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병대 칼은 조자룡 무딘 칼”
  • 정희상 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2.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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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권 독립 보장 안돼…의문사 진상 조사 근본적 한계


"솔직히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과학 수사가 아니라 가학 수사를 했다는 말이 맞다.” 최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가 군대 의문사 25건의 축소·왜곡·조작 수사 사례를 발표하자 한 현역 헌병 수사관은 이렇게 실토했다. 그는 이어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는 경찰 수뇌부의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수사 발표(1986년)를 예로 들며 “그 시절 수사기관의 인권 유린과 왜곡 조작은 비단 군 헌병대만의 문제는 아니지 않았느냐”라고 반문했다.



그러나 경찰·검찰·국정원 등은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과거의 잘못된 관행이 국민에 알려지자 자체 개혁과 법 제도 정비를 통해 면모를 일신했다. 이에 반해 군 내부 수사기관은 그동안 잘못된 관행을 뜯어고칠 이렇다 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과학 수사냐, 가학 수사냐”



의문사위가 군 사망 사건 25건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군 의문사 사건의 특징은 △진술 조작 △사망 경위 조작 △현장 조사 부실 △구타 등 내부 사망 동기를 개인적인 문제로 왜곡한 것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1991년 육군 제1사단에서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된 남현진 이병이 군복무 부적응으로 자살했다고 헌병대가 발표했지만, 당시 부대원들이 남이병이 고참들로부터 무수히 구타당했다는 사실을 의문사위에 털어놓은 것 같은 사례가 대표적이다. 남이병은 비흡연자인데 시신 주변에서 수많은 담배 꽁초가 발견되었어도 헌병대는 이를 수사의 단서로 삼지 않았다.





또 1983년 한영현 일병이 보안사의 녹화사업 과정에서 사망했으나 헌병대는 보안대를 조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현일병이 다른 사병의 총에 맞아 사망한 사실조차 밝혀내지 못했다. 군부대 부대장이 문책을 우려해 자살로 현장을 조작했고, 헌병대는 총기 조작 사실을 파악했지만 이를 묵살했다. 1987년 사망한 노철승 상병 사건의 경우 헌병대가 부대원을 조사해 작성했다는 진술서에 헌병대 운전병의 무인이 찍혀 있었다.



이런 발표에 대해 헌병들은 무척 착잡하다는 반응이다. 군 수사 체계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외면하고 모두 헌병 잘못으로만 돌려서는 곤란하지 않느냐는 볼멘 소리도 나온다.
헌병대원들이 털어놓는 가장 큰 고충은 사망 사건이 발생하면 현장 보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한 헌병 중사는 “사망 사고가 발생하는 부대는 80% 이상이 전방 부대인데, 헌병대가 현장에 가보면 부대가 사건 현장을 훼손한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라고 말한다.



헌병대가 지적하는 사건 조작 유형은 크게 두 가지이다. 가장 흔한 유형이 대대장과 중대장 선에서 조작을 지시하는 것이다. 허원근 일병 사망 현장과 시신 상태 조작도 중대장이 지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중대장은 사건 초기부터 대대장으로부터 은폐 조작 지시를 받았다고 진술했지만 이에 대한 수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 한 가지는, 일부 특수부대 내 사망 사건의 경우 아예 사령관 지시로 헌병대가 부대 정문에서부터 차단되는 경우이다. 헌병대원들에 따르면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에 대해 수방사 관할 부대의 한 헌병 수사관은 이렇게 말한다. “아직도 청와대 외곽 부대라든지 정보·보안 계통 부대는 사망 사고가 발생해도 부대 정문에서 헌병을 못 들어가게 막는다. 이런 특수부대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 제대로 된 헌병대 조사는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헌병 수사관이 사령관이나 사단장의 제지를 뿌리치고 간신히 부대로 들어가면 조작된 현장이 기다리고 있다. 부대측은 대개 ‘몰라서 그랬다’거나 ‘살려보려고 응급 조처를 했다’ ‘부대원의 동요를 막기 위해 현장을 치웠다’ 따위 변명을 일삼는다. 누가 보아도 응급 조처가 필요 없는 끔찍한 즉사 사건인데도 살려보려고 현장을 치웠다는 식으로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현장이 훼손되었더라도 부대원 조사를 제대로 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대부분의 헌병 수사관은 현장 출동 뒤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부대측의 ‘수사 방해 작전’에 직면한다. 용의점이 있는 부대원을 조사하려고 하면 ‘대원들이 동요해 월북 사고가 날 수 있다’ ‘철책선 순찰을 나가야 한다’는 이유를 대며 현장 조사를 기피하는 일이 많다. 1사단 헌병대의 한 수사관은 “전방 사단에서는, 꼭 조사해야 하는 인원조차 데리고 나오지 못하니 헌병이 매일 부대에 들락거려야 한다. 그 사이에 부대원들 사이에 알리바이 조작이 다 이루어진다”라고 말한다.





부대장 수사 방해에 ‘예하’ 헌병대 속수무책



이런 실정이어서 일선 헌병 수사관들은 헌병대를 수사기관이라기보다는 ‘내부 감찰기관’쯤으로 인식하고 있다. 군 수사기관으로서 대접받지 못하는 것도 헌병들의 불만이다. 인원과 장비가 형편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제대로 수사하라는 것이냐는 항변도 나온다. 현재 국군 1개 사단 내 헌병대 조사 인원은 준사관 1명, 상사 1명, 중·하사 1명 등 모두 3명뿐이다. 그나마 하사 1명은 영창을 담당하는 형무담당관이므로 조사 인력이라고 볼 수 없다. 3개 연대 만여 명의 병력을 고작 헌병 2명이 맡고 있으니 애초부터 제대로 된 수사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헌병이 사고 신고를 받고 길게는 2시간 이상 걸려 현장에 도착하면 종종 훼손된 사건 현장에서 유가족과 맞부딪친다. 이런 상황에 대해 한 헌병 수사관은 “현장 조작 은폐 시비로 부대장과 유가족이 싸우는 것을 자주 목격하지만 안타까울 뿐이다. 유족은 헌병도 한통속이라고 몰아붙이는데, 현행 수사 체계에서는 유족을 도울 방도가 없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수사 인력과 장비를 보강한다고 해서 현행 군 수사 체계가 근본적으로 바뀌리라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헌병대가 각군 본부 소속으로서 일선 사단장의 지휘를 받는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 한 구조적 불신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제 헌병 지휘권을 경찰처럼 이원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작전지휘권은 사단장이 갖되 수사권은 국방부로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군대 수사 체계 전반에 대한 깊은 불신의 골을 메우기 위해서는 군대 내 의문사에 한해 공신력 있는 기구에 따로 수사를 맡겨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의문사위는 “군대 내 의문사가 발생할 경우 국방부에서 독립된 공신력 있는 제3 기관이 조사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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