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언니 좀 살려 주세요”
  • 고제규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2.03.0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엄마 살해’한 여고생 동생, 구명 운동 벌이다 자살 기도…피의자는 진술 번복
지난 2월16일 오후 3시30분, 서울 명동의 고층 빌딩 옥상에서 여고생이 자살 소동을 벌였다. 그녀는 두 다리를 난간 밖으로 내밀고, 건물 아래로 뛰어내리려 했다. 위기 일발의 순간에 긴급 출동한 119 구조대가 그녀를 구출했다. 이은영(가명·18). 자살을 기도한 소녀는 지난해 어머니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이정은씨(가명·20) 동생이다. 당시 언론은 정은씨를 패륜아로 매도했다. 어머니가 과외비를 주지 않자 살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사저널>은 존속 살해의 이면에 가정 폭력이 드리워 있음을 밝혀 냈다(<시사저널> 제630·631호 참조).


‘이제 두렵지 않다. 절망스러울 뿐이다. 우리 언니 좀 살려달라고 나 좀 살려달라고 외쳐댔다. 하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자살을 기도한 은영이는 유언장과 같은 글을 인터넷에 남겼다. 그녀의 글은 인터넷을 통해 청와대와 각종 시민단체 사이트로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은영이는 이 글에서 언니가 어머니를 살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경찰의 강압 수사로 언니가 허위 자백을 했다는 것이다.



언니 문제로 아버지와 다툰 뒤 가출





지난해 11월3일 정은씨는 이민수씨(가명·38)와 함께 ‘학원장 살해 사건’ 용의자로 체포되었다. 당시 경찰은 학원장 살인 사건의 주범으로 이민수씨를 지목했다. 정은씨는 단순히 주변을 살펴주고, 시체 유기를 도운 혐의였다. 경찰은 닷새 뒤 11월8일 존속 살해 혐의로 정은씨를 긴급 체포했다. 지난해 2월9일 정은씨 어머니 노 아무개씨(48) 변사 사건 용의자로 그녀를 체포한 것이다. 조사 과정에서 물증은 없었다. 정은씨의 자백만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검찰 조사 과정에서 그녀의 진술이 바뀌었다. 검찰로 송치된 뒤 그녀는 엄마 살해 부분을 부인했다. 게다가 자기가 학원장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결국 검찰은 정은씨를 엄마 살해와 학원장 살인의 주범으로 기소했다. 조사 과정에서 또 다른 변수도 발생했다. 지난해 12월5일 수감된 그녀가 아버지 이 아무개씨(50)를 성폭행 혐의로 고소했다. 이에 대해 검찰은 각하 결정을 내렸다. 담당 검사는 “아버지를 불러 조사했지만 혐의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성폭행 고소 사건이 벌어지면서 아버지와 정은씨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이 과정에서 동생 은영이마저 지난 1월19일 집에서 가출했다. 언니를 두둔하다 아버지와 심하게 다툰 뒤였다. 현재 은영이는 천주교 인권단체가 마련한 쉼터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동안 은영이는 언니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인천의 한 여성단체가 정은씨를 변론하겠다고 나서 3명의 공동 변호인단이 꾸려졌다. 하지만 변호인단과 정은씨는 곧 갈라섰다. 1월18일 첫 재판이 열리기 이틀 전이었다. 변호인단이 정은씨 진술에 일관성이 결여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은영이는 또다시 언니 구명에 나섰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은영이는 자살 기도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이제는 살 수 있는 길이 없다. 정말로 죽는 길밖에 없다. 언니가 보고 싶다’라고 그녀는 글을 끝맺었다.



자살을 기도했던 은영이는 다행히 정상을 되찾았다.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있던 그녀가 지난 2월22일 기자와 전화 통화에서 “괜찮다. 회복되었다. 공부는 계속하겠다”라고 말했다. 은영이는 인천 ㅇ여고에서 전체 1∼2등을 다투는 모범생이다. 3월이면 고등학교 3학년이 된다. 올해 은영이의 앞길이 더 험난해 보인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