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개 깃발에서 10만 촛불까지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3.0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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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중생 사건’ 범대위 사람들이 보낸 6개월/월드컵 때 리본 달기…서명시민 2백만 육박


'촛불’, 2002년 12월26일. 광화문은 또다시 반딧불로 빛났다. 11월30일 이후 매일 오후 6시에 열리는 촛불 시위는 영하 10° 강추위에도 계속되었다. 이 날은 특별히 ‘안티미군 청소년 대책위원회’(청소년대책위)가 주관했다.



청소년대책위는 월드컵의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지난 7월 결성되었다. 10대들은 또래의 죽음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디지털 키드’답게 그들은 인터넷에서 뜻을 모았다. ‘너 나 우리가 모여 행동한다’는 의미로 청소년대책위원회에는 대표가 따로 없다. 모두가 대표인 셈이다. 12월27일 현재 청소년 1만7천6백24명이 대표로 뛰고 있다.



10대들에게 촛불 시위는 더 이상 시위가 아니다. 지난 6월 광화문을 메운 축제처럼, 촛불 시위는 그들에게 문화가 되었다. 이 날도 중고등학생 50여 명이 참여했다. 참여한 학생들의 주장은 분명하다. 김지훈양(18)도 “어린 학생들이 보더라도 불합리하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서명용지를 돌린다. 돼지저금통에 모금도 한다. 선생님들도 이해한다”라고 말했다.



10대들도 모임 만들어 앞장



청소년대책위는 ‘미군장갑차 여중생 고 신효순 심미선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원회’ ‘네티즌의 힘 사이버대책위원회’와 함께 여중생 사건을 이끌어온 삼각 편대 가운데 하나다.
‘깃발’, 2002년 6월26일. 범국민대책위원회(범대위)가 꾸려졌다. 범대위는 시민·사회 단체 1백30여개가 결합한 연대 기구다. 일종의 연합군인 셈이다. 모태는 의정부 시민·사회 단체가 결성한 경기북부대책위원회였다. 대책위원회가 전국적으로 확대 개편되면서 참여연대와 경실련을 비롯한 시민단체가 합류했다. 범대위 상황실장은 최근오씨(39)가 맡았다. 최씨는 ‘미군기지 없는 나라 만들기 경기도 운동본부’ 출신이다. 그는 6월17일 효순이와 미선이가 숨진 날부터 현장을 지켰다.



6월26일부터 범대위는 대장정을 시작했다. 미군 2사단 앞에서 1차 범국민대회를 가졌다. 시위대는 7백명이었다. 시작은 초라했고 험난했다. 시위 과정에서 인터넷 방송 ‘민중의 소리’ 기자 2명이 연행되었고, 시위대는 의정부경찰서 앞에서 밤샘 농성을 했다.
7월23일 범대위는 의정부에서 서울로 이사했다. 사무실은 서울 명동에 있는 7평 남짓한 향린교회 교육관이었다. 최실장을 비롯해 안살림을 맡은 채희병 사무국장이 사무실을 보금자리 삼아 이곳에서 숙식한다. 나머지는 자원봉사자다. 12월24일 크리스마스 전야에도 최실장은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자원봉사자 임하나양(19)도 하루 종일 전화통에 매달렸다. 이번에 대학입학 수학능력시험을 본 임양은, 입시 지옥에서 벗어난 해방감을 누릴 겨를도 없이 매일 사무실을 지킨다.



보통 5명이 지키는 범대위 사무실은 경비를 절약하려고 상황실 역할만 한다. 그런데도 지난 10월30일 범대위는 시민운동사에 남을 기록을 달성했다. 가장 짧은 시간에 100만명 서명을 받아냈다(10월30일 기준 1백만5백5명). 12월27일 현재는 서명 집계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전국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서명지가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이다. 일손이 부족한 범대위는 집계를 미루고 있다. 최실장은 2백만명에 근접했을 것이라고 어림잡는다.



‘검은 리본’, 2002년 6월29일. 한국과 터키의 월드컵 3·4위전이 열리던 날, 광화문은 30만의 붉은 물결로 뒤덮였다. 그런데 왼쪽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단 붉은악마들이 눈에 띄었다. ‘광화문 시민 네티즌 모임’이 효순이와 미선이를 추모하는 검은 리본을 나누어 준 것이다. 이 모임은 채근식씨(40)가 이끌었다. 40대 가장이자, 평범한 시민인 채씨는, 자기가 사는 아파트 주민들이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에 검은 리본 달기 운동을 제안했다. 글을 읽은 주민 10여 명이 의기 투합했다. 이들은 한·터키전이 열리기 전날, 밤을 새워 검은 리본 3천개를 손수 만들었다. 이 날 이후 채씨를 비롯한 네티즌 모임은 온라인에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사건 진상을 영문으로 번역해 유수 언론사에 보냈고, 청와대와 법무부에도 항의 메일을 보냈다. 사이버 대책위원회의 발단이었다. 현재 채씨는 사이버 대책위원회 대표를 맡고 있다.






