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 전쟁 마지막 관문 뚫어라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2.1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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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목 맞은 사설 학원 논술강사 ‘강의 24시’/“이제부터가 진짜 피 말리는 레이스”



또다른 D-1, 11월8일 오후 4시30분. “새벽에 운전을 하고 가다가 정지 신호인 빨간 신호등이 켜졌습니다. 신호를 지키겠습니까?” “지키겠습니다”라고 지애(18)는 답변했다. 당황하는 기색은 없었다. 곧바로 면접관은 “만약 아버지가 중병에 걸렸습니다. 지애양이 치료비를 마련해야 합니다. 그럼 아버지를 위해 도둑질이라도 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지애는 거침없이 “네,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도둑질이라도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면접관은 “신호등을 지킨다는 것은 사회적 약속입니다.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사회적 약속입니다. 두 가지 상황에 대해 서로 다른 답변을 했으니 논리적 모순이 아닌가요?”라는 송곳 질문을 던졌다. “그게, 저기…” 지애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우물쭈물하는 지애의 모습은 그대로 비디오 카메라에 담겼다. 지애는 서울 강남 압구정동의 ㅈ 학원에서 이렇게 모의 면접을 치렀다.



11월6일, 대학입학 수학능력시험(수능)이 끝났다. 그러나 입시전쟁은 이제부터이다. 앞으로 100일 동안 피 말리는 레이스를 펼쳐야 한다. 눈치작전은 기본이고, 대학 별로 치러지는 구술·논술 전형에 대비해야 한다. 지애는 11월9일 성균관대 수시 전형에 도전한다. 학교장 추천을 받아 수시 모집에 지원한 지애는 친구들로부터 부러움을 받고 있다.



수능 다음날인 11월7일, 지애네 교실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15∼20점이 오를 것이라는 보도와 달리, 수험생이 느낀 수능 체감지수는 훨씬 심각했다. 만족할 만한 점수가 나오지 않은 지애도 정시 모집보다는 수시 모집에 기대를 걸고 있다. 수시 모집은 1차 서류 전형과 2차 심층 면접(구술 시험)이 당락을 결정한다. 지애는 구술 시험에 대비해 족집게 구술 학원에 등록했다. 3시간 강의에 학원비가 15만원이다. 그야말로 논술·구술 강사가 바빠지기 시작했다.



수능 이후 100일 동안 연간 소득 절반 이상 벌어



수능 D-1, 11월5일 오후 1시30분. 최근 서울 강남 압구정동과 대치동에서 뜨고 있는 논술강사 채기성씨(34)는 분주하게 핸드폰 키를 두드렸다. 자기가 가르친 수험생 40여명에게 “내일 시험 잘봐 ^^”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10대와 교감하는 ‘눈높이 서비스’는 기본이다. 386세대인 채씨는 끙끙거리며 20분 동안 한자 한자 문자를 보냈다.



그가 학원가에 처음 발을 내디딘 것은 2000년. 89학번인 그는 학생운동 경험을 살려 구술과 논술 시장에 뛰어들었다. 한때 의원 보좌관을 지내기도 한 채씨는 단기간에 인기 강사로 떠올랐다. 비결은 지난해 명문 ㄱ대 논술 문제를 족집게처럼 짚어냈기 때문이다. 예문까지 적중시킨 채씨 소문이 강남 학부모 사이에 퍼졌다. 그래도 채씨는 메이저 리그 진출을 거부한 채 마이너 리그에 머무르고 있다.



논술 시장을 야구로 치면 유명 학원에서 강의하는 메이저 리그 선수와 소규모 학원에서 강의하는 마이너 리그 선수로 나뉜다. 마이너 리그에서 실력을 인정받으면 유명 학원으로 진출하지만, 채씨처럼 마이너 리그를 고집하는 강사도 많다. 100명을 가르치는 유명 학원 강의가 기성복처럼 박리다매형이라면, 정원 7명 이내를 가르치는 소수 정예 강의는 맞춤복처럼 고액일 수밖에 없다. 이곳 학부모들은 학원비보다 강의의 질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채씨는 구체적인 학원비는 밝히지 않았다. 압구정동이나 대치동 일대에만 이런 소규모 학원이 100개 이상 밀집해 있다.
채씨는 11월7일부터 내년 1월20일까지 마라톤 강의를 한다. 이때 그는 연간 소득의 절반 이상을 번다. 잘 나가는 유명 강사는 두 달 동안에 1억원을 벌 수도 있다고 채씨는 귀띔했다.



