을 해온 한 한의사는 “건강·재테크·교육에 대한 관심이 많은 30~40대 중산층이 많이 사는 곳이 대치동이다”라고 말했다.



‘대치동 학원 전성시대’가 열린 가장 큰 이유는 이곳에 은마·미도 등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있기 때문이다. 대치동에서 10여 년간 학원을 해온 한빛학원 김장천 원장은 “대치동이 학원 1번가로 떠오른 게 3∼4년은 되었다. 대치동 아파트 단지에 사는 사람 가운데는 학력 수준이 높은 전문직 종사자가 특히 많다. 교육열이 높을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소규모 학원 위주로 학원가가 이루어진 것도 특징이다. 지난해 12월 초, 강동구에서 학원을 하다가 대치동에 영어 전문 학원을 연 한 학원장은 “다른 지역에서는 맹주 격인 큰 학원이 학생들을 독점한다. 소규모 그룹 학원이 잘 될 만한 곳은 대치동뿐이다”라고 말했다. 학부모들이 대형 강의실에서 애들이 강의받는 것을 싫어하고, 한 반에 10명에서 15명 정도 되는 소규모 강의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학원들이 속속 들어서다 보니 수강생 관리도 남다르다. 한 입시 학원은 지난 1월16일 학부모와 수강생을 상대로 성격 유형 심리 검사인 MBTI검사를 시행했다. 개인의 성격 유형을 파악해 진로 지도에 적용하고, 공부를 둘러싼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까지도 학원이 해결해 주겠다는 취지였다. 마케팅 수단으로 입시 학원이 성격 검사까지 시행한 것이다.



대치동은 ‘놀 만한 장소’와도 분리되어 있다는 점도 특이한 사항이다. 여관·단란주점 같은 유흥 시설이 없을 뿐 아니라 학생들이 주로 모이는 곳에 있기 마련인 패스트 푸드점도 찾아보기 힘들다. 1월18일 오후 3시, 대치역 주변에 있는 한 햄버거 체인점에도 학생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학원 광고 전단을 앞에 두고 입시 전략을 짜는 학부모들의 모습만 눈에 띄었다. 학생들이 많은 동네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분식집도 대치동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갈 만한 놀이 시설이라고는 PC방 정도가 고작이다.


이준호군(18·가명)은 “학원을 땡땡이 쳐도 갈 만한 곳이 마땅치 않다. 차라리 놀려면 강남역으로 가든가 아니면 코엑스몰로 간다”라고 말했다. 박영민 은마파출소장도 “관내에선 청소년 범죄라고 할 만한 사건이 거의 없다”라고 말했다.



파출소장 “관내에 청소년 범죄는 없다”



학원 타운이 형성되면서 유아·초등학생을 상대로 한 전문 학원도 적잖이 늘어났다. 정소영씨(34·가명)는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딸을 초등영어 전문 학원에 보냈다. 주 3회 2시간 수업에 23만원. “이쪽 주민들을 보면 외국 체류 경험을 가진 경우가 상당히 많다. 나같은 토종 엄마가 드물다. 주변에서 다 하는데 나만 안 할 수 있나”라고 그녀는 말했다. 정씨의 딸이 다니는 학원 선생의 절반은 외국인이다.



1월17일 오전 8시50분. 신대치 사거리에 있는 ㅎ학원 앞에 학생들을 태운 차가 속속 도착했다. ‘학원’ 마크가 찍힌 25인승 승합차와 대형 버스 그리고 승용차이다. 승합차에서 내린 중3 김승수군(가명·15)은 부슬부슬 내리는 겨울비를 피해 급히 학원으로 들어갔다. 고1 예비 연합반을 다니는 김군에게 ‘늦잠 잘 수 있는’ 방학은 없다. 김군은 오후 2시50분까지 학원에서 다섯 과목을 듣고 집에 갔다가 다시 집 근처 영어 학원에 가야 한다.





1교시가 끝나면 김군은 바로 책상에 엎드린다. 학원에 매일 가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고, 부족한 잠을 쉬는 시간에라도 보충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에 있는 10명 남짓한 학생들이 책상에 기대어 잠에 빠졌다.
고3에 올라가는 김숙현양(19·가명)은 “우리 반에 학원 안 다니는 학생은 없다”라고 확언한다. 김양 역시 이번 겨울방학 때 국어·영어·수학·사회탐구·과학탐구 등 여덟 과목을 학원에서 듣는다.