신부의 지팡이·목사의 부채…



지난해 12월27일 출범한 사이버 대책위원회는 회원만 10만명이 넘는다. 네티즌들은 지금까지 두 차례 백악관 사이트를 공격했고, 오프라인 활동도 강화하고 있다. 사이버 대책위는 맥도날드 햄버거 안 먹기·코카콜라 안 마시기·007 영화 안 보기, 이른바 ‘3안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지팡이와 부채’, 2002년 11월21일. 미군 2사단 앞에서 범대위 공동대표 한상렬 목사와 문정현 신부가 삭발을 했다. 이 날 여중생을 친 니노와 워커 병사는 ‘그들만의 재판’에서 무죄 평결을 받았다.



문신부는 삭발을 하며 눈물을 흘렸고, 한상렬 목사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끌어오르는 분노를 어떻게 억누를 수 있느냐.” 한상렬 목사의 외침에 이어, 문정현 신부는 아예 아스팔트에 드러누웠다. “왜, 한국 경찰이 가로막느냐”라고 문신부는 외치고 또 외쳤다. 그러나 전경은 문신부의 지팡이를 빼앗았다. 이에 앞서 공동대표인 김준기 교수는 경찰이 휘두른 방패에 이마가 찢겨 병원에 실려갔다. 공동대표단이나 시민들이나 한국 경찰에 수난을 당했고, 미군은 3중 바리케이드 뒤에서 이 장면을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했다.



삭발한 한상렬 목사는 지난 12월2일 미국으로 날아갔다. 한상렬 목사와 홍근수 목사를 비롯한 항의단 6명은 미국 전역을 돌며 시위를 벌였다. 12월6일 한목사는 백악관 앞에서 흰 부채를 펼쳐 혈서를 썼다. ‘민족 자주.’ 그는 혈서 부채를 들고 백악관 진입을 시도하다가 미국 경찰에 막혔다. 범대위 공동대표인 홍근수 목사는 효순이와 미선이의 사고 현장 사진을 들고 시위했다. 항의단은 꼬박 하루 동안 거리 단식 농성을 벌였다. 원래 항의단은 1백30만명의 서명지를 백악관에 전달할 계획이었다.





찢긴 성조기·비에 젖은 성조기…



‘찢긴 성조기’, 2002년 12월14일. 월드컵 이후 최대 인파가 시청앞 광장에 모였다. 10만의촛불 시위대는 대형 성조기를 찢었다. 한 참석자는 “찢긴 성조기는 오만한 미국을 응징하는 상징이다. 이를 반미로만 해석해서는 곤란하다”라고 말했다. 1주일 전 12월7일에는 촛불 시위대 5만 명이 미국대사관 앞까지 진출했었다. 이 날 촛불 시위를 처음으로 제안한 네티즌 ‘앙마’(김기보씨)는 마이크를 잡고 눈물을 흘렸다.



주말마다 촛불 시위가 계속되자 일부 언론과 정치권은 ‘보이지 않은 손’이 있다고 들먹였다. 최근호 범대위 상황실장은 “보이지 않은 손은 네티즌과 시민들이다”라고 말했다. 비용만 보아도 그렇다는 것이다. 매주 진행되는 촛불 시위에는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든다. 12월14일 10만명이 참여한 촛불 시위에는 3천9백만원이 들었다. 범대위는 모금함을 100개 돌렸고, 이날 하루만 성금 2천8백10만원이 모였다. 나머지는 1백30개 시민단체들이 십시일반으로 보탰다. 시민들이 모아준 한 푼 두 푼으로 촛불 시위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비에 젖은 태극기’, 2002년 12월23일. 28일째 촛불 시위가 열렸다. 겨울비가 내렸다. 우산도 쓰지 않고 안수근씨(22)는 비에 젖은 태극기를 흔들었다. ‘태극기맨’으로 통하는 그는 네티즌들 사이에서 유명 스타다. 안씨는 11월30일부터 하루도 빼지 않고 촛불 시위에 나왔다. 촛불 시위에 참가할 때마다 태극기를 들고 온다. 촛불 시위의 단골 사회자 김성규씨(33)는 이 날도 핸드마이크를 잡고 시위를 진행했다. 서울 도봉구 상계동에 사는 김씨는 매일 오후 6시 광화문으로 출근한다. 통닭집을 운영하는 김씨는 생계도 팽개쳤다.



범대위는 될수록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항의집회를 진행하도록 배려한다. 마이크를 설치하고 집회 공간만 만들어준다. 그 공간을 메우는 것은 오로지 시민의 몫이다. 김씨가 촛불 시위를 진행하는 동안 양리사양(18)은 청소년들이 직접 만든 신문 <바이러스>를 나누어 주었다. 중학생 조아영양(16)은 시민들을 붙잡고 서명을 부탁했다. 조양의 부탁을 받은 김민애씨(35)는 서명한 뒤 성금 만원을 냈다.



해를 넘겨서도 두 여중생의 죽음에 항의하는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6월13일 사고 현장에 달려가 현장 사진을 찍었던 이용남씨, 인터넷에 오른 이씨의 사진을 보고 네티즌을 모은 채근식씨, 2백일이 넘게 집을 나와 범대위 상황실에서 먹고 자는 최근호씨, 그리고 서명운동에 동참한 2백만 시민. 대장정을 이끌어온 이런 주인공들이 새 정부에 거는 기대는 한 가지다. ‘불평등한 주둔군지위협정(SOFA)은 반드시 개정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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