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인권? 돈이 먼저지”
  • 차형석 기자 (papapipi@sisapress.com)
  • 승인 2002.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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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흥업주들, 선불금 안 갚고 도주한 여성 명단 공개…비판 거세자 “억울하다”



"책자를 모두 회수했다. 3백만 유흥 가족을 보호하려고 명단을 만들었는데, 언론이 아가씨들 인권만 따진다. 실망했다.” 지난 12월12일 사단법인 한국유흥음식업중앙회(중앙회) 관계자는 침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유흥주점 선불금 도주 용의자 명단’이 담긴 <서비스 월드> 11월호 별책 부록을 발간하며 홍보에 열을 올리던 때와는 딴판이었다.



<서비스 월드>는 이 단체가 내는 회보이다. 11월호 별책 부록에는 여성 2백88명의 사진·이름·주민등록번호·주소·연락처가 실려 있고, ‘대외비’라고 적혀 있다. 업주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돌아다니던 이 책자가 일반인에게 알려진 것은 12월 초. 중앙회 관계자들이 ‘탕치기라는 신종 범죄로 인해 회원 업주들이 얼마나 피해를 보는지 알리기 위해’ 책자를 들고 서울 강남경찰서 기자실을 찾으면서부터이다.



유흥업소 업주들은 탕치기를 ‘아가씨(성 매매 여성)들이 선불금을 떼먹고 도주하는 수법’이라고 말한다. 유흥업계의 선불금은 윤락업소의 선불금과 달리 매춘을 전제로 지급되는 것이 아니라 구인난에 따른 궁여지책인데도, 사회적 편견에 막혀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중앙회의 주장이다. 한 지회장은 “중앙회가 몇달 전부터 <서비스 월드>에 ‘선불금 도주 용의자’의 인적 사항과 사진을 싣는 등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다. 천군만마를 얻은 듯 고마울 따름이다”라고 말했다.



“탕치기 피해액 5백억원에 이른다”



‘유흥업소 블랙 리스트’라 할 만한 이 명단이 배포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여성단체들은 즉각 반발했다. 지난 12월9일 한국여성단체연합·매매춘근절을위한한소리회(한소리회) 등 20여 여성 인권단체들은 명단 공개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신상 정보를 공개하며 명단을 작성한 자체가 명예훼손이라고 성토했다.



인권을 침해한다는 여론에 밀린 중앙회측은 억울하다는 표정이다. 유흥업소에서 일하려는 여성들이 목돈을 요구해 선불금을 주는 것이 관행인데 이를 떼어먹는 탕치기가 극심하다는 것이다. 선불금은 ‘마이킹’ ‘앞빵’이라는 용어로 불리기도 한다. 업주들의 주장에 따르면, 선불금 액수는 천차만별이다. ‘마담’이 여러 명을 데리고 오면 선불금 총액은 억대를 넘어간다.



지난 12월12일에는 유흥업소에 여종업원을 소개해 준다면서 돈을 챙긴 탕치기 전문 사기단이 적발되었다. 여자 조직원 15명과 폭력배 11명으로 구성된 이 사기단은 지난 6개월 동안 전국 63군데에서 7억여 원에 이르는 선불금을 챙긴 것으로 밝혀졌다. 중앙회 관계자는 회원들이 입는 탕치기 피해액이 5백억원에 이른다고 말했다. 광주에 있는 한 업소 사장은 “두 사람에게 선불금 2천만원을 주었는데, 며칠 만에 떼먹고 도망갔다”라며 흥분했다.