수요일·금요일에는 밤 12시에 학원 수업이 끝난다. “주 3회 수업이 많아 하루 평균 6시간 정도 수강한다.” 김양은 다른 친구들보다 학원 수업을 적게 듣는 편이라고 한다. 김양은 이번 방학 때는 학원 일정이 달라 친구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친구들과 어울리면 공부하는 데 지장이 있을까 봐 학원 일정을 일부러 따로 잡았다.



김양의 어머니 송재숙씨(가명·49)는 사탐은 ㅅ선생, 과탐은 ㅇ선생이 유명하다며 과목마다 구체적으로 어떤 학원 강사가 유명한지 술술 짚어냈다. 지난해 대학에 들어간 맏아들 뒷바라지를 할 때 이미 다른 학부모들과 정보 교환을 충분히 했기 때문이다. 이쯤은 대치동에 사는 어머니들에게는 기본이다.



유명 강의 등록하려고 어머니가 밤새워



유명 강사의 강의에 등록하려고 밤 9시부터 다음날 아침 6시까지 학원에서 기다리기도 했다. “나도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엄마들이 밤새 줄 서서 학원증 끊는 것을 보면서 극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코앞에 입시가 다가오니까 달라졌다.” 송씨는 이번 방학 때 학원비로 한달에 1백50만원을 지출했다. 이 정도면 대치동에서는 결코 많이 쓰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남편이 대기업 임원이라도 부담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비용을 줄일 생각은 없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집값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편이다. 당분간 이곳을 떠날 계획은 없다. “아파트값이 오른다니 집을 가진 처지에서야 좋기는 하지만, 팔 생각이 별로 없어 관심을 두지 않는다”라고 송씨는 말했다.



한 달에 학원비로 5백만원을 쓴 경우도 있다. 장정자씨(46·가명)는 “시간 여유가 있는 방학 때 집중 투자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아들은 주로 10명에서 15명씩 팀을 이루어 수업하는 보습 학원에서 공부한다. ‘사회 탐구 네 과목 80만원, 과학 탐구 네 과목 80만원, 언어영역 세 과목 55만원….’ 왜 이렇게 많이 듣게 하냐고 묻자 장씨는 ‘불안해서’라고 대답했다. 장씨의 아들은 아침 8시부터 밤 12시까지 학원을 다닌다고 했다.



1월17일 밤 11시, 수강생 2백여명이 들어찬 대치동 ㄷ학원 강의실은 땀이 날 정도로 열기가 후끈했다. 유명 강사 ‘손사탐’ 선생의 사회탐구 강의였다. 10분간 휴식 시간, 학생들은 매점에서 컵라면으로 허기를 때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치동 ㅇ아파트에 사는 김지영양(19·가명)은 “뒤에서는 집중이 안돼 친구 5명이 돌아가면서 1시간 정도 먼저 와 앞자리를 맡는다. 친한 친구들끼리 같이 수강증을 끊었다”라고 말했다.




대치동이 학원 1번지로 전국에 알려지면서 강의를 듣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도 있다. 강의중 지방 학생 손 들어 보라는 말에 7명이 손을 들었다. 울산에서 올라온 박소현양(19·가명)도 손을 번쩍 들었다. 올해 고3에 올라가는 박양은 “사탐 과목이 약해 고민이었다. 울산에는 사탐 배울 학원이 없어 대치동 이모네 집에서 지내며 공부하기로 했다”라고 말했다.


국어 전문 학원에서 언어 영역 수업도 듣는 박양은 나머지 시간은 독서실에서 자습을 한다. “학원 시설이 잘 돼 있어 솔직히 부럽다. 애들도 진짜 열심히 하는 것 같다. 학교 보충 수업에 빠졌지만 잘한 것 같다.” 박양은 2월4일 개학 전에 울산으로 내려갈 예정이다.



‘손사탐’ 강의가 끝난 시간은 0시50분. 학원 밖에 있는 8차선 도로 중 2차선은 승용차로 꽉 차 있다. 아이들을 태워 가려는 학부모들이 몰고온 승용차가 70대는 넘어 보였다. 학생과 학부모, 승용차가 뒤엉켜 10분 정도 진풍경을 연출했다. 승용차들이 사라지자 거리에는 인적이 끊기다시피 했다. 학원 강의실에 불이 꺼지자 대치동에 비로소 밤이 찾아왔다. 차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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