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쳐도 죽고, 흩어져도 죽네
  • 당진·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2.05.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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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노조 ‘파업 산개 투쟁’ 그후/해고·가정 붕괴·조합원 갈등 ‘3중고’
5월8일 어버이날, 박경숙씨(35)의 가슴에는 카네이션이 달려 있지 않았다. 지난해에는 딸 희윤(7)이가 만든 종이 카네이션을 달았었다. 올해 희윤이는 어버이날을 그냥 지나가면서 아빠가 보고싶다고 칭얼댔다. 동생 도호(3)도 어른만 보면 “아빠”라고 불렀다.


박씨는 70여 일 동안 남편과 ‘별거’하고 있다. 가정의 달 5월은 박씨 가족에게 잔인한 달이다. 박씨의 남편은 당진화력발전소 노동조합위원장 김주헌씨이다. 김씨는 이호동 발전노조 위원장과 함께 서울 명동성당에서 농성하고 있다.




지난 4월3일 발전노조원들은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사는’ 산개 투쟁을 끝내고 현장에 복귀했다. 정부마저 백서를 만들 만큼 파업의 파장은 컸다. 하지만 38일 동안 파업해서 노조가 얻은 것은 파업 후유증뿐이다. 파업으로 3백48명이 해고되었다.


노조원들이 산개하는 동안 투쟁의 80%는 아줌마 부대 몫이었다. 아줌마들이 가족대책위원회(가대위)를 만들어 맹활약했다. 가대위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이 당진발전소다. 카네이션 없이 어버이날을 보낸 박경숙씨는 당진 가대위 대표다. 파업 기간에 가대위는 당진군 한복판에서 2백여 명이 민영화 철회를 요구했다. 하지만 지금은 “속상하리만큼 열기가 차갑게 식었다”라고 박씨는 말했다.


가대위는 거의 해체 상태다. 박씨는 “사택 내에 미묘한 분위기가 흐른다. 파업의 아픈 기억을 잊으려고만 한다”라고 말했다. 지난 5월1일 서울에서 열리는 노동절 기념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박씨는 ‘동지’를 불러모았다. 약속 장소에 나간 박씨는 허탈했다. 모인 사람은 15명이었다. 박씨는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며 5월 말에 가대위의 활동을 묶은 <우리를 아줌마로 부르지 말고 동지로 불러줘>(가제)라는 책을 발간한다.


파업으로 당진발전소에서만 22명이 해임되었다. ‘해임 남편’을 둔 이정민씨(26)는 4월 급여명세서를 보고 낙담했다. 남편 장재열씨(30)가 받은 월급은 마이너스 5만7백50원이었다. 월급의 50%가 가압류되자 월급 통장에 마이너스 금액이 찍혔다. 당진발전소에서만 1백93명의 월급이 가압류되었다. 이들은 매달 월급의 50%를 떼이고 받는다.


게다가 사택에 사는 이씨는 퇴거 가처분 통지서까지 받았다. 남편이 복직되지 않는 한 이씨를 포함한 11명은 거리에 나앉을 판이다. 퇴직금마저 가압류당했다. 이씨는 최근 지역 의료보험과 국민연금 가입서가 오자, 해고를 실감했다. 야간 대학에 편입한 남편 장씨는 2백60만원에 달하는 다음 학기 등록금도 걱정이다.





‘사상 검증’ 거부한 노조원 해고당해


파업으로 인해 해고된 노동자들은 대부분 젊은층이다. 노동조합을 이끌고 있는 간부들이 30대 초반이기 때문이다. 연차 높은 선배들은 노조가 만들어지자, 눈치를 보며 간부직 맡기를 꺼렸다. 젊은 직원들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90학번인 김진문씨(32)도 해고자가 되었다. 김씨는 1998년 2월에 입사했다.


지방 대학 출신인 그는 50군데가 넘게 면접을 보았지만, IMF 취업난으로 매번 낙방했다. 낙방 끝에 공채 시험에 합격하자 김씨의 고향집에서 잔치를 벌이기까지 했다. 김씨는 “해고가 두렵지 않은 사람이 있겠느냐. 그래도 후회는 없다”라고 말했다. 김씨를 비롯한 해고자들은 매일 노동조합 사무실로 출근하고 퇴근한다. 노조사무실 출입은 허용된다. 사무실 한켠에는 투쟁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산개 투쟁 동안 주인을 잃은 배낭이 수북이 쌓여 있다. 가끔씩 조합원들이 사무실에 들러 배낭을 찾아갔다.


하지만 노조사무실마저 출입하지 못하는 해고자도 있다. 회사측으로부터 출입금지 가처분 통고를 받은 김 호(37)·이창수(32)·최재순(30) 씨는 당진군 참여연대 사무실로 출퇴근한다. 이들은 서약서와 감사를 놓고 회사측과 충돌했다. 5개 발전회사는 노동자들에게 ‘사상 검증’을 강요했다. 감사라는 명목으로 한 사람씩 불러서 ‘파업 찬반 투표에 찬성했나, 반대했나? 다음에 불법 파업에 참여할 생각이 있느냐?’고 질문했다. 이런 감사가 5개 발전회사에서 모두 이루어지자 일부 노조원들이 반발했다.




개별 감사에 대해 회사측 관계자는 “징계를 최소화하기 위해 감사를 했다. 선의의 피해자를 막기 위한 고육책이었다”라고 해명했다. 노동조합이 입수한 발전회사의 대외비 문건에는 ‘해고자가 문제를 야기하면 업무방해금지 가처분 신청과 업무방해죄로 형사 고소한다. 복귀 적극 협조자를 제외하고 구제를 최소화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감사를 거부하며 침묵 시위를 벌였던 당진발전소의 김 호·이창수 씨 등은 이런 방침에 따라 업무방해죄로 형사 고소되었다. 두 사람은 5월9일 당진경찰서에 긴급 체포되었다.


5월9일 오전8시35분, 충청남도 당진군 당진화력발전소 정문 앞. ‘해고자를 정든 일터로’라고 적힌 빨간 조끼를 입은 해고자들이 출근길 조합원들에게 유인물을 나누어주었다. 해고자 장재열씨는 ‘조합원의 힘으로 해고자를 복직시키자’는 피켓을 들었고, 김진문씨는 유인물을 나누어 주었다. 간혹 출근하는 조합원들이 유인물을 받지 않고 지나쳤다. 김씨의 눈이 붉어졌다. 이들이 출근길 조합원들에게 유인물을 나누어주는 동안 정문 왼쪽에서는 CCTV 카메라가 돌아갔고, 경비실 초소에서 당진경찰서 정보과 형사가 해고자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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