여성단체들은 중앙회가 실제 유흥주점의 선불금 실상을 왜곡하고 있다고 말한다. 윤락을 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받아 유흥업소에서는 매춘을 하지 않는다는 중앙회의 장담과는 달리, ‘2차’는 공공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성 매매 여성을 지원하는 새움터 김현선 대표에 따르면, 선불금은 업주들이 성 매매 여성을 업소에 잡아두기 위한 족쇄이다. 일단 선불금을 받았다 하면 업소가 정한 각종 벌금 규정 때문에 순식간에 빚이 불어난다. 결근하면 월급의 30분의 1을 내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하루 벌 수 있는 수입만큼 낸다는 것이 김대표의 설명이다. 게다가 선불금에 대해 평균 이자를 월 5부씩 업주들이 챙겨간다.



업주들끼리 선불금 주고받으며 여성 매매



선불금은 사실상 업주들끼리 오가는 돈이 되기 십상이다. 한소리회 김미령 사무국장은 “선불금은 인권 유린 선불금, 인신매매 선불금이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성 매매를 그만두려 했던 30대 주부의 사례는 선불금이 어떻게 ‘매춘의 사슬’로 변하는지 잘 보여준다. ㅅ씨가 선불금에 묶이게 된 것은 1996년. 가정 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한 그녀는 기본급 30만원을 받기로 하고 광주의 한 단란주점에 들어갔다. 업소 주인은 1천5백만원 선불금 차용증에 서명하라고 요구했고, 성 매매를 강요했다. ㅅ씨는 1997년 2월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서울로 도망쳤다.


서울에서 결혼한 ㅅ씨는 분실한 주민등록증을 찾으러 경찰서에 갔다가 검거되었다. 업소 주인이 차용증을 근거로 사기죄로 고소한 상태였다. 경찰서에서 고소인과 대질 신문이 이루어졌다. ㅅ씨는 “콩밥 먹을래, 합의해 줄 테니 앞으로 내 말 들을래” 하는 업주의 말에 겁이 났다. ㅅ씨는 업주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경찰은 인우보증을 서준 업주에게 신병을 넘겼다.



아내의 행방을 찾던 남편이 업소를 찾았지만 업주는 돈을 갚기 전에는 ㅅ씨를 내줄 수 없다고 버텼다. 귀찮아진 업소 주인은 다른 업주에게 ㅅ씨를 팔아넘겼다. 다른 업주도 ㅅ씨를 또 다른 업주에게 팔았다. 두 번 업소를 옮기는 석달 동안 선불금은 1천5백만원에서 1천6백10만원으로 늘었다. 세 번째 업소로 간 지 한달 만에 ㅅ씨는 서울로 도망쳐 남편에게 왔다. 세 번째 업주는 ㅅ씨를 다시 사기죄로 고소했다.



ㅅ씨는 여성단체의 도움을 받아 법정 싸움을 벌였다. 1심에서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으나, 지난 1월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직할 수 있는 자유를 박탈당한 상태에서 윤락 행위를 계속하게 하는 방편으로 악용되고 있는 선불금은 법이 보호할 가치가 없다는 판결이었다. 윤락을 시키지 않았다고 주장하던 업주는 재판정에서 “월급 30만원을 주고 석달 계약을 했는데, 그렇다면 선불금 1천6백만원은 어떻게 받을 생각이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ㅅ씨는 지난 5월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었다.



현행 윤락행위방지법 20조는 영리를 목적으로 윤락을 알선, 강요하는 자 또는 이에 협력하는 자가 성 매매 종사자에 대해 가지는 채권을 무효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지난 6월 대구지검 상주지청의 구자헌 검사는 선불금 갈취 혐의로 고소당한 탈매춘 여성 2명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실제로 선불금으로 인한 사기죄 고소 사건에서 성 매매 여성이 무죄를 입증하기는 쉽지 않은 노릇이다. 성 매매 여성들이 법에 무지하고, 사창가 등 특정 지역과 달리 ‘2차’를 나갔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단체들은 성 매매 피해 여성에 대한 법률적 지원책 마련을 요구하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선불금 실태에 관한 진정서를 제출할 계획이다. 선불금 사슬을 끊지 않고서는 성 매매 여성의 피해를 줄이기 힘들다는 것이 이들의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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