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보다 깊은 편견과 차별
  • 나권일 기자 (nafree@sisapress.com)
  • 승인 2002.1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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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 감염자들, 인권 사각지대에서 신음…“장애우 인정해 복지 서비스 제공을”
생명 그리고 문화’라는 주제로 제8차 람사협약 당사국 총회가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열리고 있다. 람사협약은 습지와 갯벌 보전을 위한 국제 협약이다. 3년에 한 번씩 열리는 협약 당사국 총회에서는 갯벌 및 습지에 서식하는 생물들과 인간의 공존, 그리고 습지 주변에 사는 지역 주민과 문화의 가치를 보존하고 지혜롭게 이용하는 방법 등이 논의된다.


2002년 현재 1백33개국이 람사협약에 가입했으며,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 1천2백개, 1억330만ha가 람사 사이트로 등록되어 있다. 1997년 람사협약에 뒤늦게 가입한 우리나라는 현재 대암산 용늪과 우포늪만 람사 사이트에 등록해 놓고 있다.





스페인은 한국과 반대편에 있다. 멀고도 먼 이 나라까지 한국 종교인 두 사람이 날아 왔다. 문규현 신부와 수경 스님이었다. 총회 사흘째 되는 11월20일 정오, 두 사람의 기도 수행이 시작되었다. 세 발짝 걷고 절 한 번 하는 삼보일배(三步一拜)를 통해 이들은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부정하며 지역 공동체를 파괴하는 인간의 탐욕과 개발만능주의를 참회하고, 새만금 갯벌의 생명들을 살려달라고 갈구했다.


외국인들 “삼보일배에 감동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크고 참혹한 생명 학살 현장인 새만금 간척사업을 중단시켜 달라는 간절한 고행과 기도가 2시간여 이어지는 동안 서양인들은 큰 관심을 갖고 이를 지켜보았다. 그들에게 삼보일배는 참으로 낯설고 그 의미를 파악하기 쉽지 않은 퍼포먼스였다.


여기에는 스페인 현지에 있는 한국인 수녀, 환경운동연합 등 한국 시민단체 참가자, 그리고 외국 시민단체 관계자 50여 명이 함께했다. 두 성직자는 삼보일배의 마지막에 람사 사무총장에게 세계 최대의 생태계 파괴 사업인 새만금 간척사업을 중단시키는 데 람사 사무국이 더욱 노력해 달라고 촉구하는 서한을 전달했다. 람사 사무국이 이런 형태로 서한을 받은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한다.


세계 각국 언론사들은 삼보일배를 둘러싸고 열띤 취재를 벌였다. 기자들은 “삼보일배는 영원히 잊지 못할 감동이었다”라고 말했다. 이미 정부간 회의를 앞두고 열린 세계 비정부기구(NGO) 습지회의에서도 새만금 간척사업 중단을 촉구하는 결의문과 한국의 새로운 대통령에게 보내는 호소문이 채택된 바 있다. 또 삼보일배를 한 다음날에는 새만금생명학회와 환경운동연합 주최로 ‘새만금 갯벌의 국제적 중요성’이라는 주제로 포럼이 열리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삼보일배는 새만금 갯벌 문제가 단순한 한국의 문제만이 아니라 국제적인 문제이며, 단순한 자연 보호 문제가 아니라 지속적 공존과 연대의 문제임을 국제 사회에 일깨워 주었다.


무엇 때문에 끝도 안 보이는 일을 계속하는가? 무엇 때문에 관심 가져줄 이도 적은 멀고 먼 나라에서까지 기도 수행을 하는 것인가? 문규현 신부와 수경 스님이 계속해서 들어온 질문이다. 이들은 말한다. ‘기도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퍼 올리고 죽음 속에서도 생명을 키워내는 것이다. 우리는 안해도 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해야 하는 일을, 우리가 할 수 있는 몫을, 그저 기도 속에 수행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냥 우리 길을 가는 것이다’라고.








지난 12월1일, ‘제15회 세계 에이즈의 날’ 기념 행사의 주제는 ‘편견과 차별을 넘어서’였다. 그렇다면 일반인들이 에이즈(AIDS) 환자나 에이즈 바이러스(HIV) 감염자들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과 차별은 어느 정도일까? ‘한국 에이즈 퇴치 연맹’(회장 김정수)이 지난 11월 성인 1천5백10명에게 ‘에이즈 및 성 의식’을 주제로 실시한 설문 조사 결과가 그 해답을 제시해 준다.


설문 조사 결과 ‘에이즈라면 혐오스러운 생각이 든다’(73.2%) ‘에이즈 감염은 성행위나 마약 복용으로 걸린 것이므로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56.9%) ‘에이즈 환자는 법적으로 격리해야 한다’(48.7%)는 응답이 많았다. 에이즈 환자와 식사를 같이 할 수 있다는 사람은 26.7%, 감염자가 자기 회사에 다닌다면 쫓아내거나 직장을 옮기겠다는 응답도 31.8%나 되었다.


에이즈가 어떻게 감염되는지 모르는 응답자도 상당수였다. 감염자와 면도기를 같이 사용하면 감염될 수 있고(68.9%), 모기나 벌레에 의해서도 감염된다(32.1%)는 잘못된 대답이 줄을 이었다. 에이즈 감염자와 같은 방(또는 교실·사무실)을 쓰기만 해도 에이즈에 감염될 수 있다는 기상천외한 응답도 18.6%나 되었다.


