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상은 줄고 속병 늘어 ‘골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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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2.0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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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환경 변화로 새로운 산재 속속 발생…정신질환에 의한 ‘사고’ 폭증
석기 시대에는 원시 인류가 돌을 다듬어 석기를 제작하다가 손가락을 다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청동기 시대에는 무거운 돌을 날라 고인돌을 만드는 현장에서 어깨나 다리 등에 중상을 입는 일도 있었다. 이런 사고들을 현재의 기준으로 평가하면 산업 재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산업폐기물 중간처리업체 노동자가 처리 과정에서 생긴 유독 물질에 노출되어 전격성 간염에 걸린 사례가 처음으로 보고되었다. 깜짝 놀란 노동부는 올해 1월부터 2천여명에 달하는 전국 산업폐기물 중간처리업체 노동자를 상대로 실태 조사에 들어갔다.


인천항에서는 10년째 방역 작업을 해오던 노동자가 손발 저림 증세를 보여 역학 조사를 벌인 결과, 수입 원목 및 식물 소독 작업 때 사용하는 메틸브로마이드에 중독된 사실을 확인했다. 새로운 노동 현장에서 새로운 직업병이 발생하고 있다.





노동이 시작되면서부터 현장에서 사고는 늘 발생했다. 노동을 사고 팔고, 자본과 노동이 분리되는 시대를 거쳐 새로운 직업이 나타나고, 작업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인류 앞에는 늘 새로운 형태의 산업 재해가 모습을 드러낸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산재 사고라고 하면 인체의 외형에 악영향을 미치는 사고가 대부분이었다. 대형 유조선 건조 과정에서 철판 용접을 하다 떨어져 사망하거나, 안전모를 쓰지 않은 채 작업하다가 벽돌에 머리를 다치거나, 프레스에 찍혀 손가락이 잘려 나가는 것 정도였다. 이런 사고는 위험에 정면으로 노출된 생산직 노동자에게서 많이 발생했다.


그러나 기술 발달과 산업 현장에서의 안전 의식이 강화됨에 따라 외상 사고는 점차 줄어드는 대신 이번에는 과로나 스트레스에 기인한 심장질환 및 뇌혈관질환 등 내인성 사고가 노동자들을 괴롭히고 있다.



생산직에서 사무직으로 산업재해 ‘중심 이동’



뇌출혈·뇌경색·뇌종양 등 각종 뇌혈관질환에 의한 직업병이 늘고 있다. 심장마비·심근경색증·동맥경화와 협심증·허혈성심질환 등 심장질환 사고도 증가하고 있다. 돌연사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그 원인을 정확히 찾아내기 힘든 청장년 급사 증후군과 한국 사회의 특성에서 말미암은 각종 간질환에 의한 산재 사고 역시 현저하게 늘었다. 작업 현장에서 발생하는 소음이나 분진·화학물질에 노출되어 직업병에 걸리는 노동자도 많다.



정신질환에 의한 사고가 폭증하는 것도 우리 시대의 한 특징이다. 견디기 힘든 과로나 스트레스, 업무상 경쟁 의식과 중압감, 또 승진에서 처질지 혹은 해고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기인한 업무상 자해나 자살 사례도 증가하고 있다. 법원은 이제 이런 ‘불행’도 업무 기인성 등 일정한 요건만 충족되면 업무상 사망으로 인정한다. 이렇게 보면 산재는 생산직 노동자에게서 사무직 노동자에게로, 외상 중심에서 내상 중심으로, 1회적인 사고에서 장기적이고 누적적인 사고로 서서히 옮겨가는 과정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전의 질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외상성 질환이나 근골격계 질환이 당연히 줄 것으로 예상했지만, 단순 반복 작업을 하는 은행 창구나 자동차 조립공장 또한 컴퓨터를 사용하는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근골격계 질환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 세상이 변하고 노동 환경이 변하고 직업이 변화했지만 산업 재해나 직업병의 가짓수는 줄어들기는커녕 늘어만 간다. 노동 현장에서 인간다운 삶을 확보하는 것, 그것은 변함 없이 우리 시대의 과제이다.

최재천 (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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