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조폭, 손잡고 날 뛴다
  • 정희상 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3.03.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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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밀입국한 조선족 조직 폭력단이 한국 조직 폭력단과 손잡고 마약·밀수·살인 청부 등 각종 이권에 개입하면서 범죄 세계에서 한·중 국경이 사라지고 있다.



지난 2월27일 밤, 경기도 안산시 원곡동에 자리한 ㅋ호프집에서 일대 난투극이 벌어졌다. 조선족 밀집 지역과 인접한 이곳을 근거지로 유흥업소 갈취와 이권 개입을 일삼던 지역 조직 폭력배(조폭) 10여명이 조선족 아가씨들을 데리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때마침 건너편 술좌석에 있던 이 일대 조선족 조폭 일행이 이 장면을 보고 한국 조폭에게 접근했다. 조선족 여자들에게 술시중을 들게 하는 것이 고깝다는 시비였다.


험악해진 양측의 분위기는 곧장 편싸움으로 번졌다. 의자와 집기가 날아가고, 육탄전이 벌어졌다. 한국 조폭 한 명이 대형 생맥주 피쳐 잔을 깬 뒤 조선족 두목의 얼굴을 찔러 심각한 상처를 입힘으로써 난투극은 일단락되었다. 기세가 꺾인 조선족 조폭은 국내 조폭에게 무릎을 꿇었다. 앞으로 그 일대에서 국내 조폭의 하수인으로 활동하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그러나 이 날 편싸움은 경찰에 사건 접수조차 되지 않았다. 시비가 붙은 초기에 다른 술손님들이 다 빠져나간 데다 승자인 국내 조폭이 비밀에 부쳤기 때문이다. 부상한 조선족 조폭을 병원으로 옮겨 치료해 주었고, 호프집 주인에게는 회유 반 협박 반으로 입막음했다. 부서진 집기 일체를 변상하는 대신 경찰에 신고하면 후환을 각오하라는 위협을 가했던 것이다. 하마터면 그냥 묻힐 뻔했던 한·중 조폭 간의 이 난투극은 국가정보원 국제범죄정보센터가 우여곡절 끝에 실태를 파악했다.


조선족 타운 중심으로 ‘흑사회’ 세력 확장


1990년대 중반부터 하나 둘 한국에 진출한 조선족 조폭들이 곳곳에서 뿌리를 내리면서 국내 조폭 세력과 각종 연계를 맺어가고 있다. 국내에 진출한 조선족 조폭은 크게 조선족 타운에서 활동하는 경우와 국내 폭력 조직과 이권을 매개로 뭉친 경우로 나뉜다. 먼저 국내 조선족 밀집 거주 지역인 서울 가리봉동 조선족 타운과 안산 원곡동·원산동에 자리한 조선족 타운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경우이다. 이들은 평소에는 조선족을 상대로 금품 갈취를 일삼는 등 범죄를 저지르다가, 한국인이 의뢰해 오는 청부 폭력을 수행하고 뒷돈을 받기도 한다.


서울 가리봉동 대림동 가산동 봉천동 신림동 일대는 1999년 무렵부터 조선족 밀집촌으로 변했다. 역시 비슷한 시기에 경기도 안산시에도 조선족 타운이 생겨났다. 현재 두 지역에는 각각 조선족 5만여명이 밀집해 살고 있다.
이곳 조선족 타운에 자리 잡은 조선족 조폭은 이미 중국 조선족 사회에서 파벌을 형성하며 활동하던 이들이다. 일명 ‘흑사회’라 불리는 중국 조폭 세력 가운데 이름을 떨치는 조선족 출신 조직은 10여 파로 알려진다. 이들은 조선족 밀집 지역인 중국 동북 3성은 물론이고, 최근에는 베이징에까지 진출해 그 잔인함으로 악명을 얻고 있다. 한·중 수교 이후 중국에 진출한 한국인들의 식당이나 유흥업소를 중심으로 활동 무대를 넓힌 것이다.





중국 현지 조직간 암투가 한국에까지 연장돼


원래 흑사회는 중국의 폭력 조직을 통틀어 일컫는 표현으로 `‘어둠의 자식들’ 또는 `‘조폭 세력’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국제 사회에서는 아시아 조폭 세력 전체를 통틀어 트라이어드(삼합회)라고 부르는데, 이는 서방의 시각일 뿐이다. 정작 중국 공안 당국은 트라이어드나 흑사회라는 말을 쓰지 않고, 구체적인 파벌 이름을 사용한다.