본인 책임 없는 ‘수직 감염’도 전체의 10%


전세계 HIV 감염자 및 에이즈 환자는 현재 4천2백만명. 에이즈 창궐 지역은 아프리카에서 아시아 지역으로 급속히 이동하고 있고, 감염 경로도 동성 간의 성행위보다는 이성 간의 성관계나 의료기관의 수혈, 부모로부터 비롯된 수직 감염으로 옮겨가는 추세이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2010년 에이즈 감염자가 천만명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되는 중국에서는 정상적인 의료 행위를 통해서도 에이즈가 전파되고 있다. 중국 병원에서 사용되는 주사기의 30%가 에이즈나 B형 간염 같은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오염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의료 시설이 열악한 중국 농촌지역 병원 주사기 대부분이 에이즈 바이러스에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날 때부터 감염자가 되는 수직 감염도 전세계 에이즈 감염에서 10%를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에이즈는 눈부시게 ‘세계화’하고 있는데 우리 사회의 인식은 에이즈 예방법이 제정되었던 1980년대에 머물러 있다. 동성애자들을 마치 전염병 보균자로 취급하는가 하면, 에이즈 감염자와는 침을 섞거나 피부 접촉을 하는 것만으로도 감염될 수 있다고 겁낸다. 에이즈 감염자라도 약을 복용하거나 치료하면 정상인처럼 살아갈 수 있는데도 환자는 물론 감염자까지 인적이 드문 곳에 집단 수용하거나 격리해야 한다는 사람이 많다.


이같은 편견과 차별이 국내 에이즈 퇴치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우선 감염자 수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국내 보건소에서는 누구나 익명으로 에이즈 검사를 받을 수 있지만 양성 반응이 나오는 순간부터 정부의 관리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익명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일반인이 자꾸 검사를 꺼리고 감염자들이 음지로만 숨는 이유이다.


현재 공식으로 집계된 국내 에이즈 감염자 수는 1천8백88명(2002년 9월말 현재). 평균 매일 1명씩 감염자가 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몇 사람이 에이즈에 감염되었는지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에이즈 관련 단체 주변에서는 정부가 발표하는 공식 감염자 수에 0을 하나 더 붙여야 현실적이라고 말한다.


에이즈에 대한 편견은 감염자에게도 큰 고통을 주고 있다. 에이즈 감염자인 박광서씨(30). 그는 ‘대한 에이즈 예방협회’ 간사로 활동했고, 매년 100 차례 넘게 학교와 사회단체에 나가 에이즈 예방 강연에 나설 정도로 ‘알려진’ 에이즈 활동가이다.


박씨는 그러나 자기가 살고 있는 ‘쉼터’의 위치나 전화번호를 외부인들에게 알리지 않는다. 휴대 전화도 꼭 발신 제한 표시를 해야 마음을 놓는다. 에이즈 감염인들이 드나든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져 집주인에게 쫓겨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에이즈 전담 의사나 간호사·자원봉사자 들도 마치 007 작전을 하듯 비밀리에 쉼터에 다녀간다.


박씨가 공동 대표를 맡고 있는 감염자 모임 러브포원(www.love4one.com)은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서만 외부와 소통한다. 러브포원은 감염자 쉼터 운영과 권익 옹호 사업, 복지 증진에 노력하는 단체. 러브포원은 박씨가 살고 있는 다세대 주택 방 한칸이 쉼터이자 연락처이고 사무실이다.


대부분의 감염자들처럼 박씨나 러브포원 회원 대다수는 직업이 없다. 후원자들이 보내오는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생활한다. 그러다 보니 컵라면 하나로 하루를 버티는 날도 있다. 박씨는 지난 10월 러브포원 홈페이지에 후원금을 보내 달라는 편지를 띄웠다. 11월 말까지 겨우 62만8천원이 들어왔다. 박씨는 후원금으로 두 달 밀린 월세와 공과금을 낸 것에 그나마 만족하고 있다.





에이즈 감염자들이 마냥 음지에서 한탄만 하고 있지는 않다. 박씨 등 러브포원 회원들은 지난 11월29일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동성애자 인권연대’ 등과 함께 에이즈 예방 캠페인인 콘돔 나누기 행사에 참여했다. 11월30일에는 동대문 두산타워 앞에서 열린 에이즈 예방 홍보 이벤트에서 러브포원 소식지와 선전물을 나누어 주었다.


“건강 보험 급여 일수 제한 풀어야”


지난 11월29일 ‘제15회 세계 에이즈의 날 종합행사’를 마련한 '대한 에이즈 예방협회'(회장 김모임)도 에이즈 감염자들과 에이즈 환자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해소하고 인권 증진 방안을 모색하는 심포지엄을 열었다.
토론자로 참여한 박광서씨는 “외국에서는 에이즈 감염인을 장애우로 인정해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감염인들이 질병이 주는 고통에다 경제적인 부담까지 이중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라며 사회의 관심을 촉구했다.


이 날 심포지엄에서는 에이즈 환자는 날마다 약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건강보험 급여일수 365일 제한 조항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에서부터 1987년 제정된 ‘에이즈 예방법’도 현실에 맞게 개정되어야 한다는 등 에이즈 감염자를 위한 의견들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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