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부르는 유혹 인터넷 자살 사이트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2.05.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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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춤하던 자살 행진 다시 잇따라…‘안티 사이트’ 역효과



인터넷 자살 사이트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네티즌들의 동반 자살이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지난 4월19일 인터넷에서 만난 김지경씨(34·가명)와 여고생 조영지(16·가명)·차지영(16·가명) 양이 서울시 영등포구 대림동의 한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했다. 5월4일에는 경기도 평택시 포승면 야산에서 이석우씨(35·가명)와 백승훈(19·가명)·이성규(19·가명) 군이 자동차 배기 가스를 이용해 동반 자살했다.


인터넷 안티 자살 사이트에서 만난 자살자들이 자살 여행을 떠난 끝에 죽음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두 사건은 ‘인터넷 자살’의 시초가 된 2000년 12월 강원도 강릉시 리조텔 동반 자살 사건과 유사하다. 독약·투신·배기 가스 등 자살 방법만 다를 뿐 세 사건의 진행 과정은 판에 박은 듯 닮았다.
세 사건 모두 빚을 지거나 애인에게 버림받아 자살을 결심한 사람이 자살 여행을 계획했다. 자살 주동자는 인터넷 안티 자살 사이트 게시판을 통해 함께 죽을 사람을 찾았다. 우울증에 시달려 죽을 기회를 찾던 다른 사람으로부터 연락이 오면 자살 의지를 타진한다. 의지가 확인되면 e메일과 핸드폰을 이용해 자살 여행 계획을 짠다.


주동자는 마지막 순간에 자살 행렬 이탈


계획이 막바지에 이르면 주동자는 아직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며 빠져 나온다. 강릉시 사건에서 사업에 실패하고 빚 수천만원을 진 김민식씨(28·가명)는 다른 두 사람을 이끌고 자살 여행을 갔지만 독극물을 마시지 않고 살아 남았다. 영등포 사건 역시 카드 빚 수천만원을 지고 동반 자살을 주도한 김정근씨(26·가명)만 살아 남았다.


마지막 순간 생각이 바뀌어 나머지 사람들을 투신 자살할 아파트에 태워다 주고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평택 사건에서는 애인에게 버림받은 최인숙씨(26)가 2개월 전부터 이석우씨와 e메일을 주고받으며 동반 자살을 계획했다가, 역시 마지막 순간 마음을 바꾸고 자살 행렬에서 이탈했다. 결국 우울증 때문에 자살할 힘과 의지마저 없었던 나머지 사람들만 주동자가 깔아놓은 멍석을 이용해 자살을 감행한 셈이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평소 자살을 희망하던 제3의 인물이 이들과 극적으로 연락이 되어 죽음의 행렬에 끼어든다는 사실이다. 강릉 사건에서는 주동자와 안부 전화를 주고받던 김연수씨(당시 28세·가명)가 자살 여행을 간다는 얘기를 듣고 고속도로 톨게이트까지 쫓아나가 동참했다. 영등포 사건에서는 자살 여행 가담자인 차양과 알고 지내던 조양이 우연히 소식을 듣고 이들과 합류해 투신 자살 대열에 끼어들었다. 평택 사건에서는 백군으로부터 얘기를 들은 이군이 허겁지겁 평택으로 내려가 함께 죽었다.





안티 자살 사이트 게시판은 죽음에 이르는 길을 안내하는 악역을 맡았다. 그런데 강릉 사건과 이번 두 사건에 인터넷이 미친 영향은 조금 차이가 있다. 강릉 사건의 경우 인터넷은 자살 수단에 불과했다. 자살 여행을 떠난 세 사람이 자살한 이유는 모두 현실 세계에 있었다. 사업 실패로 인한 빚, 경마로 인한 카드 빚과 선천적인 우울증이 그 이유였다. 인터넷은 단지 이들을 연결하는 통로였다.


그러나 영등포 사건과 평택 사건에서는 인터넷이 통로 이상의 역할을 했다. 자살 결정에까지 영향을 끼친 것이다. 영등포 사건의 경우 두 여고생은 모두 중산층 가정 출신이다. 성적도 중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었다(차양은 외모 콤플렉스 때문에 자살을 시도한 적이 한 번 있었다). 힌두교의 여신 ‘칼리’를 숭배하며 죽음을 찬양했던 김씨는 빚이 있었지만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평택 사건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부모가 이혼한 이군은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지만, 백군은 평범한 생활을 해왔다. 죽음을 주도한 이씨도 빚이 약간 있었지만 그다지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한 가지였다. 인터넷에 탐닉했다는 점이다. 인터넷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해 이들을 자살 중독에 빠뜨린 것이다.


자살 직전 남긴 유서에서 이씨는 ‘인터넷 사이버 세상과의 인연이 시작된 지 벌써 수개월째, 이것도 지금은 심각한 중독 증세 같다. 단 하루도 인터넷 세상과 접속하지 않으면 내 삶이 무의미해지는 느낌이다. 게임·채팅·자살 사이트와의 접속을 단 하루도 중단할 수 없는 상태다’라고 남겼다.


경찰청 사이버 테러 대응 센터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2000년 12월부터 지금까지 자살 관련 사이트를 통해 벌어진 자살 사건은 19건이다. 사망자는 26명(10대 13명, 20대 10명, 30대 3명)에 이른다. 다소 주춤하던 자살 행진이 다시 시작될 조짐을 보이자 경찰청은 지난 4월22일부터 자살 관련 사이트를 집중 단속해 5월8일까지 관련 사이트를 91개나 폐쇄했다. 경찰청은 또 주요 포털 사이트에서 자살과 관련된 용어를 ‘금칙어’(검색이 안되는 용어)로 등록시켰다.


그러나 안티 자살 사이트를 무조건 폐쇄하고 있는 경찰의 조처에 대해 반발도 없지 않다. 사이버문화연구소 민경배 소장은 “일방적인 사이트 폐쇄는 안티 자살 사이트의 순기능도 말살하게 된다. 자살 충동을 느끼는 사람들이 위로받을 공간까지 없애서는 안된다”라고 지적했다. 문제가 된 안티 자살 사이트를 개설한 장철현씨(신경정신과 전문의)는 “안티 자살 사이트를 막으면 자살을 하려는 사람이 더 음지로 들어갈 것이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공론화해서 양성화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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