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반하장인가 정당한 자구책인가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2002.11.1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성폭력 혐의자의 역고소 잇달아…여성계, 정면 대응 나서



개인 혹은 민간 단체가 성범죄 혐의자의 실명을 공개하는 사례가 늘면서 성범죄 관련 논란이 새로운 차원으로 접어들고 있다. 가해자로 지목된 남성들이 대거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여성계는 이를 ‘역고소’라고 명명해 대응에 나서고 있다. 지난 10월 중순 관련 단체가 수집해 발표한 역고소 사례는 널리 알려진 것만 15 건이다. KBS 노조 간부 출신 ㄱ씨, 소설가 ㅂ씨, 죽암휴게소 ㅂ씨 사건이 망라되었다. 이외에도 최근 제주도 우근민 도지사가 새롭게 여성부를 상대로 행정 소송을 제기했고, 성추행 파문으로 스스로 사표를 낸 전직 초등학교 교장 ㅇ씨가 사건을 공론화한 전교조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등 성범죄 관련 명예훼손 소송이 계속 늘고 있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유행처럼 번지는 역고소 사태에 대해 여성학자 조순경 교수(이화여대·여성학)는 더 구조적인 관점을 택한다. 피해자들의 저항에 대한 가해자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법학자 조 국 교수(서울대·법학)에 따르면, 성범죄 혐의에 대해 남성들이 명예훼손으로 대응하는 일은 비단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또 1986년 부천서 성고문 가해자인 문귀동이 권인숙씨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피해자 도운 여성단체, 벌금형 선고받아



하지만 현재 상황은, 피해를 주장하는 여성뿐 아니라 그들을 도운 여성단체와 이를 보도한 언론을 싸잡아 고발한다는 점이 다르다. 그 와중에 명예훼손 혐의를 인정받는 경우도 심심치 않다. 올해 피해 여성을 지원했던 대구 여성의전화측은, 가해자로 지목된 문제의 교수 2인으로부터 고소당해 벌금 2백만원을 선고받았고,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에서는 총여학생회장이 약식 기소되었다. 특히 그 가운데 한 교수는 이후 강간치상 혐의로 유죄 판결(징역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지만, 법원은 당사자가 기소되기 전에 실명을 공개해 널리 유포한 점을 들어 ‘비방할 목적이 있었다’며 명예훼손 판결을 내렸다.



이런 흐름에 대한 위기감으로 여성계는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리고 공동변호인단을 구성하는 등 정면 대응에 나섰다. 이런 와중에 나온 동국대 ㄱ교수 사건에 대한 검찰의 대응은 주목할 만하다.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일본 여성을 도운 조 아무개 교수가 같은 과 남자 교수 ㄱ씨로부터 명예훼손 및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당한 사건이다. 같은 과 동료 여교수를 고소했다는 점 때문에 일찍이 화제가 되었던 이 사건은 지난 7월 ‘성폭력 추방운동에 대한 명예훼손 역고소 공동대책위원회’(공동대책위·공동대표 이경숙, 최현무)가 구성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1월 초 검찰은 고소당한 조교수의 손을 들어주었다. 무혐의 통보를 받은 조교수는 가해 남성이 함부로 명예훼손 소송을 남발해 보았자 별 소용이 없다는 뜻이라며 논의의 공익성을 인정한 의미 있는 판결이라고 반겼다. 그녀는 또 “정직 1개월이라는 징계 조처를 받은 것은 교육부가 ㄱ씨에게 문제 행위가 있었다고 인정했다는 뜻이다. 복직은 교수들의 탄원과 그간의 ‘업적’을 참작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과 다른 교수들이 확고한 원칙을 지킨 것에 감사한다”라고 말했다.