11월6일 오후 11시30분. 서울 강동 ㅊ학원에서 강의를 끝내고 경기도 일산에 있는 집으로 돌아온 채기성씨는 오전 1시부터 컴퓨터를 켜고 수능 시험을 분석했다. ‘15∼20점 상승.’ 채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능 난이도에 따라 논술·구술 시장 판도도 바뀐다. 수능이 쉬우면 논술·구술 시장은 뜨겁게 달아오른다. 점수대가 몰리면 논술이나 구술 시험의 1∼2점이 당락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수능이 어려워 점수차가 벌어지면, 논술이나 구술 점수도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학원 문을 두드리는 수험생이 줄어들기 마련이다. 채씨는 연구진 2명과 함께 10여일 전부터 논술·구술 교재 여덟 권을 만들었다.



11월7일 오후 2시. 11월9일 고려대와 성균관대 수시 면접을 앞두고 구술 시험 특별반이 꾸려졌다. 수강생은 5명. 멀리 동작구나 강동구에서 소문을 듣고 온 학생도 있다. 이들은 수능 해방감을 맛볼 사이도 없이 곧바로 구술 시험을 준비했다. 채기성씨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모르면 모른다고 답변하라.” 전날 잠을 못 잔 탓인지 채씨의 혀가 꼬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채씨의 주문은 끝이 없었다. 오후 2시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채씨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상 문제를 뽑아 강의했다. ‘술과 담배는 허용하면서 마약이나 약물을 허용하지 않는 이유는?’ ‘최근 사회 문제로 떠오른 신용카드에 의한 신용불량자 문제의 원인은?’ 입시에 찌든 고등학생들에게는 버거워 보이는 질문이었다.



그렇지만 은정이(18)의 답변은 막힘이 없었다. 주5일제 논란에 대해 은정이는 연월차 문제까지 지적하며 준비된 답변을 내놓았다. 고려대 특기생 모집에 지원한 은정이는 이틀 동안 구술 면접을 치른다. 11월8일에는 영어 구술 시험, 9일에는 우리말 구술 시험을 본다. 구술 과외를 받은 적이 없는 혜리(18)는 목소리부터 작았다. 답변에 자신감이 없었다. 그녀는 2개년 계획(재수)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수강생들은 3시간 동안 예상 문제 50여 가지를 풀었다.



혜리는 “학교에서는 구술이나 논술을 가르치지 않는다. 선생님들도 학원에 가서 잘 배우라고 한다”라고 말했다. 함께 강의를 들은 혜련이도 “솔직히 논술·구술 시험은 시험을 위한 시험이다. 우리는 교육부의 마루타나 다름없다”라고 말한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혜리도 점수를 따야 한다. 그녀의 논술 노트에는 시사 문제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수능 점수 오를수록 논술 시장 달아오른다



11월8일 오후 6시. 이틀 동안 진행된 특별 강의가 끝났다. 모의 면접까지 받았다. 태곤이(18)는 면접관으로부터 자세를 지적받았다. ‘말할 때 손을 단정하게, 말을 얼버무리지 말 것.’ 그는 왜 경영학과를 지원하려는가라는 첫 질문부터 막혔다. 태곤이는 면접관의 계속되는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다. 면접관 역할을 한 전직 기자 출신 황 아무개씨(31)는 “인터넷에 익숙해서인지 언어 논리력이 부족하다. 모르는 질문이 나오면 ‘아휴’ ‘에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채기성씨는 7시30분부터 고려대·서강대 논술반 수업을 진행했다. 논술 고사가 없는 서울대는 구술반을 중심으로, 고려대나 연세대는 논술반을 운영한다. 논술로 밥을 먹고 살지만 채기성씨도 논술 시험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대학이 자존심을 버리는 게 중요하다. 고등학교 교육 현실에 맞게 논술이나 구술 시험의 난이도를 낮추어야 한다”라고 그는 강조했다.
11월8일, 가채점한 결과 수능 점수 양극화가 뚜렷했다. 상위층은 지난해보다 점수가 올랐지만, 중하위권은 더 떨어졌다. 채씨는 상위층을 중심으로 논술 시장이 달아오를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이 날 개강한 강의는 7명 정원을 훌쩍 넘었고, 하루 종일 강의 일정을 묻는 전화가 빗발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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