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가 몸부림친다
  • 권은중 기자 (jungk@sisapress.com)
  • 승인 2002.05.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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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조·조직·인사 ‘대변신’ 시도…안티조선운동·세무조사·노풍에 ‘위기’ 느껴



<조선일보> 5면에는 <만물상>이라는 칼럼이 있다. 200자 원고지 6장 분량인 이 칼럼은 1면 <팔면경>·7면 <이규태 칼럼>과 함께 <조선일보>에서 가장 오래된 고정 난이다. 오래된 만큼 이 칼럼은 정형화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칼럼 첫머리에 역사적 사실을 끄집어내 설명하다가 마무리에서 최근 상황을 한두 줄 덧붙여 현실을 비꼬는 것이다. <중앙일보>의 <분수대>나 <동아일보>의 <횡설수설>도 비슷한 스타일이다.


그런데 4월21일자 ‘책과 TV’라는 제목의 <만물상>은 이 틀을 깼다. 이 날 <만물상>은 MBC 텔레비전의 한 프로그램이 책 소개를 해서 베스트 셀러를 만들고 있는 현상을 외국과 견주어 칭찬했다. <조선일보>가 MBC와 여러 건 소송을 진행 중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일이다. <조선일보>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사에서 ‘PD들이 문화 권력을 잡으려고 한다. 개그맨이 책 소개를 해 신뢰도가 떨어진다’라며 이 프로그램을 신랄하게 비판해 왔다.


이 작은 변신은 4월17일 논설위원실 인사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일보>는 문화부 김광일 차장, 정치부 박두식 기자, 국제부 이한우 기자를 논설위원에 임명하는 인사를 단행했다. 이들은 전문성 있고 글 잘 쓰기로 사내에 정평이 나 있다. 하지만 차장급은 물론 30대 평기자를 논설위원으로 발령한 것은 언론계에서 보기 드문 일이다.


논설위원실의 파격 인사는 이미 지난 3월1일에 12년간 주필을 지낸 김대중 주필을 편집인으로 승진시켜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고 대신 40대 초반인 통한문제연구소 김현호 소장을 논설위원으로 임명할 때부터 예고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조선일보> 논설위원실은 안팎으로부터 비판을 받아왔다. 일부 기자들 사이에서는 논설위원을 성형외과 의사에 비유하면서 ‘왜 한나라당 얼굴을 예쁘게 만들려고 해서 신문의 체면을 구기느냐’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비판 대상의 정점에는 김대중 주필이 있었다.


<조선일보>의 변화는 이뿐만이 아니다. 이 회사는 최근 20억원을 출연해 미디어연구소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이 연구소는 앞으로 신문 제작과 언론사 경영 전략을 연구할 계획이다. 또 지난 4월1일 독자권익보호위원회를 발족했다. 자사의 보도로 피해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반론·정정 보도를 요청하면 이 위원회가 반론 보도 게재 여부를 심사한다.


<조선일보>의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은 방상훈 사장이다. 방사장은 그동안 방우영 회장의 그늘에 가려 있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지난해 수감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나는 고초를 겪은 뒤 방사장은 사내 입지가 훨씬 탄탄해졌다. 방사장은 지난 3월 김대중 주필의 2선 퇴진으로 요약되는 임원진 인사를 단행하고 ‘안방 체제’를 구축했다.


방사장은 이미 올해 신년사에서 “언론이 다른 의견을 무시하고 나와 같은 논리만을 우대하는 것은 독자의 한쪽 눈을 가리는 오만한 태도다. 기본 이념과 철학을 지키면서 우리와 다른 다채로운 견해를 적극 수용할 것이다”라고 말해 논설위원실에 변화가 있을 것을 예고했다.





“6개월 뒤에는 확 달라질 것이다”


논조의 변화도 점쳐진다. 방상훈 사장은 지난 4월10일 한국기자협회 이상기 회장과 만난 자리에서 햇볕 정책을 원칙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혀 관심을 끌었다. 그동안 조선은 정부의 햇볕 정책을 강하게 비판해 왔다. 방사장은 이 날 “6개월만 지켜 봐라. <조선일보>가 놀랄 만큼 달라질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따라서 지면도 좀더 유연해질 전망이다. 한 간부는 “지금까지 우리 논조는 시야가 좁고 조잡했다. 과학적 데이터와 논리로 사안에 접근하겠다”라고 말했다. 한 기자는 “원칙이 바뀌지는 않지만 보수의 스펙트럼이 넓어질 것이다. 지금까지 조선이 고수한 입장은 너무 경직되어 있었다”라고 말했다.


<조선일보>가 변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오래 전부터 내부에서 존재했다. 송희영 사장실장은 “독자층의 변화가 가장 직접적인 이유다. 변해야 산다는 사내 합의가 이루어진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라고 말했다. 편집국의 한 기자는 “지난해 세무 조사와 안티조선운동이 벌어지자 우리가 왜 이렇게 몰리는가 하고 반성을 많이 했다. 그 고민의 결과가 최근 나타나고 있다”라고 말했다. 정치부의 한 기자는 “<조선일보>가 세무 조사를 받지 않았다면 이 모든 일이 1년 전에 일어났을 것이다”라고 아쉬워했다. <조선일보>에서 1월부터 두 달간 인턴 생활을 했던 대학생 기자들의 도발적인 문제 제기도 편집국에 신선한 울림을 주었다(박스기사 참조).


노무현 역풍·내부 반발로 ‘개혁’ 실패할 수도


하지만 편집국 기자 중에는 역풍이 불까 걱정하는 이들이 있다. 곧 시작될 대선 정국에서 노후보가 <조선일보>를 공격할 경우 노후보와 싸우느라 변신할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다. 내부의 매파가 방사장의 개혁을 가만히 보고 있을지도 미지수다. 이미 방사장이 강천석 논설실장이나 송희영 실장 등 호남 출신을 중용한다는 볼멘 소리가 나오고 있다. 정치부·사회부 기사가 과거에 비해 지나치게 연성이라는 비판도 있다. 한 기자는 “<조선일보> 역사상 조직 내부에서 인사 불만이 터져 나온 것은 처음이다. 대선을 앞두고 내우외환을 겪을 가능성도 있다”라고 말했다.


언론학자들은 <조선일보>의 변화가 늦은 감이 있다고 지적한다. 한 언론학 교수는 “정권 교체 후에도 전혀 바뀌지 않던 <조선일보>가 안티조선운동과 세무 조사를 겪고 최근에 노풍까지 만나면서 강한 위기감을 느낀 것 같다”라고 최근 변화 이유를 분석했다. 그는 조선의 조직이 워낙 역동적이어서 잘 풀어갈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회의적인 견해도 있다. <기자협회보> 정구철 편집장은 “조선이 변화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지금까지 고집스럽게 지켜온 경직된 노사관·대북관·정치관을 버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라고 말했다. 결과야 알 수 없지만 <조선일보>에 예전에는 결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변화의 기운이 꿈틀대는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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