공동대책위 공동대표 최현무 교수(서강대·불문학)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가해 남성에 대한 온정주의와 성공한 남성들의 강력한 네트워크를 재확인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그는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의 당사자인 신교수에 대한 정운찬 총장의 옹호 발언도 같은 맥락으로 보았다.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 뽑기 100인위원회’(100인위)가 공개한 사례 가운데 가장 널리 회자되었던 KBS 노동조합 간부 출신 ㄱ씨의 사건 추이도 주목할 만하다. 자신을 성추행범이라고 주장한 여성 2명과 이를 공개한 100인위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던 그가 지난 10월23일 고소를 전격 취하한 것이다. ㄱ씨는 “보도국 취재부장으로 승진해 한시도 사사로운 일에 매달릴 수 없고, 여성 가운데 한 명이 자녀를 출산했다는 것을 듣고 마음을 돌렸다”라고 말했다.



여성들은 그동안 힘들게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해온 마당이어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사실상의 승리라고 결론을 지었다. 문제를 제기한 시점에 이미 고소 기간이 지나 ㄱ씨를 성추행범으로 고소하지 못했던 여성들로서는 ㄱ씨가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을 통해 성추행 여부를 다투어 왔다. 이들은 ㄱ씨가 결심 공판 1주일 전에야 고소를 취하한 것에 주목했다. 100인위 시타(필명)씨는 “뒤늦게 고소를 취하한 것은, 자신에게 불리한 판결을 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직 그가 취하하지 않은 민사 소송에서 끝까지 싸워 진실을 밝히겠다”라고 밝혔다.



남성 중심 재판에서 여성이 겪는 고통 심해



한국여성민우회 정강자씨에 따르면, 역고소가 아닌 경우에도 성범죄 관련 재판은 피해자를 ‘의사(擬似) 피고인’으로 만든다. 왜 함께 술을 마셨는가, 사건 이후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잘 지내지 않았는가, 왜 뒤늦게 문제를 제기하는가, 왜 그 기억은 생생하면서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는가, 라는 식이다. “여기에다 노동조합 등 관련 단체에 도움을 청한 경우, 남성들이 반대파의 음모라고 항변하는 것까지 판박이다”라고 100인위 시타씨는 말했다.



전문가들은 성범죄의 경우 ‘합리적인 인간’이 아닌 ‘합리적인 여성’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그런 상황을 겪은 여성들이 수치심 때문에 되도록 사건을 잊으려 하고, 그 때문에 기억에 일관성이 없어지는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 국 교수는 성적 도발에 대해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합리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요구에 대해 ‘남성 중심 재판에서 여성들이 겪는 고난’이라고 주장했다.



공판에 임했던 여성 ㅊ씨도 예외가 아니었다.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고, 재판 과정 내내 상대 남성이 자신의 평소 행실에 대해 흘리는 모함에 시달렸다. 그녀는 “힘들었지만, 멈출 수 없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하여, 또는 예상되는 수모를 생각해 아예 법에 호소하지 못하는 여성들을 충분히 이해한다”라고 말했다.



이정희 변호사는 ‘이른바 바람직한 유형의 남성이 가해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부터 수사기관이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쉬울 것이 없는 남성들이 왜? 만약 그랬다면 여자들이 뭔가 문제가 있었겠지’라는 시각이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역고소에 휘말리는 경우 대부분 뒤늦게 문제를 제기하거나, 일찍이 알려도 후속 조처를 믿고 기다리다가 당사자가 현장으로 복직하거나 하는 상황이 벌어진 다음에야 대응하게 된다. 동국대 ㄱ 교수의 경우, 그가 복직하자 피해 여성이 고소 기한이 이틀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부랴부랴 일처리를 했고, 그 때문에 사실을 입증하지 못했다는 것이 조교수의 주장이다.



조순영 교수는 이와 같은 소모적인 법정 다툼은 국가가 책임을 방기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피해자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방치하는 관련 조직과, 이를 감시하지 못하는 국가의 임무 방기가 최근 사태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피해 여성들의 고통이 배가되고, 남성들도 법적인 재판보다 무서운 사회적 재판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상황을 빨리 끝맺는 방법은 없을까.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