중국 전역의 흑사회 중에서도 서울 가리봉동 일대는 지린성 옌볜(延邊)과 룽징(龍井)을 무대로 활동하는 일명 ‘뱀파’ ‘호박파’ ‘승리파’ 조직이 장악하고 있다. 안산시의 조선족 타운은 헤이룽장성과 상하이 출신 두 분파의 주된 활동 무대이다. 가리봉동 일대 조선족 조폭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지난해 봄, 이들이 이 일대에서 집단 편싸움 끝에 저지른 살인 사건들 때문이었다.


가리봉동에서 30년째 약국을 운영하고 있는 정 아무개씨는 최근 경험한 조폭들의 행태를 이렇게 말했다. “칼싸움이 무섭다. 작년에 특히 심했다. 조선족을 상대로 장사하는데, 겁 나는 일이 많다. 바로 앞 주점 주인이 조선족 조폭들에게 어깨에 칼을 맞고 입원해 있다. 마약을 하는 것도 문제이다. 우리 약국에서도 처음에는 멋모르고 1회용 주사기를 많이 팔았는데, 마약 때문이라는 사실을 안 뒤부터는 주사기를 취급하지 않는다.”


기자는 수소문 끝에 서울 가리봉동을 무대로 활동하는 조선족 조폭 호박파 소속 양 아무개씨를 만났다. 양씨에 따르면, 호박파는 조선족이 밀집해 사는 중국 지린성 옌지(延吉) 시의 허난 지역을 무대로 활동하는 ‘가장 센’ 조직이라고 한다. 그는 자기가 호박파 출신이라는 점은 인정했지만 한국에 돈을 벌러 왔을 뿐 조폭 활동을 하러 온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가 한국에서 하는 일은 조폭 활동의 연장선이나 다름없었다. “조선족 교포의 임금을 떼먹는 악덕 사업가를 찾아가 대신 돈을 받아주고 있다. 지난주에도 안산으로 원정 가서 사장 집 앞에 5일간 잠복한 끝에 6개월 밀린 임금을 받아 주었다.” 그는 주로 완력을 행사해 조선족의 밀린 월급을 받아주고, 절반을 수고비로 챙긴다고 했다.


양씨에 따르면, 국내에서 벌어지는 조선족끼리의 편싸움은 사실은 조직끼리의 보복극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빈발하고 있는 국내 조선족간 살인 사건의 원인을 한국 경찰은 ‘이국살이에 따른 스트레스와 우발적인 범행’이라고 분석하지만 실제로는 중국 현지에서 발생한 조직간 암투가 한국에까지 연장되었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상대 조직원을 살해하고 공안의 수배를 피해 한국으로 들어온 조직원에 대해 피해를 본 조직이 사람을 보내 보복극을 벌인다는 것이다. 지난 한 해 국내에서 발생한 조선족간 살인 사건은 총 13건. 그 대부분의 사건에 이같은 배경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양씨의 귀띔이다.





호화판 술자리 어울리며 ‘우의’ 과시


조선족 인권 문제를 상담하는 대림동 조선족 교회 최한규 목사는 그동안 파악한 조선족 조폭 활동 양상을 이렇게 전한다. “조선족 조폭은 주로 현장 노동자를 갈취하거나 조선족타운 도박판에서 돈을 갈취하는데, 요즘은 동포들의 체불 임금을 받아주는 청부업자도 많아졌다. 나는 동포들에게 그런 조직을 이용하면 범죄와 폭력이 악순환된다며 만류하지만 워낙 체불 임금이 많아 조폭이 설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조선족 교회가 지난 2년간 조선족의 체불 임금을 받아준 것만도 16억원. 그러나 이 액수는 빙산의 일각이다. 조선족 조폭을 통해 체불 임금을 해결한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이다.


한국인 범죄 조직이 불법 체류자라는 약점을 구실로 조선족을 악용하는 것도 큰 문제로 대두하고 있다. 조선족을 고용해 채권 해결이나 살인 폭행 등 청부 업무를 맡기고 있는 것이다. 범행을 저질러도 지문 감식이 불가능한 데다, 중국으로 돌아가거나 종적을 감추면 완전 범죄가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난 1월23일 불법 체류 중인 조선족들이 내국인 현금·카드 위조 전문 사기단과 공모해 3억여원을 빼내 쓴 사건도 비슷한 사례다. 당시 범행에 행동대원으로 가담했던 조선족 이철권·권국현 씨는 다행히 조선족 교회의 설득으로 경찰에 자수한 뒤 중국으로 추방당하는 선에서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조선족 타운을 무대로 하는 조폭 외에도 한국 전역에서 활동하는 조선족 조폭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한국 조폭과 사업 및 이권에서 긴밀한 관계를 맺고 보호를 받는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 3월2일 인천 국제공항 입국장 앞에는 고급 외제 승용차인 벤츠500이 여러 대 멈추어 섰다. 서울을 무대로 활동하는 신흥 폭력 조직 ○○파 일행이 중국에서 들어오는 조선족 폭력 조직원들을 마중나온 것이다. 이들 일행은 광장동 워커힐호텔로 향했다. 이들은 워커힐호텔 카지노에서 도박에 열중하는가 하면, 밤에는 국내 조폭의 안내를 받아 강남의 룸살롱에서 호화판 술자리에 어울리는 등 ‘우의’를 과시했다. 그 중 두목은 지난해 말 내연의 처를 국내에 데리고 들어와 최고급 산부인과로 알려진 한 병원에서 1주일간 출산·입원을 시키고 돌아갔다.


살인범 도피와 마약 밀매 첩보를 입수하고 이들의 동태를 감시했던 한 수사관은 이렇게 말했다. “조선족 조폭 가운데 중국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공안의 수배를 받아 한국으로 도피해 들어온 부하들을 챙기려고 그 조직 보스가 들어온 자리였다. 살인범들은 국내 신흥 조폭의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서로 품앗이 관계였다.”


마약 밀매·조선족 불법 송출로 막대한 이권


한·중 양국 조폭 사이의 품앗이 관계란 국내에서 살인·강도·마약 범죄 등 강력 사건을 저지르고 중국으로 도피한 조폭을 현지 조선족 조폭이 숨겨주고 보호하는 대신, 중국에서 범법 행위를 한 조선족 조폭을 국내 조직이 같은 방법으로 보호하는 경우를 말한다. 한·중 조폭 간에는 어느새 깊은 공생의 커넥션이 형성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런 관계에서 이미 서울에 진출해 합법적으로 사무실을 차린 중국 조폭 조직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서울 동대문과 남대문 시장, 그리고 국내 굴지의 백화점 매장들에는 중국 조선족 흑사회 조직이 진출해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 과정에서 길을 닦아준 쪽은 당연히 국내 조폭. 반대로 국내 조폭은 동북 3성에 있는 굴지의 백화점에 매장을 가지고 있다. 국내 조폭 중 서방파 출신들이 중국 조폭과 긴밀한 커넥션을 이루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이들이 양국에서 의류 도매상 등을 운영하면서 합법적인 의류 수출입을 가장해 불법 마약 거래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의류를 보내면서 그 속에 마약을 집어넣어 안전하게 현지 수요자에게까지 공급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국내 검찰과 경찰은 이런 범죄 수법을 한 번도 적발한 적이 없다. 현재 국내에서 비밀리에 유통되는 필로폰의 90% 이상은 중국산이다.


그렇다면 양국 사법 당국은 이같은 실태를 전혀 모르고 있을까. 한마디로 지금까지는 한·중 양국 조폭의 ‘나는’ 범죄 수법에 수사 체계는 ‘걸음마’ 수준이라는 점이 문제로 지적된다. 갈수록 지능화하는 양국 조폭들의 범죄 수법을 아직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왼쪽 상자 기사 참조).
마약 밀거래 외에도 조선족 조폭과 국내 조폭은 조선족 불법 송출 사업에도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중국으로 도피한 조폭 출신들이 현지 조선족 조폭과 손잡고 서류를 위조해 대규모 초청 사기를 벌이는 것이다. 이런 수법으로 이들이 조선족 1명당 받는 수수료는 천만원선. 한국과 중국의 조폭은 불법 인력 송출을 통해 수백억원대 이권 사업에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국외 추방해도 다시 밀입국해 속수무책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5월 적발된 중국 동포 밀입국 알선 조직 홍 아무개씨 일당이다. 이들은 조선족 천여명을 국내에 밀입국시키고 막대한 이권을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또 중국 현지에서는 ‘사두’(뱀머리)라는 조선족 밀입국 알선 조직이 결성되어 국내에 파견해둔 조선족 조폭 및 한국 조폭과 결탁해 인력을 불법 송출하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문제는 조선족 조폭과 국내 조폭의 불법 커넥션에 대한 근본 대책을 마련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범죄를 저지른 조선족 조폭을 적발해 추방해도 여권을 위조해 다시 들어오면 달리 제재할 방법이 없다. 또 국제 범죄 정보를 취급하는 국가정보원 국제범죄정보센터(국제범죄 신고 전화 111번)의 기능을 해외에만 국한하자는 주장도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그만큼 사회의 모든 부분이 국제화하는 추세에 따라 조폭 사회도 두부 자르듯 국내 조폭과 국외 조폭으로 나누는 것이 무의미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국제 범죄에 대처하는 능력을 키우는 일은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국가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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